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기분의 영도
기분stimmung. 기분.
기
분
기분은 무엇인가. 기분은 감정, 정서, 느낌과 어떻게 다른가. 개념들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물어볼 수 있다. 명확히 구분이 가능한지 물어볼 수도 있다. 그 명확한 구분이 폭력적이지 않은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그런 기분이 있다. 그런 기분. 언어의 칼을 들이대면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아 '대명사'로 에둘러 설명할 요량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남근 중심- 팔루스 - 로고스 중심주의 뭐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 느낌을 피하고 싶다는 것만 전달되면 된다.
이번엔 느낌. 느낌.
느
낌
기분과 느낌은 어떻게 다른다.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을 시도하는 것보다 일상적 언어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면 좀 더 기분과 느낌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느낌이 든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했다. 그와 만나기 전, 이를 테면 약속장소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만나서 무엇을 할지 생각하기만 해도 바보 같은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웃음은 부서진 발음이라고 적었던 것 같다. 상투적인 언어의 질서를 뒤틀린 균열에서 웃음은 흘러나온다. 새어나온다. 논리의 그물을 포섭되지 않고 삐져나온 감정의 생동. 그런 웃음이 나온 순간 우리를 찾아오는 건 좋은 기분일까, 좋은 느낌일까.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런데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무게추가 좀 더 기우는 쪽은 기분이라고 생각한다. 둘 다 비가시적이고 비실체적이지만 느낌 쪽이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다면 기분은 희미하지만 넓게 퍼져 있는 안개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괴팍하게 나눠본다면 느낌은 액체이고, 기분은 기체이다. 느낌이 좀 더 직접적인 행동에 따른 반작용, 입력에 따른 출력으로 생성돼 농도가 짙다면 기분은 반대로 행동-사건에 대한 예감,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것 같은, 그래서 직접적 구체적 행동/사건에 대한 느낌이 아닌 주변 공기에 대한 느낌이라서 농도가 묽다.
이 어설픈 정리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자명하지만 더 나은 실패를 위한 초석을 놓는 데 의의를 두고 이렇게 정리해보자.
너를 기다리는 동안, 만나러 가는 동안 드는 건 좋은 기분이다.
네가 입은 옷이 너와 정말 잘 어울렸을 때, 그래서 네가 이전의 모습을 모두 지워버릴 만큼 사랑스러울 때, 신기하리만치 얘기가 쉴 새 없이 이어질 때 드는 건 좋은 느낌이다.
기분이 부사라면, 느낌은 형용사?
나는 내일 기분이 좋을 것이다.
느낌은 너와 나 사이 상냥한 무릎의 각도에서 나온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 읊조리다 보면 좋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다.
너는 이미 일종의 기분이 되어버렸다. 너는 이미 날씨가 되어버렸다. 너는 내 마음의 지형을 주조한다. 너는 이 세상에 없는 기후이다. 등등.
1 기분은 어떻게 오는가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시인 이성복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문제는 형식. 화살처럼 한 점을 뚫고 지나갈 기세로 강렬하게 꽂히는 느낌이 있는가 하면, 비에 젖은 봄의 저녁공기 같은, 가로등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빗방울에서 느껴지는 온기 같은, 어제 같이 바람이 매서운 날 어묵국물이 뿜어대는 팔팔한 연기 같은 느낌이 있다. 느낌적인 느낌. '~~'적인 것이란 표현이 유행처럼 많이 쓰이고 있는데 그만큼 언어라는 틀을 벗어남으로써, 그 틀에서 삐져나오면서 매순간 자신을 재정의하는 존재를 붙잡기 위한 시도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느낌적인 느낌은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기분적인 기분이란 표현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걸 보면 역시 기분은 좀 더 흐릿하고 희미하고 큰 단위여서 한 번에 전체를 포착하는데 어려움이 따르지 않나 생각된다.
2014.6.7 시민행성에서 세월호 집담회에 참여했다. 철학자, 시인, 평론가 등과 일반 시민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얘기해보는 시간이었다. 거기서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도무지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래도 이런 자리에 참석해 조금씩 기분이 생기는 것 같다.
기분이 들지 않는다. 온갖 문자매체에서 세월호 관련된 글을 읽었지만 기분은 오지 않았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의 서사적 과정 파악의 부재와 나 자신에 함몰되어 있었다는 점. 한 마디로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구조과정 속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나쁜 놈/년'인지, 누가 아이들을 죽였는지 알 수 없었다. 선장? 배에 탄 승무원들? 유병언 회장? 무능한 해경? 대대적인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고 허위보도한 언론? 언론에게 그렇게 보도하라고 입김을 넣은 검은 입? 위기상황 속에서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대통령? 모르겠다. 몰라서 슬픔도 모호하다. 어정쩡한 슬픔. 슬픈 일인 줄 알겠는데 왜 슬퍼야 되는지 스스로에게 설명이 안 되는 슬픔. 멜랑콜리적인 것. 슬픈 느낌이 아니라 슬퍼야 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슬퍼하지 못하는. 잘 안 슬픈. 잘 안 슬퍼서 잘 지내는 것 같은.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잘 지내지 못해서 슬픈, 슬픈데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게 슬픈, 물음표 같은 슬픔.
느낌은
즉각적으로
우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오고
가버리곤 했다.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김소연, 그래서_수학자의 아침)
9월 24일 북촌창우 극장. 이 두 마디면 됐다. 시의 힘, 낭독의 힘, 슬픔의 힘. 그 말과 소리와 느낌엔 마술적, 주술적, 기적적 힘이 있었다. 그러니까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기분은.
1월 31일 대학로 이음 책방에서 책을 읽다 304 낭독회 낭독문이 배달된 걸 보고 시간 맞춰 낭독회로 자리를 옮겼다.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시민행성에서 강의를 들었던 시인 선생님이 내게 글을 써서 낭독에 참여해보라고 권유하셨다. 선생님이 애용하는 '마음을 뒤척여보라는' 말과 함께. 뒤척여보는 척하다 보면 뒤척여지기도 한다. 얻어걸리는 것이다. 그렇게 느낌으로 써낸 글을 낭독하고 내 안의 부채감, 죄의식이 씻겨질까 두려워 그 자리에서 답변을 드리지 못했다. 무감하고 무정하고 무기력한 내 모습을 감추려 한껏 과장된 포즈를 문인들이 득실거리는 낭독회에서 처참히 들키고 발가벗겨 질까봐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기분을 모으고 있다고 말해두고 싶다. 느낌들이 모여 하나의 기분을 이루길, 또 그 기분들이 모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 기분을 증폭시킬 수 있길, 그 슬픔과 애도가 하나의 정치학으로 발명될 수 있길 기다리고 있다. 다가가고 있다. 한겨레에 연재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편지를 읽는 시간, 물과 차가움, 기다림과 배신에 세월호적 감각을 대입해보는 것, 이미 흘러가버린 어둠의 시간을 불러내기 위한 몸부림, 뒤척임을 피하지 않는 것, 아니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 한겨레에 편지보다 더 자세하게 서술된 고통과 그리움과 슬픔과 사랑으로 점철된 <금요일에 돌아오렴>을 읽고 있다. 기분을 내고 싶어서 읽고 있다. 그렇게 불러낸 기분이 모이고 모여 빠져들 수 있을 만큼, 젖어들 수 있을 만큼의 강을 이루면 크게 한 번 쉼호흡하고 잠겨보리라. 작년 2월 타국의 수영장에서 발버둥처럼 필사적으로 쓸 순 없겠지만(필사적이고 절박한 글쓰기는 카프카에게나 붙일 수 있는 이름일 것이다) 필사적으로 기분 속으로 잠겨보기 위한 시도는 해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애도의 기분을 내는 글이 아닌 기분에 젖어든 글, 읽는 사람의 기분까지 젖어들 수 있을 글이 나오면 그때 그 자리에 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애도의 유효기간은 없을 테니까.
2 기분은 어떻게 머무는가
금요일에 돌아오렴에 앞서 눈먼 자들의 국가를 읽었다. 단행본으로 묶이기 전부터 종로 반디앤루니스에서 서서, 쪼그리고 앉아서 읽었다. 김애란과 진은영의 글의 정서적 파장이 가장 짙었다. 뭐라고 썼는지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글에서 받은 느낌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러니까 나는 간절함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멜로디는 기억나지 않지만 음이 얼마나 절실하게 흔들렸는지 그 물리적 파동의 강도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분은 논리적 구조가 아닌 정서적 끈기에 의해 머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의 슬픔을 제 몸에 녹여내기 위한 부단한 몸과 마음의 부림들. 이렇게 저렇게 해보아도 타자의 슬픔이 내 것이 될 수는 없지만 빼앗을 수 없는 나만의 슬픔이 자라기 시작한다면 기분의 공존co-existence는 가능하리라. 우리는 이를 슬픔의 연대, 애도의 공동체라고 부른다. 시인 이성복이 문학을 불가능에 대한 불가능한 사랑이라 명명했던 것처럼 불가능은 자신을 한 번 더 살아냄으로써 마이너스의 제곱이 플러스가 되듯 불가능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가까스로(심보선 시인이 이 표현을 애용한다고 한다).
금요일에 돌아오렴과 눈 먼자들의 국가를 비교해본다면 전자는 유가족들의 슬픔의 속살을 (만져)볼 수 있다면 후자는 타인의 슬픔을 대하는 자세, 특히 타인의 슬픔을 육화하는 여성적 애도에 대해 많은 참조점을 주었다. 전자가 고통의 실체를 느끼게 해줬다면 후자는 그 고통과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지, 그 고통을 어떻게 끌어안아 내 삶의 영역으로 녹여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사회정치학적, 철학적, 그러니까 학문적 접근이 이뤄져야 좀 더 깊은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볼 수 있겠으나 시민사회 차원에서 세월호 사건을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로 삼는 자세가 없다면 '사회개조', 변화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애도와 치유가 의사와 환자-개인의 영역이 아닌 공동체의 영역이란 것, 그런데 여기에 대고 경제적 침체를 운운하는 입이 직접적으로 먹고사는 데 문제가 생긴 소시민들이 아닌 국가였다는 것, 누구보다 나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는 것, 이 정부와 광화문에서 폭식투쟁한 이들은 그리 멀어보이지 않는다. 왜 눈 먼자들의 국가인지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잘 알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도 우리의 눈은 다시 침침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