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아도르노의 페이퍼가 제공되었지만 3강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프로이트를 보충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할애됐다.
건강한 애도와 건강하지 못한 멜랑콜리의 구분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관계성>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누구나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자아를 구축하는 데 이 관계의 형식에 리비도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근대적 자아는 주체적 자아를 강조하는 동시에 부차적 객체를 만들어내는 자기동일화를 수행하는데 반해 수동적 자아는 대상과 닮으려고 하는 모방(미메시스)으로 타자동일화를 수행한다. 앞선 강의에서 지적했던 서양의 시각의 절대적 우위성, 주체적 자아의 폭력성에 반하는 미메시스적 자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언급한 벤야민뿐만 아니라 '사물시'의 릴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주객을 분리하는 서양의 사고방식이 인도-유럽어로부터 직접적으로 기인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오정희를 인용하면서 생생하게 설명해주셨던 언어라는 상징계로의 진입에 대한 추가적 설명이 이어졌다. 언어는 사물을 객체의 지점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나와 언어로 호명된 사물/대상. 바르트는 자기동일화를 수행하는 권력적 언어에서 타자동일화를 수행하는 탈코드적 언어로 변화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어서 철학이 육체성의 언어이고, 따라서 에로틱하며, 소설이라는 설명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가장 인상적인 꼭지 중 하나였던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에 대한 글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철학과 문학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김진영 선생님은 아무래도 문학적 로고스를 더 사랑하지 않으실까 하는 ^^ 헤겔에 대한 삽화가 재밌었는데 어렸을 때 정시에 '댕~댕~' 울렸던 성당의 종소리가 헤겔에서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헤겔의 치밀하고 정교한 시스템의 철학은 죽음공포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정신의 요새 같은 것이라고 했다.
언어라는 상징계로의 진입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같이 일종이 통과제의인데 통과제의를 거치지 못한 사람들은 구강기에 머물며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그 대표적 인물로 프루스트를 꼽았다. 육체가 병약하기도 했지만 프루스트에게 침대는 상실한 어머니의 육체, 불가능한 애도의 공간이었을 거라고 했다. 애도되지 못한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지난 시간의 말이 떠올랐다. 한 시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시인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나갔는데 거기서 70 먹은 할머니가 어렸을 때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그 앙금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걸 보고 시인은 할머니에게 "그 기억을 믿으세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상처받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자세 중 하나는 자기연민일 것이다. 자신을 피해자로 설정하고 타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 그 감정의 내용이 원한일지라도 리비도가 운동하긴 할테니까.
그런데 통과제의를 잘 거쳤다고 생각되는 자아의 건강성도 실은 자신의 일부를 타자화시켰을 때 갖춰지는 균형이라고 했다. 남성적 자아는 뱉는다, 여성적 자아는 삼킨다. 독일어 fressen이란 표현. 먹기와 먹히기의 역설. 여성은 남성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보다 남성을 더 잘 알고 있다(남성 시스템에 과잉적응한 여성은 남성보다 더 남성적이다), 하인은 주인보다 주인을 더 잘 알고 있다, 신하는 군주보다 군주를 더 잘 알고 있다. 크리스테바의 '비체' -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질적인 것, '혐오스러운 맛있는 음식'. 이 혐오스러운 맛있음의 양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 있었는데 김기덕 영화의 여성들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평소에 좋아하는 선생님이 김기덕 영화의 여성들이 남자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그 폭력이 '혐오스러운 맛있'어서가 아닐까 하고.
먹기와 먹히기의 사례로 카프카의 변신Der Verwandlung과 단식광대를 예시로 들었다. 어느 날 갑충으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는 식욕을 잃어버린다. 여동생은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우유와 신선한 채소를 갖다주지만 그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배불러서가 아니다. 맹렬한 허기를 느끼지만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40일 이상 단식을 지속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깬 단식광대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먹고 싶어. 그런데 맛있는 음식을 찾을 수 없어' 먹기에서 쾌락은 먹히기에서 온다고 한다. 나Ich의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는 먹기는 단순히 영양소섭취에 머물지만 자아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내가 아닌 다른 것, 즉 타자성을 내 몸 안으로 들어올 때 도취는 일어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마무리하고 아도르노의 역사철학, 문명사적 논의로 이어지면서 차원을 확장했다.
선사 시대(애니미즘) - 마술적 단계 - 신화 단계 - 종교 단계 -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현대)
이 문명의 발전사를 인간의 주체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아도르노의 틀이었다고 한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신화인데, 그것이 근대성modernity의 원천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게 신화는 '자연'이라고 하는 불가해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서사의 권력'. 이 신화의 서사가 자연을 설명하고 지배하는 동시에 배제와 추방이 이뤄진다. 특히 근대는 사회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려는 기획이었고, 이 근대성의 폭력에 반발해 다양성을 들고 나오는 포스트모던의 비판이 뒤따랐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이 근대라는 시스템이, 아우슈비츠의 참극이라는 처참한 실패로 사형선고를 받은 근대(화)가 이성에 의한 필연적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근대화는 폭력에서 비폭력으로 진행되는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는데 실상은 폭력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주먹도끼나 돌도끼가 아닌 원자폭탄 같은 첨단과학기술이나 관료제 같은 복잡한 법-시스템의 폭력으로 대체된 것뿐이라는 진단이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의 철학자들이 로그스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크리스테바의 비체 개념에 대한 숙지(혐오스러운 맛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와 법폭력 이전의 근원적 폭력으로서, 폭력의 원형식으로서 언어/이성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남겼다.
p.s 어떤 분이 질문해주셔서 김진영 선생님의 말씀을 좀 더 들어볼 수 있었다. 요약하면 공부의 존재론/윤리학이랄까. 공부하기 힘든 시대이고, 공부를 하면 끝에는 그리스 시대처럼 빛나는 진리가 아니라 쓰레기가 있는데 공부를 안 하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이다. 소극적 방어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위,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지진 않았지만(멜랑콜리커라서 그런걸까?) 역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구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세를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