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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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플라톤


 그리스에서 철학은 서로의 생각을 경쟁하는 대화의 행위였고진리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행위였다들뢰즈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조금 비틀어 진리와 친구가 되는 행위라고 표현했다1여기서 말하는 친구의 의미는 무엇인가그것은 상대방이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될 수 있도록,상대방의 아레테arete를 구현할 수 있도록 경쟁하는 선의의 라이벌일 것이다2그리스에서 친구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존재가 망각하고 있는 진리가 깨어날 수 있도록존재가 진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무지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친구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를 의식할 수 있도록 이성logos을 통해 어둠을 비춰주는무지의 앎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매개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대철학으로 무장한 문학비평의 세례를 받은 나에게 플라톤은 공공의 적의 이미지였다그는 주적이었다차이를 강조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은 동일성을 강조한 헤겔의 시원을 플라톤에서 찾아 공격했고이성 중심주의에 반기를 들고 몸의 존재론적 지위의 복권을 시도하는 철학자들은 정신과 몸의 이분법적 사고의 근원을 역시 플라톤에서 찾아 공격했다. ‘이게 다 플라톤 때문이다’ 니체의 세례를 받고스피노자의 복권을 주도한 현대철학자들은 플라톤을 마치 존재의 실존을 위해 극복/살해해야 하는 프로이트적 의미의 아버지로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이 친부살해는 니체의 신의 죽음에서 예고된 일이었다플라톤이 낳은 기독교의 신이 죽었으니 이제 죽어야할 건 신의 아버지플라톤이었다.


 내가 플라톤의 철학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는 매력 없는 철학자였다이데아론으로 표상되는 그의 철학은 나의 존재론적 물음에 답을 주지 못할 거라 생각되었고현대사회를 사유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낡은 철학일 거라 생각되었다그의 저서를 직접 읽어보기 전의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항연>, <국가>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역설적이게도 이것이었다. ‘플라톤은 진정한 철학자다’ 그는 끊임없이 내게 사유를 촉발시켰고 강제시켰다이데아론으로 표상되는 그의 보편철학이 지적 유희의 결과물이 아닌 치열한 존재론적 사유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그의 철학이 현재에도 생명력이 있는 사상임을 체감할 수 있었다.


 들뢰즈는 플라톤이 이데아란 개념을 창조했고그 개념은 전형적인 그리스적 상황에서 산출되었음을 설명한 바 있다3그리스 사회는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군주가 신하들에게 정치적 직무를 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 자신의 뛰어남을 증명해 권력을 쟁취해야 했다정치가가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빵집 주인부터 군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이 진정한 정치가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이 주장들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정치가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기준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진경은 보편성universality과 일반성generality을 구분하면서 보편성은 어떤 것들이 공통적으로 따르고 있는 법칙들인데 반해 일반성은 존재론적인 평면성이라 설명한 바 있다4플라톤이 보편성을 주장하기 위해 찾은 대상은 인간의 이성이었다데카르트가 원숭이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는 일화를 보면 생각하는 능력 = (신이 주신인간의 특별한 능력이란 사고방식이 오랫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는 입 먹는 입’, 정치적 인간과 동물적 인간좋은 삶과 삶의 전통적 구분에서 볼 수 있듯 사고하는 능력이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인간을 동물과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근본적 지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플라톤에게 있어 정치는 철인의 일이었고철인은 이성을 극대화시킨 인물이라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정치가가 될 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선별해 교육시켜야 한다는 그의 교육철학5을 보면 플라톤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구체적으로 말하면 quantity’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플라톤이 말하는 이성이 현대철학에서 비판하는 기계적 이성은 아니지만 이성은 본질적으로 존재 전체를 직관적으로 인식하기 힘들기 때문에 존재를 부분적으로 나눠야 하고,이 분석의 과정에서 존재의 질적 차원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부분으로 나눠야만 가장 이성ratio적인 언어인 수학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고,그래야만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보편언어로 사태를 설명하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플라톤이라면 취미활동도 하면서 공부를 하는 북유럽 식 교육이 아니라 공부만 주야장천으로 시키는 한국식 교육에 열광하지 않았을까 예상해본다. 4시간 공부하는 아이가 10시간 공부하는 아이보다 학업성취도가 더 높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설명해 납득시킬 수 있을까뇌과학이나 신경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사회에서 이성만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판별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을 때 양화된 시간개념은 매우 그럴 듯한’ 설명을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이진경은 수학언어의 이중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다6사람A와 사람B 1 1이라고 표현했을 때이는 둘의 계급적 차이 내지는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공통의 지평에 올려놓는 급진적radical 평등성을 담지하고 있지만동시에 둘의 질적 차이를 무시하고 동일한 차원으로 환원해버리는 폭력성을 동시에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플라톤의 위대함과 한계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선택과 집중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 사건을 그들의 중요한 핵심개념으로 삼은 것도 동일성의 차원에서 양화된 시간의 질서에 분열을 일으키고 반전시킬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형적 시간관에서 뒤처진’ 자의 역전은 불가능하니까플라톤은 국가란 정치체의 머리를 토막 냈고정치엘리트들을 선별해서 집중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아레테를 최대한의 양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사고방식이 엿보인다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그럴 듯한’ 설명에 수긍한다나는 개인적으로 수긍방식의 두 가지 양상을 발견했다.


 하나는 유전자 같은 선천적 요소를 끌어들여 이미 극복할 수 없는건널 수 없는 다리를 봉합하는 방식이다. ‘이게 다 유전자 때문이다’ 이 설명을 통해 내가 노력하지 않은 과거는 내가 노력해도 소용없었을 과거로 둔갑하게 되고개인의 변화는 이뤄지지 않는다내가 아무리 의지를 갖고 내 현재와 미래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해도 과거에서 발생한 차이는 결코 바꿀 수 없는 영속적인 것이기 때문에 책임을 자신에게 둬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야 하는 고생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유전자에게 둬 자신은 그 과잉노동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자신의 노력부족 같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다간단히 말하면 유전자라는 불가항력의 힘을 빌려 내 책임을 남(유전자)에게 돌려 내적으로 편해지는 것이다다른 분야보다 지성의 영역에서 이런 사고방식은 더 팽배해있는 것 같다권투선수를 하다 건축을 독학으로 공부해 세계적인 건축가가 된 안도 다다오나 남들보다 뒤늦게 운동을 시작해 세계적인 선수로 성공한 많은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부 앞에서만큼은 어렸을 때부터 날아다녔던 천재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그들은 나와 다른 존재야선을 긋는다자기보존을 위한 자발적 구별짓기앎은 빛으로 존재하지만 무지는 어둠으로 존재하기 때문에아니 그렇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지성에 있어서 이분법적 사고방식 때문에 무지는 절대적 타자성의 옷을 입고 존재를 지적 피로호기심의 규제로 이끈다난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한줄 세우기 식 평가방식이 학생들에게 무한한 지적 피로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악의 축이라고 생각한다지적 호기심은 절단되어 버리고한 번 낙오된 아이들은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고통을 받는다한줄 세우기 식 평가방식뿐만 아니라 교육적 다양성의 부재 또한 커다란 문제라고 생각한다국영수사과대한민국 사회에 잘 먹고 잘 살아보세말고 담론이 없는 것처럼 교육 또한 철학 없이 맹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고 소모한다.


 내가 발견한 다른 양상은 이런 피로에 잠식당해 창조와 놀이로서의 공부가 아니라 노동으로서의 공부를 하는 경우이다그는 공부를 할수록 피곤해지지만 공부를 통해 달성해야할 목표가 있기 때문에 공부를 수행한다그는 공부를 많이 했지만 공부 자체에서 목적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노동과 같이 피로를 동반하는 수단적 공부를 하며 자기소외를 경험한다그의 지적 노동이 그의 것으로 귀속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소외그에게 공부는 무의미하지도그렇다고 의미 있지도 않은 분열적 양상을 띠게 된다실존적 맥락에서 재의미화되지 않은 의미는 폭력적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그것은 법처럼 강제적으로수동적으로타율적으로 주체에게 방향을 제시해 이미 구성되어 있는 틀에 끼워 맞추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거기에는 아도르노의 역사철학이 지적하는 것처럼 폭력의 계기가 잠재되어 있다.


 작년까지 나의 공부는 후자의 양상에 가까웠다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내가 의식했던 대상은 중학교 때부터 책을 읽은 아이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읽은 아이였다내가 컴퓨터게임을 하면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탕진하는 동안 그들은 책 속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아 멀찌감치 앞서나가고 있을 것이었다좋은 부모 아래에서 커서 좋은 선생님 밑에서 공부했을 거라 추정되는 상상의 라이벌들그들과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해야 한다sollen’로 이뤄지는 노동 성격의 독서는 분명한 한계점을 갖고 있었고 독서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목적적과정지향적 행위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아니 사실 그렇게 되었다고 확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경제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작금의 상태에서의 변화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2년 전 경제활동을 하면서 공부를 한 적이 있다겨울 공사장에서 2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초반엔 일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 열심히 독서를 했지만 이내 TV를 보거나 영화를 보는 것으로 편안하게 시간을 때웠다7졸업 이후의 진로를 가끔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철학자의 가난을 주제로 한 고병권의 강의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8. 한 문장으로 강의를 요약하라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최소한의 생활을 통한 철학의 극대화그들9은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했고 꼭 필요한 것만으로 생활을 최소한으로 구성했고철학을 했다그들은 연인에게 충실한 좋은 애인이었다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빌리자면 나는 아주 가끔 장막 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마주함을 느끼는데 그 빛이 내 몸에 작용하면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충만함에 도취되곤 한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아니 이것만큼 꽉 찬 충만감을 주는 것은 없다내가 비어있지 않으면 텍스트에서 그 빛을 뽑아낼 수 없으며 느낄 수 없다암실에서 사진이 선명하게 현상되듯 빛을 빨아들이기 위해서 최대한 어둠에 가까워져야 한다여기서 어둠은 무지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어둠은 미학에서 말하는 미적 무관심성의 상태와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난 여전히 플라톤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것 같다일상의 비율ratio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는데이는 가장 효율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비율을 찾기 위함이다무작정 공부를 많이 하는 것보다 철학공부외국어공부글쓰기영화보기음악듣기 등의 비율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실험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일단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을 제1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합리성과 효율성은 유령처럼 모든 것을 배회하고 있다.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맥락에서 욕망은 굉장히 문제적인 성격을 띤다스피노자와 니체의 관점대로 욕망을 자연학적 관점에서 보면 욕망의 과잉상태극대화시키는 전략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데 좋은 방향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문제는 욕망은 생각대로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순수한 이성적 사유를 위협하는 몸-욕망의 위협으로부터 이성을 지켜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에서 예견되었듯 플라톤은 정신과 육체이성과 감성의 이분법적 사고체계를 세우고몸을 존재론적 지위를 격하시킨다나는 육체 내지 육체적 욕망을 배제해선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지만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값싸고 저열한 욕망을 자극하는 사회에서 내 욕망을 어떻게 지키고 보호하고 관리할 것인가 고민했고될 수 있는 한 접촉을 피하되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경우 관조하자는 계획을 세웠다사실 순수한 관조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그 이유는 내 안에 욕망이 이미지에 반응하기 때문이다이럴 때 이성은 이미지를 사물화시켜 욕망의 흐름을 방해한다이미지에 리비도가 투여되지 않도록리비도가 어차피 회수되지 않을 테니 리비도를 투여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판단을 내려 욕망의 흐름을 조절한다여기서 발생하는 질문은 이것이다이것은 욕망의 부정인가욕망의 부정이 아니라고 해도 이것은 욕망을 극대화하는 전략인가아니라면 욕망을 공부에 집중적으로 투여하면서 확대재생산될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공부에서 아주 가끔 고밀도의 농축된 쾌락이 생산되지만 일상에서 욕망의 과잉상태를 만들기 위해 자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하지만 여기서 이 모든 논의가 욕망-리비도를 하나의 화폐로 인식하고화폐를 최대로 늘려 투자처에 최대한 많이 투자하려는 사고방식이 기저에 흐르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최대한의 추구는 최선의 결과를 낳는가우리는 앞선 논의에서 그것이 항상 성립하지 않음을 증명했다.그런데 왜 최대한은 여전히 매혹/욕망의 대상이 되는가그것은 최대한의 논리가 합리적이기 때문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10.


 이렇게 해서 플라톤과 나는 친구가 되었다플라톤 철학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서로의 아레테를 발전시켜주는 그리스적 의미의 우애philia11재밌는 점은 이 무대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그래서 글 제목도 내 친구 소크라테스가 아닌 내 친구 플라톤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사유를 끝까지 밀어부처 앎과 무지가능과 불가능의 경계까지 간다는 점에서 무지의 앎으로 대변되는 그의 철학적 방법론은 높이 살만하지만 플라톤의 저작들에서 등장하는 그의 변증술은 사고를 특정 방향으로 흐르게끔 유도하는 벽처럼 느껴진다이는 다수의 진리를 인정하고 않고영원불변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라는 대문자 진리를 신봉한 결과로 보인다12. 그는 진리를 찾기 위해 복잡다기한 4차원적 현실을 2차원적 평면으로 만들고그 속에서 제한적 진실을 담고 있지만 논리적으로 결함이 없어 보이는 진리의 모조품을 발명하는 데 성공했다대화는 그것을 표현하기 아주 적절한 형식이었다서로 다른 지평에 있을 때 대화는 이뤄질 수 없다예를 들어 통일에 대해 대화를 한다고 했을 때한 사람이 경제적 측면에서 바라본 생각을 말하고다른 사람은 문화적 측면에서 바라본 생각을 말한다면 대화는 진행될 수 없는 것이다대화가 같은 지평에서 이뤄지려면 현실의 단면을 떼어서 대화의 테이블 위에 고정시켜야 한다그 단면이 계속 변화하고 생성한다면 데이터를 통한 객관적 논증 자체가 불가능해진다소크라테스-플라톤은 진리는 영원불변한다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있었고그들의 논증의 타당성은 오직 그 지평 위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 기하학을 최고의 언어라 생각했던 만큼 그들의 진리는 납작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13.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진리에 천착한 이유는 무엇일까인간은 약 십 만 년 전부터 죽음을 의식했다고 한다14네안데르탈인의 유적에서 무덤이 발견된 것을 바탕으로 한 추론이다소크라테스는 아래 그림에서 보듯 죽음 앞에서 초탈한 모습을 보이며 인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천상의 세계로 돌아갈 것을 기뻐했지만 나는 진은영이 지적한대로 소크라테스가 수동적 니힐리즘으로 죽음의 무의미-허무를 극복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는 데 동의한다15죽음에 대한 그의 초월적 태도는 삶에 대한 부정정신과 대조되는 육체에 대한 경멸을 통해 획득되는 반동적reactive 성격의 초월 없는 초월이었기 때문이다그는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라진다는16태어났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존재의 모순역설과 대결하지 않고 회피한 것처럼 보인다그가 죽음이란 절대적 무의미를 피하기 위한 도피처로 삼은 것이 진리의 세계,혼의 세계정신의 세계였다이런 맥락에서 그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죽기 전에 남긴 철학은 죽음을 위한 연습이라는 말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철학이 삶을 더 잘 살기 위해 하는 활동이 아니라 죽음을 연습하기 위해죽음의 허무에 존재가 잠식당하지 않도록 의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활동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어로 의미를 뜻하는 Sens란 단어에 방향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굉장히 흥미롭다그림 속 소크라테스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그는 몸속에 내장되어 있는 무의미의 심연에 떨어지지 않도록 천상의 진리의 세계에 자신의 영혼의 자리를 예약해두었다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순간 진리의 품 안에 안길 생각에 그는 죽음 앞에서 기쁨을 만끽한다그의 영혼에 진리에 대한 사랑이 싹튼 순간 그의 육체엔 죽음이 선포되었고무덤이 들어섰다진리에 대한 사랑은 육체의 관점에서 보면 광기 어린 내적 분열폭력이었을 것이다



 인간을 고깃덩어리로 인식하고, ‘에 천착한 아일랜드의 화가 베이컨의 그림이 보여주는 진실은 고깃덩어리의 필연적 죽음을 받아들이지못하고 진리와 천상의 저 세계에서 영생을 추구하는 철학자의 사랑이 실은 광기이며스스로를 이 세계와 저 세계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분열적 존재삶도 죽음도 아닌 중간자적 존재로 만드는 파괴적 자기소외의 행위임을 드러낸다산 죽음living dead. 신과 절대자는 허무가 만들어낸 그림자가 아니었을까의미의 세계에 사로잡힌 정신주의적주지주의적 서양전통이 죽음이란 무의미에서 신이란 절대적 의미를 추출해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그리스고전문헌을 공부한 니체와 하이데거가 모두 허무주의의 문제를 연구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또 흔히 동양적 허무주의라 얘기되는 노장사상과 서양적 허무주의의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지 연구해볼 만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대한 논의로 옮겨가보자플라톤의 국가 10권에는 악명 높은 시인추방론이 등장한다이 글은 현재까지도 문제가 되곤 하는 예술작품의 검열문제와 연관되는 문자 그대로 고전적인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플라톤의 주장을 간단하고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예술작품이 나쁜 걸 보여주면 얘들이 그걸 보고 따라한다는 것이다예술작품이 본받을 만한 교훈적인 내용을 담아야지 아직 의식이 성숙하지 않은 청소년들을 타락시킬 수 있는 불온한’ 내용을 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역시 플라톤의 말은 그럴 듯하다 그럴 듯함에 편승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연쇄살인범과 범죄영화의 영향관계에 대해 논하고성범죄자와 포르노의 영향관계에 대해 논한다견물생심見物生心애초에 이성을 방해하는 감성의 말을 자극시키지 말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이를 통해 이성중심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이성을 통해 감성과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의 요지는 무엇인가인간이 감성과 충동에 자신을 내맡겨버리면 사회가 무질서의 혼란에 빠지기 때문에 이성규칙법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런데 감성과 충동을 자유롭게 허용했을 때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방종과 타락의 세계에 빠져든 적이 실제로 있었던가?적어도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그래서 플라톤의 이 주장은 푸코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해 홉스에게 있어서 최초의 전쟁은 없었다.”는 비판처럼 플라톤에게 있어서 최초의 방종과 타락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플라톤이 말하는 감성과 충동은 감성과 충동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성에 의해 상대화된 감성과 충동으로 보이고때문에 이성의 안티테제로서의 성격을 갖는다이성중심의 관점에서 이성의 장점은 감성의 단점과 대응하게 되고이성은 인간의 영역감성과 충동은 짐승의 영역으로 구분된다17.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 정의했을 때 여기에는 정치는 이성의 영역이라는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정치가가 감정과 충동에 휘둘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 정치공동체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정치가에겐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정서적 감응능력과 공감능력 대신에 냉철한 판단능력과 흔들리지 않는 지조가 요구된다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다세월호 사건도 결국 현 대통령이 그런 구시대적인 정치가18특히 자신의 아버지의 이미지인 카리스마적 정치가의 상을 학습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했다국민들은 여성대통령에게 여성적 공감능력을 기대했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는 안티고네처럼 남성화된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병권은 자신의 니체 연구서에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니체의 정치철학을 재구성해 차이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19하지만 빌헬름 딜타이와 들뢰즈-과타리가 보여주었듯 우리 안에 언제 심어졌는지 모르는 파시즘의 씨앗이 잠들어 있다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정치그러면서도 개인주의로 빠지지 않는 차이들이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는 가능할까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정치철학을 전복할 수 있는 진보적 정치를 한국사회에서 실현할 수 있을까?


 지금 시점의 나에게 이 새로운 가능성의 모색에 많은 시사점을 주는 이는 자크 랑시에르다그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란 저서에서 치안과 정치를 구분하고치안을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찰권력이라 설명하는 반면 정치는 몫 없는 자들에게 몫을 분배하는 행위라고 선언한다국가 1권에서 글라우콘은 법을 정의의 기원이자 본질이라 주장하며정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불의를 행할 힘이 없어서 마지못해 정의를 행하는 것이라 주장하고(359b), 개인에게는 불의가 정의보다 훨씬 더 이익이 된다고 누구나 다 그렇게 믿고 있다고 말하고(360d),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362a). 한마디로 정의는 불의보다 힘이 약한데 그 이유는 불의를 행했을 때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이다정의와 힘의 역학관계에 대한 탐색은 정치철학과 법철학의 근본을 이룬다힘을 고려하지 않고 정의만 내세우면 현실적 설득력이 없고정의를 고려하지 않고 힘만 내세우면 동물적 야만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역사는 정의보다 힘의 힘이 강함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물론 금방 망하긴 했지만 진나라는 법가를 통해 전국시대의 통일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서양의 역사에서도 가치나 윤리를 내세우는 정치보다 마키아벨리식 힘의 정치가 우세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정치는 가치가 아닌 힘의 영역이다정치는 최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같은 명제들이 도출되었다고 본다하지만 사상의 힘은 힘보다 강할 때가 있다세계사에서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낸 혁명적 사건이었다고 손꼽히는 프랑스혁명이나 조선 민중의 진보적 역량을 보여준 동학농민운동에 자유주의계몽주의 사상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내천 사상의 사상적 기반이 없었다면 사회를 뒤엎을 만한 규모의 혁명적 운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급진적 사상이 시민들에게 동의를 얻고이를 바탕으로 사회의 전격적 변화를 요구하는 혁명적 운동이 일어나고이 운동이 사회에 수용됨에 따라 운동의 근간이 된 사상은 법제화되면서 현실적 효력을 획득한다사회를 실제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법을 바꾸고 새로 제정해야 하지만 새로운 법이 통과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시민사회의 동의를 얻기 위해선 사상의 확산을 통한 의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관건은 현실적 효력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상적 사상과 현실의 접점을 찾는 것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현행적 질서에 균열을 일으켜 다른 삶-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그 삶이 정치적 실천에 의해 이 삶-세계에 구현될 수 있음을 깨닫는 정치적 주체화의 지점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사람들을 평등한 관점에서 보았고제한된 몫을 더 많이 갖기 위한 투쟁이 불가피하게 때문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기 위해 국가라는 괴물을 계약했다고 설명한다오늘날 우리는 헌법상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지만 굉장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상위 1%에게 90%의 부가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일반화되면서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란 지배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고약자들의 연대가 아닌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 한 줌의 기득권을 얻으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현행적 질서를 강화하는 방식의 사회의 보수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내가 정치 공론장에 올리고 싶은 의제는 책 읽을 여유/자유이다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책 읽을 여유와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에게 권리를 돌려주는 것책 읽을 수 있는 몫이 없다고 생각되는 이들에게 몫을 분배하는 것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일상의사회의 비율을 완전히 재조정해 시간과 감각을 재분배하고 재배치하는 것나는 작년부터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아닌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68혁명 당시 독일에서 이런 구호가 있었다고 한다. ‘상상력에게 권력을!’ 그 전복적 전환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나는 플라톤의 제자가 아닌 친구로 계속 그와의 대화를 이어갈 것이다.

 

 

 

 


  1. 질 들뢰즈 A to Z
  2. 고병권은 그의 여러 저서(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언더그라운드 니체)에서 이런 점을 강조한다. 그리스의 도편추방제는 독재자, 독보적 일인이 나타나 서로의 경쟁을 종식시키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지혜로운 장치였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리스 사회에서 경쟁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수단적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훌륭함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적 활동이었던 것 같다. 그 훌륭함이 결과적으로 남들을 제치고 권력의 자리에 앉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경쟁 자체에서는 경쟁의 승리가 아니라 훌륭함의 추구가 목적이 되었을 것이다.
  3. 질 들뢰즈 A to Z
  4. http://www.nomadist.org/xe/index.php?document_srl=21437&mid=Nzine&sort_index=regdate&order_type=asc
  5.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국가를 수호하기에 알맞은 적성을 타고났는지 가려내는 일” 국가 제 2권, ‘한 사람은 한 가지 일만 잘할 수 있네’ 국가 제 3권, 천병희 역, 숲.
  6. 이진경, 수학의 몽상, 휴머니스트
  7. 니체가 (과도한) 노동을 비판한 이유를 몸으로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신노동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의 독서는 텍스트를 정보로 전환시키고 비판적 대화의 가능성을 현저히 감소시킨다. 비판적 대화는 기본적으로 능동적, 적극적 행위이므로 수동적 독서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소설가 김연수는 직장생활을 할 당시 퇴근 후 세 시간 동안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그의 직장이 고강도의 육체적 노동을 요구하는 곳이었다면 지금의 김연수가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8. https://www.youtube.com/watch?v=Wk3z6gYmEKg
  9. 이 강의에서 등장하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디오게네스, 예수이다.
  10. 합리성을 중시하는 미국과 영국에서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이 일반적으로 퍼져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른 글 <쾌락에 대한 단상>에서 쾌락은 좋음이고, 고통은 나쁨인가를 질문으로 설정한 것도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적 도전을 하기 위함이었다.
  11.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애의 층위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이익, 즐거움, 아레테. 문학평론가 함돈균은 <예외들>에서 정치적 우애에 집중해 논의를 펼친다.
  12. “최선의 상태에 있는 것들은 다른 것에 의해 바뀌거나 변동될 가능성이 가장 적지 않을까? 예컨대 가장 건강하고 강한 몸은 음식과 훈련에 의해 가장 덜 바뀌고, 가장 건강하고 강한 식물은 해와 바람 등에 의해 가장 덜 바뀌지 않을까?” “가장 용감하고 가장 지혜로운 혼도 외부의 영향에 동요하거나 바뀔 가능성이 가장 적지 않을까” 국가 2권, 천병희 역, 숲. 플라톤이 무대에 올린 소크라테스의 화법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자연물을 통한 유비적 설명을 즐겨한다는 점이다. 그는 자연물을 통한 유비적 설명을 통해 자신의 논증의 타당성을 입증하려 하지만 인용한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 타당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완벽한 것은 변화를 요구하지 않으며, 가변적인 것은 존재론적으로 열등하다는 그의 확신은 이런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신이 자신을 바꾸기를 원하는 것도 불가능하네. 신들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선하기에 저마다 늘 변함없이 본래 형상을 견지하는 것 같으니 말일세.” 니체가 지적하듯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철학이 죽음을 위한 지식으로 변질된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시간성을 사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정신적인 것은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비시간적 존재, 탈시간적 존재로 사유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시간은 창조와 생성으로서의 변화가 일어나는 장소가 아니라 완벽한 이데아가 존재하는 천상에 대비되는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지상의 양식이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변화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13. 이진경은 <수학의 몽상>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무너뜨리는 리만기하학이 나왔을 때 수학자들이 이를 은폐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믿고 서 있는 근거grund들은 사실 심연abgrund이며, 심연에 빠지지 않도록 아주 얇은 유리판을 붙잡고 그 위에서 버티고 있는 모습이 우리 인간의 실제 모습은 아닐까?
  14. 유기환, 조르주 바타이유(저주의 몫, 에로티즘), 살림.
  15. 진은영,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그린비.
  16.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두 번은 없다 中), 비스와바 쉼보르시카,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인용 부분의 다음 구절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우리가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서로 다를지라도’ 쉼보르시카는 사라짐을 허무로 인식하지 않는다. 쉼보르시카의 죽음의 운명은 현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아름다울 수 있게 만드는 장치이다. 우리가 영생한다면 우리의 현재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사소한 행동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죽음이 없다면 이기심도, 이기심에 반하는 이타적 행동의 아름다움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타적 행위가 아름다운 이유는 개체보존의 본능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남에게 도움을 줬다는 표면적 이유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한한 삶을 남을 위해 썼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유한한 자신의 삶을 타자에게 열었을 때 삶의 무한한 지평이 열리고, 레비나스(levinas)의 표현대로 타자는 무한한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17. 서양은 끊임없이 Homo ~~란 정의를 통해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시도했다. 이성이 중심이 되는 근대까지 자연과 동물은 문명과 인간의 적이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나온 포스트모더니즘에 가서야 생태주의적 사고가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동양은 처음부터 자연친화적 세계관을 강조했다. 이 차이에 대해서도 비교철학적 탐구주제로 괜찮아 보이는데 예전부터 제기된 관점이기 때문에 이미 일정 수준의 연구결과가 나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대비는 서양전통의 이분법적 세계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다.
  18. 수는 개혁한다는 개혁적인, 혁신적인 캐치프레이즈를 통해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승리 이후 대통령은 자신과 굉장히 친밀한 사람만을 요직에 앉히는 낡은 정치, 썩은 정치를 고수하고 있다.
  19. 고병권,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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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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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에는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섞여 있다.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유대계 지식인, 매체미학의 선구자, 사유의 유격전-사물이란 파편에서 시대를 읽어내는 정지 상태의 변증법으로 19세기 파리를 해부한 산책자, 느리고 무겁고 차가우며 먼 토성의 고리에 영향을 받은 멜랑꼴리의 영혼, 자기만의 여행을 발명해낸 여행가, 마르크스주의와 신학을 결합시킨 독창적 사상가, 번역가, 아웃사이더.
 

 벤야민이란 이름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잡아내려는 순간 불협화음에 가까운 이질적인 목소리가 끼어든다. 그것은 그의 아웃사이더 기질에서 연유하며 이렇게 교란된 질서에서 파편의 이미지를 포착해 세계를 읽어내는 것이 '비평가' 벤야민이다. 그는 파편을 읽고, 거기에서 세계를 해석해낸다. 전체가 진리라는 헤겔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부분이 진리라는 테제를 주장한 '부정사유negative denken'의 아도르노와는 다른 방식으로 벤야민은 부분을 다뤘다고 생각한다. 그는 부분들을 잇는 '성좌constellation'을 그려 모자이크로 된 세계를 구성했다. 

 그 유명한 진보에 대한 테제, 파울 클레의 천사에서 진보라는 거부할 수 없는 폭풍은 전체 세계를 해체하고 부분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포착된 존재론적 점(punctum)일 것이다. '문자의 사슬을 끊고 나오는 해방된 산문' 번역은 더 높은 언어로의 진화라는 그의 번역관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진보이론은 상승운동이란 신학적 사유의 자장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이데아-현실에 대한 열등한 모사라는 플라톤의 예술관에 맞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방식으로 예술의 의미를 정립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유물론적 미학의 관점에서 예술을 통한 인간해방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타진하고 있다.
 

 그것은 에술의 정치성과 정치의 심미화라는 키워드로 커칠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의 정치성은 복제기술이란 하부구조가 제의가치에서 전시가치로 예술의 상부구조를 변화시킴에 따라 탈마법화, 탈주술화된 예술이 정치의 영역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후에 랑시에르의 미적인 것의 정치성 개념을 이해하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된다.  또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는 감성론의 급진적 변혁을 갖고 옴에 따라 새로운 감각-지각의 지평이 열리고, 제2의 기술의 발명에 따른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와 유희공간spielraum의 발생이 대중으로 하여금 유토피아적 목표를 겨냥하게 만든다고 벤야민은 서술한다. 하지만 영화가 자본에서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정치에 이용될 때 파시즘의 유령이 스크린을 맴돈다. 
'

 인류의 자기소외selbstentfremdung는 인류 스스로의 파괴를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공산주의와 파시즘.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시인과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운동. 예술/기술과 정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읽는 데 벤야민의 이 텍스트는 문제적이지 아닐 수 없다. 비록 그가 제2의 기술이 창출한 유희-공간에서 대중의 진보성을 안일하게 믿은 감이 비판받을 지점으로 지적되지만 예술수용에 있어 매체의 중요성의 발견, 이는 예술의 의미(수용)를 개인의 정신적, 정서적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적 물적 차원에서 대중이란 새로운 예술수용 주체의 출현과 대중과 예술 사이 상호주관적 관계를 통해 읽어내려 했다는 점에서, 혁명을 조직하는 신경감응을 대중에게 훈련시키는 매체로써 영화/예술을 사유했다는 점에서 벤야민은 도래할 예술의 이미지를 포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죽은 자와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와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우리는 이미/아직에서 이미 도착해 있는 진실/진리를 은폐하고 있는 현행적 질서의 실증주의적 시간관을 폭파시키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메시아적 시간을 '지금-여기(Jetzt-zeit)'에 임재(par-ousia)시켜야 한다. 때 아닌 것unzeit, 벤야민의 텍스트는 시간 아닌 것을 사는 시간으로 전환시키는, 쓰여지지 않은 것을 지금 여기에 쓰는 식으로 읽어야/읽혀야 할 것이다. 그가 남긴 평생의 대작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가 미완성 메모뭉치로 남아 우리가 언제든지 얼마든지 새로운 성좌를 그릴 수 있는 무한한 비문(非文)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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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과의 조우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 스콧 롤랜드 외 출연, 베르너 헤어조크 목소리 / 야누스필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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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는 존재하는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의 정상 봉우리에 여전히 신은 살고 있을까? 우리는 해발 수심 만 미터 지점에 어떤 생물들이 사는지 알고 있으며, 히말라야는 신이 사는 곳이 아니라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지구의 운동으로 인해 생긴 '높은 곳'임을 알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지구의 신비는 거의 다 해명되었고, 인류가 아직 미개척지인 우주로 눈길을 옮긴 지도 오래 전 일이다. 신비가 사라진 자리를 권태가 채운다. 낯섦이 사라지면서 설레임도 사라지고 익숙함만 남게 되는 것처럼. 자연은 더 이상 경외해야 할 대상도, 신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신적인 시공간도 아니며, 인류에게 위협을 가하는(물론 자연'재해'라는 예외가 존재하지만) 맹수 같은 적도 아니다. 근대는 자연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자본으로 환원돼야 할 대상이 되었고, 인류가 물질적 번영을 누리는 동안 자연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자연파괴의 피해는 고스란히 인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왔고, 지속가능한 발전/그린에너지란 새로운 구호들이 생겨났다. 

남극. 그것은 어떤 공백으로 존재했다. 남극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실상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곳. 아마 살면서 한 번이라도 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되기 때문에 자연히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곳은 멀고, 춥다.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즉각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할까? 배를 타고 가야 할까? 여권은 챙겨야 겠지? 남극은 대륙인데, 이 대륙엔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 미국, 러시아, 중국 등등 강대국들이 영토분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이곳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누이트 족. 이글루에 사는 사람들. 이글루 안은 따뜻할까? 어렸을 때 보았던 무성 펭귄만화처럼 이글루는 반듯할까? 세종기지에선 무엇을 할까? 검색결과 부존자원과 자연환경을 조사, 연구, 개발한다고 한다. 

예전에 세종기지 대장님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이야기. 하나는 남극세종기지에 가게 되면 기존의 연봉보다 4배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한국의 연구원이 뉴욕인가 미국 어디쯤을 통과하는 배 안에서 서양의 미녀를 꼬셔 결혼까지 성공했다는 이야기. 사실 이것말고도 임무수행 도중 눈보라가 몰아쳐서 결국 기지로 귀환하지 못한 대원의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앞의 두 가지가 내겐 가장 강렬했다. 추위에 강하다면 남극에서 취업을! 친구의 말처럼 서양에서는 배우자를 만나는 데 있어서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가치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의견에 동감.      

남극에는 신비가 존재했다. 이성을 초월해 있는 비합리적인 신비라기보다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지구의 속살 같은 느낌이랄까. 남극의 생태계,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신기하게 생긴 생물들과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고래의 노래. 한 번 길을 정하면 바꾸지 않는 펭귄. 그리고 재밌는 사람들. 원주민의 피를 물려받은 엔지니어. 철학자. 화산학자. 과학자들. 무엇이 그들을 세상의 끝으로 끌어들인 걸까? 그곳에서 그들은 무슨 꿈을 꾸며 살아갈까? 매일매일 새로운 꿈을 꾼다는 말에 조금 설레였던 가슴. 상상력의 규제적 사용을 넘어 초월적 사용을 위해! 우리의 정신과 감각을 새롭게 갱신시키는 새로운 예술을 찾아. 

이런 '아름다운 지구' 느낌의 다큐멘터리는 아름다운 지구의 자연을 보는 맛은 있지만 조금 지루하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이 다큐는 거의 지루하지 않았다. 남극이란 낯선 공간적 배경도 한몫 했겠지만 여기서 살아가는 생명들의 이야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극을 단순히 감상을 위한 관조의 대상이 아닌 느낌의 시공간으로 변모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눈을 감고 무작정 걸어보았다. 세상 끝에 이를 때까지. 여권, 숙박, 돈, 모든 것을 잠시 잊고 무작정 걷고 또 걸어 세상의 끝까지, 고래의 노래가 있는 곳까지 날아서 헤엄쳐서 걸어서 기어서 갔다. 바다코끼리, 펭귄, 고래, 이름을 모르는 각양각색의 해양생명체들, 자기만의 빛을 발하고 있는 살아 있는 별들. 나도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고 싶다. 흐름에 몸을 맡기면 가능할 것이다. 어떤 알 수 없는 기분, 기운에 눈을 감고 몸을 맡기는 연습을 할 것. 그렇게 눈을 감고 유영을 즐기다 정신을 차렸을 때 색다른 공기를 듬뿍 마실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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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우산과 모자는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는 모티프인데 특히 사다리에 걸려 있는 빨간우산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꿈에서나 나올 법한 이미지(사실 이런 꿈을 꿔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영화 같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 같기도...)인데 

현실을 환기시켜 꿈(가상)/현실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식의 뻔한 느낌은 아니었고 

앞서 말했듯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신선한 순간을 체험할 수 있었다. 

텅 비어 있는 탁자/의자. 일상에서 그것은 채워져야 할, 그러니까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핍되어 있는, 특정한 도구적 목적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그림에서 그것은 사물 자체로 존재한다. 예술은 사물을 구원한다고 했던가. 


비 내리지 않는 날의 접힌 우산. 쓸모 없는, 쓸모 없이 아름다운, 낭비. 과하거나 부족한 것이 있어야 한다 - 평균과 일반에서는 시적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 평균과 일반의 평균적이지 않음/일반적이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맥락화(탈맥락화/재맥락화)를 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손수건, 들판. 우리는 손수건을 보면서 손수건 너머에 들판을 동시에 본다. 지각의 경험적 재구성. 

손수건의 '있음'은 은폐로 해석당한다. 일차적으로 손수건에 의해 절단된 시각은 손수건이란 차이가 삽입된 들판을 다시 관찰할 것이다. 

배경이 아니라 사물로 무대에 오른 들판. 들판과 손수건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2차원적 시지각, 시각의 형식에 대한 자각과 질문이 쏟아진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세상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잠자리의 겹눈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본 적 있다. 너무나 많은 시각정보가 들어와 뇌가 터지지 않을까? 지금 뇌의 용량으로는 잠자리의 겹눈이 만들어내는 수 백, 수 천의 타자들을 감당해내지 못할 듯 싶다. 혹은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불가능한 새로운 의식세계가 열리게 될 텐데... 적어도 백허그의 설레임은 약화되겠지. 


bewusstsein/의식은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대상. 한 대상에 시선을 집중하면 주변 사물들은 배경이 되어버린다. 집중과 배제/소외의 변증법. 겹의 얼굴. 미간에 시선을 집중하면 주변 얼굴은 탈각하고, 입술에 시선을 집중하면 주변 얼굴은 탈각하고... 우리는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본다고 했던가. 선명하지 않음-시지각의 한계는 어떤 진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방어기제이면서 동시에 진실로부터 우리를 가로막는 한계/장애일 것이다. 선명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그대로 본다. 어떤 점을. 우리가 그 점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점이 우리를 포착하고 포획하는 것이다. 존재를 붙잡고 놔두지 않고 뒤흔드는 존재론적 점punctum. 그것은 찌른다. 그것에 찔려 방혈하거나 어딘가 걸려 끌려다닐 것이다. 이미지에 사로잡힌 영혼. 순간적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찌르는 점도 좋아하지만 알게 모르게 침투해 사라지지 않고 결국 한 몸이 되어버리는 점, 나는 그런 점들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가장 좋았던 하이라이트는 다름 아닌 인터뷰였다. 하루종일 작품생각만 했다는 황규백 작가. 부지러힌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젊은 작가들에게 조언하는 황규백 작가. 이 두 가르침으로 나는 또 한 명의 스승을 갖게 되었다. 듣는 순간 가슴에 새겨지는 말들. 이 심장의 문장들을 이성복 선생님의 <꽃에 이르는 길>처럼 나만의 책으로 꼭 만들고 싶다. 내 심장에 사는 선생님들이 잘 계실 수 있도록 집을 지어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하루종일. 눈 뜨자마자 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꿈에서 꿈으로. 일상을 꿈으로 만드는 마술은, 자신의 이상을 현실과 합치시키는 힘은 '하루종일'이라는 충실성에서 기인한다는 쉬워보이는 깨달음을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이메일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블로그 알림창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네이버 메인화면에 뜨는 실시간 검색들을 보면서 멜랑꼴리에 가까운 이상한 감정을 느낀 이유는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의 추구를 방해하고 혼선을 빚게 만들고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정보들의 난립, 외로움의 잘못된 사용.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외로움을 건강한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내면으로 침잠해 집중하는 게 필요한데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저기 주변만 둘러보다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리고 마는 정지 상태의 표류adrift. 


하루하루 행복하다는, 즐겁다는 황규백 작가. 

선생님, 하루하루 행복하고 즐겁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즐거움 : 창조-능동적인 태도/ 행복 : 존재의 방식 - 반복되는 양식. 충실성fidelity 하루하루 하루종일

이 하루하루 하루종일에서 단순히 시간의 양적 축적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어떤 순간에 시간의 질적 도약이 이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생까고 전부인 하나에 내 전부를 거는 것. 그래서 사랑하는 자에겐 전부가 아니면 무인 게 아닐까.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면. 


어떤 맹목성이 필요하다. 그 맹목적 빠짐/ 몰입/ 지향 속에서 그것이 정직하고 진실된 활동이 될 수 있도록 매 순간 자신을 의식하고 추동하는 일. 이것이 영원회귀의 자기극복의 나이브한 버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삶이란 예술을 위하여. 예술이란 사랑을 위하여. 사랑이란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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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8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rendevous 2015-05-18 01:02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에 덧글인데 내용 또한 정말 감동적이어서 감사합니다 ^^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나는 사람들이 일주일 1권씩 책을 읽으면 세상은 바뀔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만 권의 책을 읽은 박사 한 명보다 백 권의 책을 읽은 일반시민들이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 사람의 천재가 써낸 기념비적 역작이 문명 자체의 전환을 몰고 오기도 하지만 나이브하게 생각했을 때 일반 시민들이 책을 읽는다면 적어도 이상한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앉혀놓는 우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플라톤을 읽고 국가의 역할과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한다면, 장자를 읽고 사람들 간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의식의 실체는 무엇인지, 진정한 의미의 평등은 무엇인지(백혼무인이 나오는 편), 뼈에 흠집을 내지 않는 칼질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한다면 지금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라 확신한다.

 

 답이 이렇게 간단하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말한다. 책은 재미없다. 책은 어렵다. 책 읽으면 누가 밥 먹여주냐? 책 읽어서 어디다 써먹냐?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아직도 책 타령이냐? 지금은 영상의 시대다. 요즘은 좋은 책이 안 나온다 등등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영상의 시대가 오면서 책읽기를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더 늘어난 추세다. 감각을 자극하는 영상물에 익숙한 학생들은 책에서 쉽게 지루함과 싫증을 느낀다. 책에서 보상은 느리게 온다(곧바로 오지 않는다). 보상을 보상으로 생각하는 깨달음도 느리게 온다. 정규교육 과정에서 해야 하는 공부뿐만 아니라 사교육에서까지 이어지는 물량공세에 지친 학생들에게 책은 놀이가 될 수 없다. 책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공부할 것도 많은데 공부에 상관없어 보이는 것을 쉬고 노는 시간에 머리 아파해가면서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책은 참된 앎을 알려주는 지식과 지혜의 보고가 아니라 이상한 아이들의 괴상한 취미, 책덕후들의 전유물일 지도 모르겠다(적어도 일부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책읽기 어려운 사회라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사회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얘기하면 발끈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한다, 네가 말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공자왈, 맹자왈만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반문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동의한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한다. 중요한 건 생각의 내용이고 형식이다. 점심에 뭐 먹을지 생각하는 건 생각인 건 맞지만 동물적 본능에 의한 자연적 행위이므로 생각이라 부르기에 민망한 부분이 없지 않다. 매우 저차원적인 생각이란 뜻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앎, 플라톤의 이데아를 생각한다고 해서 고차원적 생각을 한다고 장담할 순 없다. 무지의 앎과 이데아가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실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으면 그 개념을 모르는 상태와 차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름만 알고 있는 상태를 개념을 이해했다는 것과 혼동한다면 개념의 이름조차 모르는 상황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름만 아는 사람은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수동적으로 개념을 암기하는 데 그친다면 사유라고 보기 힘들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생각을 창조해냈을 때, 자기의 생각을 주체적으로 생산해냈을 때 진정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Dasein이든 Ubermensch이든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야만 사유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존의 앎과 다른 차이를 생산했을 때 사유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사유는 생각보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하는 사람은 사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만의 '생활하는 자는 창조할 수 없다'는 명제와 공명하는 이 명제는 사유의 본질 중 하나가 배타성이란 걸 암시한다. 생각하는 자만이 생각한다, 사유는 고독한 작업이라는 하이데거의 말(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영화 '한나 아렌트'에서 본 장면이라 실제로 똑같은 말을 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하이데거의 사상을 토대로 비춰봤을 때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된다)도 일맥상통한다. 

 

 사유하는 사람들은 왜 사유하는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진정한 앎에 이르기 위해서일 것이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플라톤주의자도 있겠지만 사회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통념(bon sens)과 인식 자체의 상투성에 의해 가려진 상대적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사유하지 않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자기 인생의 주인-주체로서 삶을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진실하고 정직한 삶-한마디로 그리스 시대에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뜻하는 '좋은 삶eu zen'을 향한 욕망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상태, 삶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정신적이고 고차원적인 의미를 추구하고 싶은 욕망이 싹트지 '의미의 질병'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배부르지도 않고 등도 차갑지만 의미를 추구했던 사람이 인류 역사상 비일비재했고, 그들에 의해 역사가 진보했다고. 맞다. 석가와 소크라테스는 각각 왕족, 귀족 출신이긴 했지만 공자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일반인이었고, 예수는 천한 신분이었다. 그들은 배고픈 상황에서도 사유를 했을 것이다. 가난의 탈출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고, 의미 있는 삶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에 후세에 성인이라 불릴 만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태어나지 않은 석가, 소크라테스 역시 자발적으로 가난해졌기 때문에 당대에 잘 나가는 철학자 정도에 머물지 않고 현재 인류에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류의 정신적 스승으로 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얘기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고, 정리하자면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좋은 삶을 향한 욕망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 또 사유하지 않으면 좋은 삶을 향한 욕망이 배태되기 힘들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읽기 힘든 시대 - 사유하기 힘든 시대라는 규정에서 먹고 살기 힘든 시대라는 규정을 끌어낼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4대 성인이 살았던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엄청나게 풍요로워졌는데 먹고 살기 힘든 시대라니. 한국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이 들으면 뒤로 넘어갈 만한 이야기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의 공과를 높이 사는 이가 들으면 빨갱이의 선동질이라고 욕 먹을 만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심심찮게 생존권 자체를 위협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사를 통해 꽤 자주 접하고 있다. 용산 사태,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밀양 송전탑, 강정 해군기지, 세월호 등등 우리는 하루아침에 평범한 노동자에서 임금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파업하는 종북좌빨 노조가 되고, 불타는 망루, 고공크레인에서 공권력에 의해 처리되는 '범법자'가 되고, 진정한 애도가 '금지된' 세월호가 된다(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는 진단은 현대사회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라는 조르조 아감벤의 진단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아감벤이 지적했던 대로 예외상태가 일상이 된 모습이다.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사회에서 제시하는 삶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된다. 커트 라인cut-line. 시민과 비-시민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의미를 추구하는 좋은 삶(eu zen, bios)과 동물적 생존을 의미하는 삶(zen, zoe)의 경계가 끊임없이 이동하며 누군가를 삶에서 배제시키고 있는데 이런 사회에서 삶이 보장되지 않은 일반인이 취직에 도움이 안 되는 철학공부를 한다는 건 하나의 모험이다. 부모가 어느 정도 학비를 지원해줄 수 있는 경우라면 정말 철학에만 용맹정진해 교수가 되든 연구원이 되든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알바해 가면서 학비를 벌어야 하는 경우에 대학졸업 후에 대학원 진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데까지 드는 시간, 돈을 감안하면 철학공부는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제도권 철학만은 철학행위에 한정한다고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학생의 경우 대학교에서 좋은 학점을 받고,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사유할 여유가 있을까 의심된다. 학교수업에서는 교수에게 비판적인의견을 제시했을 때 좋은 학점을 받기가 쉽지 않아(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1189.html) 수용적 사고-암기식 공부에 그칠 텐데 이런 환경에서 사유는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돈벌이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유,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학생 시절 전부를 좋은 점수, 좋은 대학, 좋은 학점에 볼모로 잡혀 노예로 살게 만드는 나라에서 100권의 책 읽는 시민이 나오기조차 힘든 것이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급해지기를 강요한다. 여유가 없다. 학교의 어원인 schole가 여유라는 점은 의미심장한데 여유가 없으면 사유하는 습관이 만들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생각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했는데 지금부터는 공부로 초점을 조금 옮길까 한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람들은 공부를 싫어할까? 올해 들어 공부를 싫어한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왜 그들은 공부를 싫어하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억지로 시켰기 때문에 공부=스트레스=억지로 해야하는 것의 등식이 생겼을 것이다. 그것은 공부를 단지 질문-놀이(하고 싶다)의 형식이 아닌 명령-필연의 형식으로만 접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왜 하니? 선생님이 시켜서요. 대학 가려고요. 대학은 왜 가니? 취직하려고요. 선생님-부모님이 가라고 해서요. 안 가면 차별받는다고 해서요. 안 가면 임금이 대졸자에 비해 낮아서요. 그냥요... 나는 이런 식의 억지공부가 니체가 비판한 기독교와 비슷한 맥락이라 이해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삶의 의미를 현실의 인생이 아닌 내세에서의 구원에서 찾았듯 억지공부에서 공부의 의미는 자기의 발전이나 변화가 아닌 사회제도의 편입 및 적응에 있다. 자신의 주체적 의지는 사라지고 노예 같이 복종하는 태도만 강화된다는 점에서도 일맥상통한다. 니체는 능동active과 반동reactive의 차이를 강조했고, 소박하게 말하면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복eudaimonia과 행복을 위해 수단이 되는 행동의 구분은 서양철학의 시원부터 지금까지 계속 양태를 바꾸며 이어져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가장 일상적인 용어로 치환하면 해야 한다sollen의 현실과 하고 싶다sein의 이상의 대립이 될 것이다. 결국 한마디로 자유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나는 자유로운 인간인가, 아닌가.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아닌가. 우리는 한 번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왜 자유로워야 하는가, 자유로우면 뭐가 좋은가. 

 

 나는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나는 왜 취업하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가, 내가 정말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하다 보니까 관성적으로 하고 있는 걸까, 인문학을 공부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 만약 내가 인문학공부를 좋아해서 한 번의 긍정이 이뤄졌다면 거기서 어떤 결과물이 주어져도 받아들일 수 있는 두번의 긍정, 긍정의 긍정이 이뤄졌는가, 한 번밖에 없는 순간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게끔 긍정하며,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별로 내키지 않지만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조금 해야할 것 같다.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읽고 쓰게 된 건 고등학교 때부터이다. 그 전에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고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책 읽으면 인생에 도움이 된다' 수준의 인식에서 독서와 글쓰기는 축구나 게임보다 낮은 수준의 취미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했고(중학교 때도 학원에 비슷한 시간까지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학교 끝나고 학원가는 시간까지의 '자유'시간을 제외하면 결과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수능, 입시를 위한 맹목적 공부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당했다. 나는 거기에 일정 수준의 반감과 부조리를 느꼈고 어쩌다가 세계문학전집을 읽게 되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 권을 읽어버린 나는 다른 한 권을 읽고 있었고, 이 연쇄작용은 쉼 없이 계속되었다(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말하면 책을 읽어버린 것이다). 단, 지금 생각해보면 이 시절 나의 한계는 책읽기에 대한 긍정이 한 번에 그쳤다는 것이다. 입시교육 대신 책읽기를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학교가 아닌 집에서 독서가 잘 이뤄지지 못했다. 책은 읽어야 겠는데 책도 내용이 어려우면 지루하고 머리 아프니까 게임이나 TV에 우선순위가 밀리곤 했다. 내게 맞는 독서리스트를 갖지 못한 것도 큰 약점이었는데 학교에서 나눠준 독서기록장에 나와 있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고전 100선에 나오는 책들을 읽으려고 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스피노자의 에티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아스, 단테의 신곡(지옥, 연옥, 천국 모두 다!), 맑스의 자본론(1 - 2의 초반까지 읽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7권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생각이다) 같은 책들은 글자를 읽었을 뿐 내용을 읽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해를 거의 하지 못했다. 한 번 펼친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오기 때문에 이해도 안 되는 책들을 끙끙거리며 벌 받듯 읽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런 책들만 읽은 것은 아니여서 세계문학전집과 스테디셀러들-황광우의 철학콘서트,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 김용규의 문학카페에서 철학읽기 등은 굉장히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에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책을 읽었던 얘들과의 격차를 좁히려면 쉽고 재밌는 책이 아니라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 이는 휴학을 했던 작년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하루 10시간,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평균적으로 이 정도는 공부한 것으로 미루어 나도 일단 그 시간을 '채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책은 평소보다 많이 읽었을지 모르지만 삶의 질은 굉장히 낮아졌고, 내가 좀 더 좋은 삶을 살자고 하는 짓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자기소외'를 경험하면서 근본적으로 앞의 질문을 묻게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이 상태로는 인문학에 아무리 길이 있고, 인생의 의미와 존엄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게 된 주제들이 있다. 양과 질, 능동과 수동(하고 싶다sein과 해야 한다sollen), 즐거움樂, 제도권 인문학, 저항[반항]으로서의 공부-놀이로서의 공부[즐거운 학문].

 

1. 양과 질. 이 주제는 고등학교 때 했던 '계산'부터 이어져왔지만 작년에서야 비로서 비판적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양은 자신이 하는 행동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인데 이 양 자체를 목적으로 하면 자기소외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기소외란 표현은 당연히 맑스를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인데 마치 시간을 자본처럼 무조건적으로 증가시키려다 보면 시간은 사물화된 시간이 되고, 이 사물화된 시간을 살고 있는 존재자는 살아 있는 지성의 창발적 활동이 아닌 기계화, 사물화된 노동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2. 제도권 인문학. 이는 제도권과 깊이 관련 있다. 결국 기준을 자기 자신이 아닌 남들에 둔다는 것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편이고, 경쟁의 승리의 목적은 제도권으로의 편입이다. 단순히 생각해서 다른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연구하는 사람과 연구만 하는 사람의 차이는 불 보듯 뻔한 것이기 때문에 제도권으로의 편입을 욕심내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뚜렷한 탐구의식, 능동적 탐구태도가 결여된 형태라면 결국 나의 좋은 삶을 위한 공부가 아닌 연구를 남들보다 많이 해 업적을 세우려는 명예욕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결국 자신과 공동체를 위한 학문탐구가 아니라 제도권에서 요구하는 업적을 쌓기 위한 수동적 노동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사람이 학계에서 권력을 갖게 되면 자신의 노예근성을 후학들에게까지 강요하는 악순환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3. 능동과 수동. 결국 능동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방법은 무엇인가. 이는 앞서 공부에 대한 원한(ressentiment)을 품게 된 사람에 대한 논의와도 연결될 것이다. 그들이 원한을 갖게 된 이유는 앞서 얘기했듯 왜 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기를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 속에서 즐거움이 됐든, 부모님-선생님 타인의 칭찬이 됐든, 지적 충만감이 됐든 뭔가를 생산해낸 사람은 괜찮고, 결국 자신이 공부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지만 아무 것도 생산해내지 못한 사람은 원한만을 생산하게 된다. 이 원한이 사람을 죽을 때까지 공부하지 않게 만드는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질병이다. 공부는 나와 안 맞는 것, 나는 공부 못하는 사람, 이런 잘못된 자기진단까지 겹쳐지게 되면 공부와 그 사람 사이에 만리장성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타인의존적인 칭찬을 제외하고 자아독립적 즐거움, 지적 충만감이 어떻게 생기는지 살펴보면 능동성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뭔가를 새로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끼긴 쉽지 않은 것 같다. 룩셈부르크의 수도가 룩셈부르크라는 사실을 알기 전의 '나'와 알게 된 후의 '나'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뭔가 차이가 생산되었을 때 즐거움, 지적 충만감은 발생한다. 이를 테면 'Hi'를 알게 되면 외국인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게 되고, 이 차이가 영어공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따라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행복이라 본다면(이때 행복은 오늘날 미국식 행복학이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엔돌핀 운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사회-정치적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공부는 자신이 품고 있는 질문에 해답 혹은 새로운 질문을 던져주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사회에 실현시켜줄 수 있을 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호기심이란 능동적 의지의 원천을 촉촉하게 유지할 것, 그 앎을 사회에 실현함으로써 더 큰 앎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낼 것, 공부 속에서 낮은 차원의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높은 차원의 행복eudaimonia가 있음을 느낄 것. 이것이 능동적 공부를 위한 핵심이 아닐까 싶다.


4. 저항으로서의 공부-놀이로서의 공부. 나는 높은 차원의 행복에 대한 의식은 고등학교 때부터 있었다.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저항,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 대학진학-취직-결혼-마이카-집-... 남들이 말하는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 고차원적 의미추구에 대한 의지... 하지만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한 번의 긍정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저항해야 할 적이 사라지면 이런 의지도 사라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또 그런 고차원적인 의미에 대한 의지가 실존적 차원에서 내재화, 나의 욕망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불완전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의지들은 중2병적인 심각함과 입시제도의 폭력성이 빚어낸 환상일 뿐 실재가 아니었다. 그것이 실재적 차원에서 나의 욕망이 되려면 내게 즐거움樂을 줘야 했다. 그 즐거움은 앞서 능동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고 생각한다. 

 대신 앞서 언급했던 4대성인의 가난이란 주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배부르고 등 따듯한 여유가 있어야 사유하는 습관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해놓고, 또 가난했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에 이를 수 있었다는 주장은 얼핏 보면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사유의 출발 조건이라면, 가난은 보편적 진리를 사유하는 존재자의 존재태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편적 진리를 무엇을 뜻하는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지만 이는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과 동떨어졌을 뿐더러 내가 다룰 수 있는 역량도 안 되기 때문에 정말 소박하게 이렇게 정의내려본다.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옳은 것. 예수가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재물들이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켜줬더라면 무조건적인 무한한 사랑을 꿈꿀 수나 있었을까? 설사 생각했더라도 실천할 수 있었을까?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어떤 물질적 이해관계에도 구애받지 않고 순수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사유-학문을 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사유의 치열함과 절실함이 부족할 것이고, 설사 치열하고 절실하게 사유했더라도 그렇게 만들어진 사상은 생기 없는 논리적인 축조물이 아니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몸과 정신이 별개가 아니라 사유하는 몸-몸이 하는 사유,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면 자발적 가난은 풍성한 사유의 잉태를 위한 전제조건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사유 와 윤리의 긴밀한 내적 관계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당연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윤리적인 것'을 대상으로 놓고 주체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가 사유하는 주체성에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유를 치열하고, 처절하고, 절실하게, 진실하게 한다면 사유의 옷을 입기 위해 다른 옷들을 벗어던지게 되지 않을까?  

 

 나는 즐거운 학문을 할 수 있으면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 속에서만 인생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공부의 범위를 책이나 학술적인 지식의 습득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고 본다면, 세상을 한 권의 책이라 생각하고 거기서 뭔가를 배워 나를 바꿔나가는 과정을 공부라고 본다면 나는 감히 공부 속에서만 인생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상태도 뭔가를 채우지 않고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으려면 매순간 배워야 하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공부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공부의 존재론이 결국 들뢰즈의 과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에 푸코가 쓴 서문의 제목처럼 "비-파시스트적 삶"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진학-취직-결혼-마이카-집... 이것들은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일 뿐인데, 이것들이 우리를 소외시키고 좀먹고 있다.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들은 이것이 저항한다고 해서 바뀔 거란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딴 짓'하지 않고 재빠르게 체제에 순응, 적응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체제에서 낙오돼 삶의 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 폭력의 굴레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두 가지다. 인간의 말을 할 것이다. 춤을 출 것이다. 나는 춤을 언어로 번역하면 발터 베냐민이 말하는 '문자의 사슬을 끊고 나오는 해방된 산문'이 될 거라 믿는다. 그리고 이 해방된 산문이 곧 인간의 말, 인간이 그려내는 무늬人文라 믿는다. 내가 그리는 무늬에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느껴줄지, 내가 건네는 친구의 요청에 사람들이 화답해줄 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정말 내가 하는 말이 인간의 말에 가까워진다면, 또 진정으로 춤을 술 수 있다면 이미 나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이 해방된 산문과 춤에는 파울 클레의 묘비명대로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꿈꾸고, 그들의 꿈 속에서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해방된 산문이 결국 인간을 해방시켜 줄 거라는 믿음까지도 믿는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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