http://rikszine.korea.ac.kr/…/article/discourseList.minyeon…

'불행한 일들이 많고, 생존경쟁이 공격적으로 격화된 시대에 명랑을 말하기가 참 그렇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또 명랑해야 된다는 생각을 나는 하는데, 명랑하다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 전체, 그 힘 전체를 표현해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이다. 명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온갖 힘을 다 해서 우선 그 자리를 밝게 만들고 우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활력을 갖게 만들어주고 하는 태도다. 자기 자신도 거기에서부터 어떤 힘을 얻고 또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서 희망 같은 것을 얻어내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다. 그건 이런 시대에 한 개인의 성격적 표현이 아니라 어떤 덕목의 실천이라고 나는 생각을 한다. 명랑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 생각하고, 사랑하고, 옆에 사람들 염두에 두고 그래야 명랑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든 희망을 가지려고 애쓰고 이럴 때 그 명랑함이 만들어지고 그 덕목이 실천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명랑이란 단어를 딱 듣자마자 김애란 소설가의 '달려라 아비'가 생각났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 전체, 그 힘 전체를 표현해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 요즘 정치적 냉소주의나 냉소적 우월성-나르시시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어쩌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 전체를 다 쓰지 않아서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 쓰지 못하고 남은 힘이 다 쓰지 못하게끔 만든 대상을 향해 이상한 방식으로 투사된 결과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 명랑했던 적이 있었는가 자문해보게 된다. 그 자리를 어둡게 만들고 주변 사람들의 힘을 빼앗았던 적은 기억이 잘 나는데... 왠지 모르게 피곤하고, 권태롭고, 무기력한 기분에 자주 빠지게 되는 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명랑. 어떤 위기상황을 대비해 여분의 힘을 남겨놓지 않고 다 쓴다는 것.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쓰이는 '애쓴다'는 표현이 입가에 맴돈다. 애쓴다, 애써. 무엇이 이뤄지고 이뤄지지 않고를 떠나서 애쓰는 자세 자체가 참 중요하게 느껴진다. 언어 속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상실하는 사람. 진은영 시인은 모리스 블랑쇼를 이렇게 소개했다. 애쓰는 언어는 가난하면서 고귀할 것이다. '달성되기 위한 희망의 아니라 희망 그 자체로 남기 위한 희망'을 제 청춘을 기어코 만들어내는 젊은 시인의 언어처럼. 희망은 그렇게 가까스로 태어난다(고 말하고 싶다)

http://www.hankookilbo.com/v/b4c11c623b7842ccb4a5538a66a1f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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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개인적으로 손에 꼽는 광고 카피 중 하나다. 이 세상에는 참 좋아도 설명할 방법이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이 불충분한 설명, 그러니까 화자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본디 언어화를 거부하는 사물이 있다는 것, 언어화할 수 없는 불가능의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때문이다.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나의' 좋음을 너에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이 어려움에 대처하는 태도가 크게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태도와 '좋은 게 좋은 거지' 같은 모호한 동어반복이 산출하는 뉘앙스를 통해 은근슬쩍 넘어가는 태도와 네가 뭘 좋아하는지, 심지어 내가 뭘 좋아하는지에 무관심한 태도. 

 각자 개별성을 존중하는 자유주의적 태도라 볼 수 있는 첫 번째 태도는 '쿨'하지만 나의 좋음을 너에게 설명할 수 없다(좋음을 언어로 설명하기에 어려움과 가까스로 언어화해도 상대방과 소통하는데 어려움)는 불가능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한적 소통을 하고 있고, 이 제한은 언어의 재현 불가능성이란 본질적 불가능이 아닌 특정 대화 소재의 금기화라는 점에서 불가능인 척하는 인위적 불가능의 토대 위에 있다. 소통가능한 것인지 불가능한 것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검토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않은 채, 충분히 시도해보지 않은 채 말할 수 없는 것, 말 꺼내면 피곤하기만 한 귀찮은 것으로 합의한 것처첨 보인다. 정치적 냉소주의를 깔고 있는 다원주의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는(예를 들면 과학의 과학의 영역, 종교는 종교의 영역, 선을 나누고 소통을 거부하는 태도) 여지가 보인다.    

 두 번째 태도는 갑질 같은 자기동일성의 폭력적 양태에서 흔히 볼 수 있으니 자세히 서술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세 번째 태도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세 번째 태도의 지배적 정서는 무심함이다. 정서적 권태라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이 무심함은 나의 좋음을 너에게 설명하는 어려움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했다기보다 삶이 기계적으로 변하고, 기계적 작업 이외의 정서와 느낌의 영역이 일상에서 추방당하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사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정서와 느낌의 영역이 일상에서 추방되는 과정에서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경우에서 그래도 공유할 순 없을 지라도 각자의 좋음/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타자가 존재한다면 이 경우에서 타자는 없다. 타자의 느낌에 무관심하지만 자기 느낌에 취해 있는 나르시시트도 있겠지만 느낌의 소통불가능성에 좌절해 느낌의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킨 이들도 있을 것이다. 피곤해서 정서적으로까지 피곤해지길 거부한 사람, 그래서 정서 자체가 피곤-권태로워진 사람.

 

 무심함, 정서적 권태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보자. 이를 테면 사무적 대화. 사회에서는 사무적 대화라는 대화양식이 존재한다. 사무적 대화는 일, 작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대화를 칭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사무적 대화의 포인트는 주체성의 제거, '나'를 드러내는 정서나 느낌의 은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무적 대화는 직장에서 대화가 아니라 영혼 없이 정보만 공유하는 대화를 의미한다. 기계적 대화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으나 주체성의 제거와 더불어 나의 느낌의 은폐라는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사무적 대화라는 표현을 채택했다.) 우리는 복사기에게 작업시키면서 수고해달라는 말을 건네거나 깔끔하게 잘 뽑아다고 격려해주지 않는다. 복사기는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여기엔 작업의 성과나 결과만 중요할 뿐 작업과정 속에 노고, 감정상태, 고통 등은 중요하지 않다.(기계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잘 쓰면 오래가고, 잘 못 쓰면 얼마 못 가 고장나는 기계를 보면서 기계도 단순히 소모품이 아니라 소중히 다뤄야 하는 사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지만 기계처럼 대하고, 다루고, 살면 기계와 비슷해진다. 인간-기계. 

 직장이 아닌 생활공간에서는 사무적 대화가 아닌 정서적 대화가 충분히 가능하고 이뤄지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생활공간에서도 정서는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들처럼 기운 없이 누워 있는, 흡사 죽은 것처럼 있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굉장히 복합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라 피상적 차원의 논의는 의미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블로그인만큼 자유롭게 생각을 풀어보고자 한다. 과잉연결/접속, 피상성, 고독의 부재, 타인에게 곁을 내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상의 키워드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이 필요한 시간>과 엄기호의 <단속사회>에서 빌려왔다. 타인에게 곁을 내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 배제의 두려움이 가장 큰 요인이리라. 무심함은 무한단속의 반복이 만들어낸 정서의 굳은 살, 죽은 딱딱한 껍질 같은 것은 아닐까.

 

 참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네. 이 말을 인문학에게 빌려줘도 괜찮을 것 같다. 인문학도들은 알고 있다. 인문학에 길이 있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가치와 깊이의 마르지 않는 샘이 있음을. 그런데 그 좋음을 남들에게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의미나 가치는 공부-실천 속에서 체득되어야 하는 것인데 외부로부터 강요되면 심리적 거부감을 야기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육체활동처럼 직접 한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뜸과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보니 접근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전문가/조력자의 길잡이 역할-자발적 향유 수순이 일반적일 텐데 일차적으로 제도권 교육 내에서 '인문정신'-비판적, 성찰적 지성을 가르치는 교육이 작동하지 않고 있고, 작동하는 곳에서도 밥벌이에 대한 지난한 압박이 향유를 가로막는다. 또 향유라는 말이 의미하듯 공부는 고통과 뒤섞인 쾌락이다. 처음에 인문정신을 가르쳐주시는 스승을 만나기도 힘들고, 그래서 처음에 재미 붙이기도 힘들고, 재미는 붙였는데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교양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으로 만들기가 어렵다. 인문학에서 쌀이 안 나오기 때문에. 인문학으로 사람사는 구색 갖춰놓으면 살 수 있는 사람은 대학교수 등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젊은 학생들에게 인문학공부는 애초에 '지는 싸움' 정도가 아닌가 싶다. 최고 수준의 인문학자, 예술가를 보면 인생을 거기에 다 걸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정도로 치열하게 할 자신이 없으면 다른 직업생활하면서 책 읽는 게 나을 지도... 

 

 인문학도의 부정적 이미지 : 현실도피(책에 파묻혀 사는 상아탑의 이미지), 백수(아무 것도 하는 게 없어 보이는 사람), 세상에 불만이 많은 불평분자, 반동분자(너는 왜 그렇게 세상에 불만이 많니? 둥글게 살아), 이상주의자(넌 너무 이상적이야. 현실과 이상을 타협하는 게 중요해), 현실감각 떨어지는 사람,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배부른 사람, 책 좋아하는 사람(책 읽는 거 좋아하나봐요. 취미로서의 독서), 문자놀음하는 현학적인 사람, 취업 잘 안 됨, 먹고 살기 힘듬, 스티브 잡스처럼 기술에 인문학을 접목시킬 것, 융복합의 시대-통섭의 시대-'쓸모 있는' 인문학의 발명(인문학 2.0), '시대에 맞춰 인문학도 변해야 합니다' 운운.

 

 문학을 읽으면서 갖게 된 내 질문은 왜 그들은 이런 삶을 선택했을까였다. 처음엔(고등학교1학년 때) 자기희생을 통한 인류공헌한 위대한 구도자의 이미지로 봤지만 후에 그게 전부가 아님을, 물론 시대의 광풍 속에서 길을 제시하기 위해 지식인으로서, 예술가로서, 구도자로서 피할 수 없는 당위도 있지만 그것보다 그들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음을, 남들이 보기에 고통으로 가득찬 수행의 길인데 그들에겐 고통 속에 즐거움/향유가 있는 행복한 실존의 길이었음을 조금 알게 되었다(하지만 이 행복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복과는 다른 무엇일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투사일 것 같았던 이육사 시인이 실은 심약한 젊은이였음을, '천사'라고 못 박아놓은 나이팅게일(혹은 슈바이처 박사일 지도 모르겠다)이 구호활동에 번민하고 회의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질문을 앎의 차원, 인식론적 차원에 한정했기 때문에 고통 속에 향유가 존재함을 결코 알 수 없었다. 그건 정신적 차원이 아닌 물질적 삶의 차원, 존재론적 차원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보지 않는다면 결코 제대로 알기 힘든 것을 말/지식으로 설명하려고 하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울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슬프다는 정보는 습득할 수 있지만 그 슬픔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에서 인문학부가 축소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입시생들이 '취업 잘 되는 이공계열'로 다 가려고 하는 인문계열 기피현상이 위기인가? 모든 것을 화폐가치로 환원하는 물신주의, 신자유주의 질서에 매몰된 사회에 비판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힘 없는 인문학의 위상이 위기인가? 인문서적이 서점에서 안 팔리는 게 위기인가? 인문서적 안 읽는 학생-시민들이? 안 읽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시민의식이? 스펙 쌓느라, 돈 버느라 책을 안 읽게 하는? 책을 재미없게 쓰는 작가들이? 책을 재미없게 쓰게끔 인간과 사회를 이따구로 만든 신이? 공부해도 직업현장에서 써먹을 게 없는, 인문학도를 받아주는 데가 없는 직업생태가 문제인가? 그런 직업생태계를 조장하는 사회구조가? 모든 걸 문제라 지목하면 아무 것도 문제가 아닌 게 된다. 구체적인 토론내용으로 들어가보자.  

 한 토론자는 인도를 이야기했다. 인도에 IT붐이 일었을 때 대학에서 IT관련 학과들을 신설하거나 다른 과를 IT과로 바꿨다고 한다. 그 결과 비약적인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그런데 사회자가 IT 밀어주기에 따른 인문학의 축소로 인해 사회에 부정적 결과는 없었냐고 묻자 토론자는 거기까지 조사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경제성장지표(경제성장률 ~%, GDP ~~달러)만으로 그 국가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사고방식. 이 노린내 나는 썩은 정신이 상류층으로 갈수록 넓게 퍼져 있으리라. 암세포처럼. 그리고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 사회의 주류일 것이다. 사회적 권력으로 보나 숫자로 보나. 대학 안에든 밖에든 CEO든 노동자든. bon sens. 교육현장에서 기업가적 주체를 양산하는 동시에 산업현장에서 노동자의 권리, 아니 목숨을 짓밟는 나라. 나라가 경제성장할수록 서민들은 살기 힘들어지는 나라. 그 많던 경제성장은 누구 주머니로 갔을까.

 인문학이 사회에 구체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을 수치로 환산하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라는 의견은 역시 신자유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지만 일견 타당성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를 잘 수행한 예시가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에 제시돼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문학작품이 법정에서 합리적 판단을 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법이 시민사회의 일반적인, 평균적인 의식을 반영한다고 했을 때 더 많은 문학이 있는 시민사회는 더 정의로운 법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또 평화지수나 행복지수 같이 더 나은 삶을 위해 경제보다 어떤 가치가 중시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더 많이 발명되고, 그 지표를 경제성장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면 인문학이 우리 구체적인 삶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문학의 본질은 잉여적인 것, 통상적인 관점에서 쓸모없음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인문학의 쓸모없음으로 해서 사회가 말하는 쓸모있음을 반성적,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많은 분들이 김현 평론가의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또 창조나 창의성은 현재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이행하는 데서 산출되지 않는다. 창조는 미래의 것을 현재에 도래시키는 행위가 아닌가. 현재를 열심히 따라가는 사람은 지금 시스템에서 잘 생활할 수 있을진 몰라도 미래의 것을 창조해내지 못할 것이다(토마스 만은 토니오 크뢰거에서 생활하는 자는 창조하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스마트폰 기계는 열심히 만들어도 기술은 발명하지 못하는 나라. 

 스티브 잡스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사실 인문학이 어떤 방식으로든 경제적 효과를 내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불편함을 느꼈다. 경제-쓸모와 가장 멀리 있는 지점에 인문학 본연의 가치가 있는데 이제 인문학자들도 이게 이렇게 해서 쓸모가 있고, 도움이 되는 겁니다, 인문학의 쓸모 있음을 해명해야 하는 시대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서... 학제적 연구, 통섭적 연구 다 좋은데 자기 할 일부터 제대로 하고 융합하고 통섭하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만 평생을 해도 제대로 하기 힘든 게 학문 아니던가...      

 '조급함은 죄다' 카프카의 경구를 몸 속 깊이 새기게 되는 날들의 연속이다. 그런데 도저히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무한경쟁을 조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대기권 속에서 살고 있다. 숨을 쉬어야 사는데 숨을 쉴수록 힘들어진다. 점점. 체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점프'하게 되면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게 된다. 작년 와우북축제에서 고병권은 이런 말을 남겼다. 묵묵. 묵묵히 읽고 쓰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아닐까 하고. 묵묵히 공부하는 것. 다음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더 잘 공부하는 것(여기서 공부는 읽고 쓰는 행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p.s 최근에 철학과 다니는 친구를 사귀었다. 만나면 서로 넋두리를 풀어놓게 된다. 친구는 자꾸 지금이라도 취업공부할까 나에게 묻는 것 같진 않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처럼 툭 뱉는다. 나는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길이 나오지 않을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게 말해 본다. 어느 때보다도 고학력자들이 많은데 역설적으로 공부하기 힘든 시대. 이 풍요와 빈곤의 양극화 속에서 공부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인문학)공부하는가, 왜 공부해야 하는가 묻고 묻고 묻는다. 인문학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인문학을 공부하기 힘들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현실'이란 그럴 듯한 명분으로 우리를 협박하는 불한당들은 누구인가. 경희대 대학원 이만열(임마누엘페스트라이쉬) 교수의 말을 옮기면서 번잡한 글을 일단 닫는다. '현실은 직업 활동이 아니다. 현실은 기후 변화, 도덕/윤리 의식의 위기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바로 그것이다.    

 

 참 좋은데 말로 설명할 길이 없구나. 직접 읽어보길, 직접 느껴보길, 직접 살아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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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아도르노의 페이퍼가 제공되었지만 3강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프로이트를 보충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할애됐다.

 

 건강한 애도와 건강하지 못한 멜랑콜리의 구분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관계성>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누구나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자아를 구축하는 데 이 관계의 형식에 리비도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근대적 자아는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는 동시에 부차적 객체를 만들어내는 자기동일화를 수행하는데 반해 수동적 자아는 대상과 닮으려고 하는 모방(미메시스)으로 타자동일화를 수행한다. 앞선 강의에서 지적했던 서양의 시각의 절대적 우위성, 주체적 자아의 폭력성에 반하는 미메시스적 자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언급한 벤야민뿐만 아니라 '사물시'의 릴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주객을 분리하는 서양의 사고방식이 인도-유럽어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오정희를 인용하면서 생생하게 설명해주셨던 언어라는 상징계로의 진입에 대한 추가적 설명이 이어졌다. 언어는 사물을 객체의 지점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나와 언어로 호명된 사물/대상. 바르트는 자기동일화를 수행하는 권력적 언어에서 타자동일화를 수행하는 탈코드적 언어로 변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어서 철학이 육체성의 언어이고, 따라서 에로틱하며, 소설이라는 설명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가장 인상적인 꼭지 중 하나였던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에 대한 글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철학과 문학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김진영 선생님은 아무래도 문학적 로고스를 더 사랑하지 않으실까 하는 ^^ 헤겔에 대한 삽화가 재밌었는데 어렸을 때 정시에 '댕~댕~' 울렸던 성당의 종소리가 헤겔에서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헤겔의 치밀하고 정교한 시스템의 철학은 죽음공포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정신의 요새 같은 것이라고 했다.

 

 언어라는 상징계로의 진입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같이 일종이 통과제의인데 통과제의를 거치지 못한 사람들은 구강기에 머물며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그 대표적 인물로 프루스트를 꼽았다. 육체가 병약하기도 했지만 프루스트에게 침대는 상실한 어머니의 육체, 불가능한 애도의 공간이었을 거라고 했다. 애도되지 못한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지난 시간의 말이 떠올랐다. 한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시인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나갔는데 거기서 70 먹은 할머니가 어렸을 때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그 앙금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걸 보고 시인은 할머니에게 "그 기억을 믿으세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상처받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자세 중 하나는 자기연민일 것이다.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고 타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 그 감정의 내용이 원한일지라도 리비도가 운동하긴 할테니까. 

 

 그런데 통과제의를 잘 거쳤다고 생각되는 자아의 건강성도 실은 자신의 일부를 타자화시켰을 때 갖춰지는 균형이라고 했다. 남성적 자아는 뱉는다, 여성적 자아는 삼킨다. 독일어 fressen이란 표현.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 여성은 남성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보다 남성을 더 잘 알고 있다(남성 시스템에 과잉적응한 여성은 남성보다 더 남성적이다), 하인은 주인보다 주인을 더 잘 알고 있다, 신하는 군주보다 군주를 더 잘 알고 있다. 크리스테바의 '비체' -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질적인 것, '혐오스러운 맛있는 음식'. 이 혐오스러운 맛있음의 양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 있었는데 김기덕 영화의 여성들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평소에 좋아하는 선생님이 김기덕 영화의 여성들이 남자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그 폭력이 '혐오스러운 맛있'어서가 아닐까 하고. 

 

 먹기와 먹히기의 사례로 카프카의 변신Der Verwandlung과 단식광대를 예시로 들었다. 어느 날 갑충으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는 식욕을 잃어버린다. 여동생은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우유와 신선한 채소를 갖다주지만 그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배불러서가 아니다. 맹렬한 허기를 느끼지만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40일 이상 단식을 지속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깬 단식광대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먹고 싶어. 그런데 맛있는 음식을 찾을 수 없어'  먹기에서 쾌락은 먹히기에서 온다고 한다. 나Ich의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는 먹기는 단순히 영양소섭취에 머물지만 자아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내가 아닌 다른 것, 즉 타자성을 내 몸 안으로 들어올 때 도취는 일어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마무리하고 아도르노의 역사철학, 문명사적 논의로 이어지면서 차원을 확장했다. 

 

선사 시대(애니미즘) - 마술적 단계 - 신화 단계 - 종교 단계 -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현대) 

 

이 문명의 발전사를 인간의 주체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아도르노의 틀이었다고 한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신화인데, 그것이 근대성modernity의 원천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게 신화는 '자연'이라고 하는 불가해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서사의 권력'. 이 신화의 서사가 자연을 설명하고 지배하는 동시에 배제와 추방이 이뤄진다. 특히 근대는 사회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려는 기획이었고, 이 근대성의 폭력에 반발해 다양성을 들고 나오는 포스트모던의 비판이 뒤따랐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이 근대라는 시스템이, 아우슈비츠의 참극이라는 처참한 실패로 사형선고를 받은 근대(화)가 이성에 의한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근대화는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진행되는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는데 실상은 폭력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주먹도끼나 돌도끼가 아닌 원자폭탄 같은 첨단과학기술이나 관료제 같은 복잡한 법-시스템의 폭력으로 대체된 것뿐이라는 진단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철학자들이 로그스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크리스테바의 비체 개념에 대한 숙지(혐오스러운 맛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와 법폭력 이전의 근원적 폭력으로서, 폭력의 원형식으로서 언어/이성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남겼다. 

 

 p.s 어떤 분이 질문해주셔서 김진영 선생님의 말씀을 좀 더 들어볼 수 있었다. 요약하면 공부의 존재론/윤리학이랄까. 공부하기 힘든 시대이고, 공부를 하면 끝에는 그리스 시대처럼 빛나는 진리가 아니라 쓰레기가 있는데 공부를 안 하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소극적 방어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위,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지진 않았지만(멜랑콜리커라서 그런걸까?) 역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구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세를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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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립도서관에 꽂혀 있는 녹색평론 1-2월호를 읽었다. 작년 9월 29일 시민행성에서 강의하신 나희덕 시인의 <대화적 스승 무지한 스승> 강의록을 읽을 수 있어 반가웠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에서 제안한 예술적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 아니 길러낸다기보다 학생 내면에 잠재된 가능성을 스스로 끄집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교육. 출처가 불분명해진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필자가 루브르박물관 앞에서 청소부와 예술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프랑스의 문화적 수준에 대해 부러워했다는 내용.

2. 스마트폰의 유해성을 중점적으로 논의한 대담도 재밌게 읽었다. 대담자로 나오신 시민운동가 분들이 참여한 EBS토론도 봤던 터라 생각을 연장해볼 수 있었다. 중, 고등학생들이 직접 참여했던 토론회에서 '전문가' 어른들이 스마트폰이 신체에 미치는 악영향 등등의 자료를 제시하면서 아이들을 의식화하려는 계몽적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접근으로는 학부모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아이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감시하고 억압하고 규제하는 걸 부추길 수 있겠지만 아이 스스로 자제력을 키우고 조절하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적'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미 중독된 아이를 대화와 교육적 접근만으로 회유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보이는 동생을 말로 설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이 나온 상태였다. 대화를 '잘' 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겠지만 '가장 가까운 타자'인 가족 간 소통불능성이랄까... 외부의 도움을 청해볼 생각이다.

3. 사색/사유/고독 불능의 사태로 몰아가는 '스마트'폰은 학생들을 가장 광범위하게 침해하고 있지만 정부는 스마트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이를 권장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유아. 엄마들이 우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 스마트폰을 쥐어준단다. 부모는 죄를 짓기 가장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시민들의 무지를 탓하기 이전에 아무런 법적 규제나 공론화에 관심이 없는 정부와 핸드폰 파는 데 눈 먼 대기업을 비판해야 겠지만 시민사회에 스마트폰의 악영향에 대한 인식이 뿌리내리기 전까지 스마트폰이 뿌리내릴 몸들을 생각하면 무서운 이미지들이 육박해들어온다. 피해는 낮은 곳에서 발생한다. 스마트폰 랜덤채팅을 통한 여중생/여고생 성매매. 특목고나 자사고, 강남 지역의 아이들의 경우 스마트폰이 없거나 2G폰을 쓰는 비율이 높다는 내용이 대담에 나온다. 법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드러난 법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정의로 이끄는 법-폭력.

4. 작년 시민행성에서 들었던 도정일 선생님의 말씀. 세월호에 있던 아이들도 스마트폰하느라 탈출하지 못했다는 내용. 지나가던 말씀으로 가볍게 던지셨는데 그땐 아마 평소에 대학강단 내지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부정적 효과에 대한 걱정이 크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라고 이해했다. 만약 스마트폰이 문제라 치더라도 누구/무엇에 책임을 물어야 할까. 스마트폰에 중독된 당사자? 스마트폰을 사준 부모? 이렇게 중독성이 높은 유해상품을 개발한 스티브 잡스? 그 스마트폰을 각종 혜택으로 치장해 팔아먹은 핸드폰 장사꾼들? 자본주의 사회에선 피해자/가해자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의 대기권 내에선 우리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이고 세월호이지 않을까.

5. 중독. 작년 6월 7일 시민행성에서 진행한 세월호 시민 집담회에서 진은영 시인은 우리 모두 뭔가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라는 진단을 내렸다. 녹색평론 대담에서 김종철 선생님도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쓸데 없이 이것저것하게 된다고 했다. 나도 평소에 책이 잘 안 읽힐 때 인터넷 사이트를 돌며 글을 봤던 습관이 있어 격하게 공감했다. 포털사이트에 걸린 기사들, 씨네21, 웹진 문장, 예스24 칼럼들, 페이스북, 대산문화, 민연, 블로그 등등... 하지만 그렇게 '발동'이 걸려 게걸스럽게 조각글을 읽을 때는 긴 글을 소화하기 무척 힘들었고, 읽고 나서도 남는 게 거의 없었다. 모니터를 1시간 이상 보고 있으면 머리가 조금 띵해지고, 열받는 느낌이 드는데 전자파에 맷집이 약한 것 같다. 운 좋게 노트북이 고장났고 3달 가까이 노트북 없이 살고 있는 중이다. 필요할 땐 시립도서관 정보자료실을 이용하는 데 한 번에 이용할 수 있는 최대시간이 3시간이라 쓸데없이 서핑하는 시간을 줄이게 된다. 무엇보다 노트북으로 흘렀던 리비도로 인한 희미한 공허감, 권태감으로부터 해방된 게 최대의 수확이다. 도서관에 올 일이 많아지니 종이신문도 읽게 되고, 인터넷으로 딴짓(?)도 안 하게 되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데도 좀 더 집중력이 붙은 것 같다. 문제는 이제 노트북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한 번 중독되면 끊기는 어렵지만 재개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는 중독의 위력을 상기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생각해보게 된다. 조금 거창하게 이런 생각도 덧붙여보기도 한다. 중독된, 오염된 몸을 어떻게 정화할 것인지, 해방할 것인가.

6. 술, 담배 말고 한국형 중독 금은동을 어떻게 뽑을 수 있을까? 스마트폰/SNS/야동/치킨(육식)/성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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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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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기분의 영도

 

기분stimmung. 기분.

 

 

기분은 무엇인가. 기분은 감정, 정서, 느낌과 어떻게 다른가. 개념들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물어볼 수 있다. 명확히 구분이 가능한지 물어볼 수도 있다. 그 명확한 구분이 폭력적이지 않은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그런 기분이 있다. 그런 기분. 언어의 칼을 들이대면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아 '대명사'로 에둘러 설명할 요량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남근 중심- 팔루스 - 로고스 중심주의 뭐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 느낌을 피하고 싶다는 것만 전달되면 된다.

 

이번엔 느낌. 느낌.

 

 

기분과 느낌은 어떻게 다른다.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을 시도하는 것보다 일상적 언어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면 좀 더 기분과 느낌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느낌이 든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그와 만나기 전, 이를 테면 약속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만나서 무엇을 할지 생각하기만 해도 바보 같은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웃음은 부서진 발음이라고 적었던 것 같다. 상투적인 언어의 질서를 뒤틀린 균열에서 웃음은 흘러나온다. 새어나온다. 논리의 그물을 포섭되지 않고 삐져나온 감정의 생동. 그런 웃음이 나온 순간 우리를 찾아오는 건 좋은 기분일까, 좋은 느낌일까.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런데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무게추가 좀 더 기우는 쪽은 기분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비가시적이고 비실체적이지만 느낌 쪽이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다면 기분은 희미하지만 넓게 퍼져 있는 안개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괴팍하게 나눠본다면 느낌은 액체이고, 기분은 기체이다. 느낌이 좀 더 직접적인 행동에 따른 반작용, 입력에 따른 출력으로 생성돼 농도가 짙다면 기분은 반대로 행동-사건에 대한 예감,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것 같은, 그래서 직접적 구체적 행동/사건에 대한 느낌이 아닌 주변 공기에 대한 느낌이라서 농도가 묽다. 

 

이 어설픈 정리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자명하지만 더 나은 실패를 위한 초석을 놓는 데 의의를 두고 이렇게 정리해보자.

너를 기다리는 동안, 만나러 가는 동안 드는 건 좋은 기분이다.

네가 입은 옷이 너와 정말 잘 어울렸을 때, 그래서 네가 이전의 모습을 모두 지워버릴 만큼 사랑스러울 때, 신기하리만치 얘기가 쉴 새 없이 이어질 때 드는 건 좋은 느낌이다.

 

기분이 부사라면, 느낌은 형용사? 

나는 내일 기분이 좋을 것이다.

느낌은 너와 나 사이 상냥한 무릎의 각도에서 나온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 읊조리다 보면 좋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다.

너는 이미 일종의 기분이 되어버렸다. 너는 이미 날씨가 되어버렸다. 너는 내 마음의 지형을 주조한다. 너는 이 세상에 없는 기후이다. 등등.   

 

1 기분은 어떻게 오는가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시인 이성복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문제는 형식. 화살처럼 한 점을 뚫고 지나갈 기세로 강렬하게 꽂히는 느낌이 있는가 하면, 비에 젖은 봄의 저녁공기 같은, 가로등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빗방울에서 느껴지는 온기 같은, 어제 같이 바람이 매서운 날 어묵국물이 뿜어대는 팔팔한 연기 같은 느낌이 있다. 느낌적인 느낌. '~~'적인 것이란 표현이 유행처럼 많이 쓰이고 있는데 그만큼 언어라는 틀을 벗어남으로써, 그 틀에서 삐져나오면서 매순간 자신을 재정의하는 존재를 붙잡기 위한 시도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느낌적인 느낌은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기분적인 기분이란 표현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걸 보면 역시 기분은 좀 더 흐릿하고 희미하고 큰 단위여서 한 번에 전체를 포착하는데 어려움이 따르지 않나 생각된다.

 

2014.6.7 시민행성에서 세월호 집담회에 참여했다. 철학자, 시인, 평론가 등과 일반 시민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얘기해보는 시간이었다. 거기서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도무지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래도 이런 자리에 참석해 조금씩 기분이 생기는 것 같다.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온갖 문자매체에서 세월호 관련된 글을 읽었지만 기분은 오지 않았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의 서사적 과정 파악의 부재와 나 자신에 함몰되어 있었다는 점. 한 마디로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구조과정 속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나쁜 놈/년'인지, 누가 아이들을 죽였는지 알 수 없었다. 선장? 배에 탄 승무원들? 유병언 회장? 무능한 해경? 대대적인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고 허위보도한 언론? 언론에게 그렇게 보도하라고 입김을 넣은 검은 입? 위기상황 속에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대통령? 모르겠다. 몰라서 슬픔도 모호하다. 어정쩡한 슬픔. 슬픈 일인 줄 알겠는데 왜 슬퍼야 되는지 스스로에게 설명이 안 되는 슬픔. 멜랑콜리적인 것. 슬픈 느낌이 아니라 슬퍼야 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슬퍼하지 못하는. 잘 안 슬픈. 잘 안 슬퍼서 잘 지내는 것 같은.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잘 지내지 못해서 슬픈, 슬픈데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게 슬픈, 물음표 같은 슬픔.

 

느낌은 

즉각적으로

우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오고

가버리곤 했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김소연, 그래서_수학자의 아침)

 

9월 24일 북촌창우 극장. 이 두 마디면 됐다. 시의 힘, 낭독의 힘, 슬픔의 힘. 그 말과 소리와 느낌엔 마술적, 주술적, 기적적 힘이 있었다. 그러니까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기분은.

 

1월 31일 대학로 이음 책방에서 책을 읽다 304 낭독회 낭독문이 배달된 걸 보고 시간 맞춰 낭독회로 자리를 옮겼다.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시민행성에서 강의를 들었던 시인 선생님이 내게 글을 써서 낭독에 참여해보라고 권유하셨다. 선생님이 애용하는 '마음을 뒤척여보라는' 말과 함께. 뒤척여보는 척하다 보면 뒤척여지기도 한다. 얻어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느낌으로 써낸 글을 낭독하고 내 안의 부채감, 죄의식이 씻겨질까 두려워 그 자리에서 답변을 드리지 못했다. 무감하고 무정하고 무기력한 내 모습을 감추려 한껏 과장된 포즈를 문인들이 득실거리는 낭독회에서 처참히 들키고 발가벗겨 질까봐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기분을 모으고 있다고 말해두고 싶다. 느낌들이 모여 하나의 기분을 이루길, 또 그 기분들이 모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 기분을 증폭시킬 수 있길, 그 슬픔과 애도가 하나의 정치학으로 발명될 수 있길 기다리고 있다. 다가가고 있다. 한겨레에 연재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편지를 읽는 시간, 물과 차가움, 기다림과 배신에 세월호적 감각을 대입해보는 것, 이미 흘러가버린 어둠의 시간을 불러내기 위한 몸부림, 뒤척임을 피하지 않는 것, 아니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 한겨레에 편지보다 더 자세하게 서술된 고통과 그리움과 슬픔과 사랑으로 점철된 <금요일에 돌아오렴>을 읽고 있다. 기분을 내고 싶어서 읽고 있다. 그렇게 불러낸 기분이 모이고 모여 빠져들 수 있을 만큼, 젖어들 수 있을 만큼의 강을 이루면 크게 한 번 쉼호흡하고 잠겨보리라. 작년 2월 타국의 수영장에서 발버둥처럼 필사적으로 쓸 순 없겠지만(필사적이고 절박한 글쓰기는 카프카에게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일 것이다) 필사적으로 기분 속으로 잠겨보기 위한 시도는 해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애도의 기분을 내는 글이 아닌 기분에 젖어든 글, 읽는 사람의 기분까지 젖어들 수 있을 글이 나오면 그때 그 자리에 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애도의 유효기간은 없을 테니까.  

 

2 기분은 어떻게 머무는가

 

금요일에 돌아오렴에 앞서 눈먼 자들의 국가를 읽었다. 단행본으로 묶이기 전부터 종로 반디앤루니스에서 서서, 쪼그리고 앉아서 읽었다. 김애란과 진은영의 글의 정서적 파장이 가장 짙었다. 뭐라고 썼는지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글에서 받은 느낌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러니까 나는 간절함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멜로디는 기억나지 않지만 음이 얼마나 절실하게 흔들렸는지 그 물리적 파동의 강도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분은 논리적 구조가 아닌 정서적 끈기에 의해 머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의 슬픔을 제 몸에 녹여내기 위한 부단한 몸과 마음의 부림들. 이렇게 저렇게 해보아도 타자의 슬픔이 내 것이 될 수는 없지만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슬픔이 자라기 시작한다면 기분의 공존co-existence는 가능하리라. 우리는 이를 슬픔의 연대, 애도의 공동체라고 부른다. 시인 이성복이 문학을 불가능에 대한 불가능한 사랑이라 명명했던 것처럼 불가능은 자신을 한 번 더 살아냄으로써 마이너스의 제곱이 플러스가 되듯 불가능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가까스로(심보선 시인이 이 표현을 애용한다고 한다).

 

 금요일에 돌아오렴과 눈 먼자들의 국가를 비교해본다면 전자는 유가족들의 슬픔의 속살을 (만져)볼 수 있다면 후자는 타인의 슬픔을 대하는 자세, 특히 타인의 슬픔을 육화하는 여성적 애도에 대해 많은 참조점을 주었다. 전자가 고통의 실체를 느끼게 해줬다면 후자는 그 고통과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지, 그 고통을 어떻게 끌어안아 내 삶의 영역으로 녹여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사회정치학적, 철학적, 그러니까 학문적 접근이 이뤄져야 좀 더 깊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볼 수 있겠으나 시민사회 차원에서 세월호 사건을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로 삼는 자세가 없다면 '사회개조', 변화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애도와 치유가 의사와 환자-개인의 영역이 아닌 공동체의 영역이란 것, 그런데 여기에 대고 경제적 침체를 운운하는 입이 직접적으로 먹고사는 데 문제가 생긴 소시민들이 아닌 국가였다는 것, 누구보다 나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 이 정부와 광화문에서 폭식투쟁한 이들은 그리 멀어보이지 않는다. 왜 눈 먼자들의 국가인지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잘 알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도 우리의 눈은 다시 침침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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