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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ㅣ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평점 :
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에는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섞여 있다.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유대계 지식인, 매체미학의 선구자, 사유의 유격전-사물이란 파편에서 시대를 읽어내는 정지 상태의 변증법으로 19세기 파리를 해부한 산책자, 느리고 무겁고 차가우며 먼 토성의 고리에 영향을 받은 멜랑꼴리의 영혼, 자기만의 여행을 발명해낸 여행가, 마르크스주의와 신학을 결합시킨 독창적 사상가, 번역가, 아웃사이더.
벤야민이란 이름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잡아내려는 순간 불협화음에 가까운 이질적인 목소리가 끼어든다. 그것은 그의 아웃사이더 기질에서 연유하며 이렇게 교란된 질서에서 파편의 이미지를 포착해 세계를 읽어내는 것이 '비평가' 벤야민이다. 그는 파편을 읽고, 거기에서 세계를 해석해낸다. 전체가 진리라는 헤겔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부분이 진리라는 테제를 주장한 '부정사유negative denken'의 아도르노와는 다른 방식으로 벤야민은 부분을 다뤘다고 생각한다. 그는 부분들을 잇는 '성좌constellation'을 그려 모자이크로 된 세계를 구성했다.
그 유명한 진보에 대한 테제, 파울 클레의 천사에서 진보라는 거부할 수 없는 폭풍은 전체 세계를 해체하고 부분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포착된 존재론적 점(punctum)일 것이다. '문자의 사슬을 끊고 나오는 해방된 산문' 번역은 더 높은 언어로의 진화라는 그의 번역관에서 볼 수 있듯 그의 진보이론은 상승운동이란 신학적 사유의 자장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이데아-현실에 대한 열등한 모사라는 플라톤의 예술관에 맞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방식으로 예술의 의미를 정립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유물론적 미학의 관점에서 예술을 통한 인간해방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타진하고 있다.
그것은 에술의 정치성과 정치의 심미화라는 키워드로 커칠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술의 정치성은 복제기술이란 하부구조가 제의가치에서 전시가치로 예술의 상부구조를 변화시킴에 따라 탈마법화, 탈주술화된 예술이 정치의 영역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후에 랑시에르의 미적인 것의 정치성 개념을 이해하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된다. 또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감각적인 것의 분배라는 감성론의 급진적 변혁을 갖고 옴에 따라 새로운 감각-지각의 지평이 열리고, 제2의 기술의 발명에 따른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와 유희공간spielraum의 발생이 대중으로 하여금 유토피아적 목표를 겨냥하게 만든다고 벤야민은 서술한다. 하지만 영화가 자본에서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했을 때, 정치에 이용될 때 파시즘의 유령이 스크린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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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자기소외selbstentfremdung는 인류 스스로의 파괴를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공산주의와 파시즘.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시인과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운동. 예술/기술과 정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읽는 데 벤야민의 이 텍스트는 문제적이지 아닐 수 없다. 비록 그가 제2의 기술이 창출한 유희-공간에서 대중의 진보성을 안일하게 믿은 감이 비판받을 지점으로 지적되지만 예술수용에 있어 매체의 중요성의 발견, 이는 예술의 의미(수용)를 개인의 정신적, 정서적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적 물적 차원에서 대중이란 새로운 예술수용 주체의 출현과 대중과 예술 사이 상호주관적 관계를 통해 읽어내려 했다는 점에서, 혁명을 조직하는 신경감응을 대중에게 훈련시키는 매체로써 영화/예술을 사유했다는 점에서 벤야민은 도래할 예술의 이미지를 포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죽은 자와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와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우리는 이미/아직에서 이미 도착해 있는 진실/진리를 은폐하고 있는 현행적 질서의 실증주의적 시간관을 폭파시키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메시아적 시간을 '지금-여기(Jetzt-zeit)'에 임재(par-ousia)시켜야 한다. 때 아닌 것unzeit, 벤야민의 텍스트는 시간 아닌 것을 사는 시간으로 전환시키는, 쓰여지지 않은 것을 지금 여기에 쓰는 식으로 읽어야/읽혀야 할 것이다. 그가 남긴 평생의 대작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가 미완성 메모뭉치로 남아 우리가 언제든지 얼마든지 새로운 성좌를 그릴 수 있는 무한한 비문(非文)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