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나는 사람들이 일주일 1권씩 책을 읽으면 세상은 바뀔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만 권의 책을 읽은 박사 한 명보다 백 권의 책을 읽은 일반시민들이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 사람의 천재가 써낸 기념비적 역작이 문명 자체의 전환을 몰고 오기도 하지만 나이브하게 생각했을 때 일반 시민들이 책을 읽는다면 적어도 이상한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앉혀놓는 우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플라톤을 읽고 국가의 역할과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한다면, 장자를 읽고 사람들 간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의식의 실체는 무엇인지, 진정한 의미의 평등은 무엇인지(백혼무인이 나오는 편), 뼈에 흠집을 내지 않는 칼질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한다면 지금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라 확신한다.
답이 이렇게 간단하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말한다. 책은 재미없다. 책은 어렵다. 책 읽으면 누가 밥 먹여주냐? 책 읽어서 어디다 써먹냐?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아직도 책 타령이냐? 지금은 영상의 시대다. 요즘은 좋은 책이 안 나온다 등등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영상의 시대가 오면서 책읽기를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더 늘어난 추세다. 감각을 자극하는 영상물에 익숙한 학생들은 책에서 쉽게 지루함과 싫증을 느낀다. 책에서 보상은 느리게 온다(곧바로 오지 않는다). 보상을 보상으로 생각하는 깨달음도 느리게 온다. 정규교육 과정에서 해야 하는 공부뿐만 아니라 사교육에서까지 이어지는 물량공세에 지친 학생들에게 책은 놀이가 될 수 없다. 책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공부할 것도 많은데 공부에 상관없어 보이는 것을 쉬고 노는 시간에 머리 아파해가면서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책은 참된 앎을 알려주는 지식과 지혜의 보고가 아니라 이상한 아이들의 괴상한 취미, 책덕후들의 전유물일 지도 모르겠다(적어도 일부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책읽기 어려운 사회라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사회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얘기하면 발끈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한다, 네가 말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공자왈, 맹자왈만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반문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동의한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한다. 중요한 건 생각의 내용이고 형식이다. 점심에 뭐 먹을지 생각하는 건 생각인 건 맞지만 동물적 본능에 의한 자연적 행위이므로 생각이라 부르기에 민망한 부분이 없지 않다. 매우 저차원적인 생각이란 뜻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앎, 플라톤의 이데아를 생각한다고 해서 고차원적 생각을 한다고 장담할 순 없다. 무지의 앎과 이데아가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실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으면 그 개념을 모르는 상태와 차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름만 알고 있는 상태를 개념을 이해했다는 것과 혼동한다면 개념의 이름조차 모르는 상황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름만 아는 사람은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수동적으로 개념을 암기하는 데 그친다면 사유라고 보기 힘들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생각을 창조해냈을 때, 자기의 생각을 주체적으로 생산해냈을 때 진정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Dasein이든 Ubermensch이든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야만 사유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존의 앎과 다른 차이를 생산했을 때 사유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사유는 생각보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하는 사람은 사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만의 '생활하는 자는 창조할 수 없다'는 명제와 공명하는 이 명제는 사유의 본질 중 하나가 배타성이란 걸 암시한다. 생각하는 자만이 생각한다, 사유는 고독한 작업이라는 하이데거의 말(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영화 '한나 아렌트'에서 본 장면이라 실제로 똑같은 말을 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하이데거의 사상을 토대로 비춰봤을 때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된다)도 일맥상통한다.
사유하는 사람들은 왜 사유하는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진정한 앎에 이르기 위해서일 것이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플라톤주의자도 있겠지만 사회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통념(bon sens)과 인식 자체의 상투성에 의해 가려진 상대적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사유하지 않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자기 인생의 주인-주체로서 삶을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진실하고 정직한 삶-한마디로 그리스 시대에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뜻하는 '좋은 삶eu zen'을 향한 욕망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상태, 삶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정신적이고 고차원적인 의미를 추구하고 싶은 욕망이 싹트지 '의미의 질병'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배부르지도 않고 등도 차갑지만 의미를 추구했던 사람이 인류 역사상 비일비재했고, 그들에 의해 역사가 진보했다고. 맞다. 석가와 소크라테스는 각각 왕족, 귀족 출신이긴 했지만 공자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일반인이었고, 예수는 천한 신분이었다. 그들은 배고픈 상황에서도 사유를 했을 것이다. 가난의 탈출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고, 의미 있는 삶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에 후세에 성인이라 불릴 만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태어나지 않은 석가, 소크라테스 역시 자발적으로 가난해졌기 때문에 당대에 잘 나가는 철학자 정도에 머물지 않고 현재 인류에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류의 정신적 스승으로 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얘기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고, 정리하자면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좋은 삶을 향한 욕망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 또 사유하지 않으면 좋은 삶을 향한 욕망이 배태되기 힘들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읽기 힘든 시대 - 사유하기 힘든 시대라는 규정에서 먹고 살기 힘든 시대라는 규정을 끌어낼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4대 성인이 살았던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엄청나게 풍요로워졌는데 먹고 살기 힘든 시대라니. 한국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이 들으면 뒤로 넘어갈 만한 이야기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의 공과를 높이 사는 이가 들으면 빨갱이의 선동질이라고 욕 먹을 만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심심찮게 생존권 자체를 위협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사를 통해 꽤 자주 접하고 있다. 용산 사태,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밀양 송전탑, 강정 해군기지, 세월호 등등 우리는 하루아침에 평범한 노동자에서 임금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파업하는 종북좌빨 노조가 되고, 불타는 망루, 고공크레인에서 공권력에 의해 처리되는 '범법자'가 되고, 진정한 애도가 '금지된' 세월호가 된다(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는 진단은 현대사회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라는 조르조 아감벤의 진단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아감벤이 지적했던 대로 예외상태가 일상이 된 모습이다.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사회에서 제시하는 삶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된다. 커트 라인cut-line. 시민과 비-시민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의미를 추구하는 좋은 삶(eu zen, bios)과 동물적 생존을 의미하는 삶(zen, zoe)의 경계가 끊임없이 이동하며 누군가를 삶에서 배제시키고 있는데 이런 사회에서 삶이 보장되지 않은 일반인이 취직에 도움이 안 되는 철학공부를 한다는 건 하나의 모험이다. 부모가 어느 정도 학비를 지원해줄 수 있는 경우라면 정말 철학에만 용맹정진해 교수가 되든 연구원이 되든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알바해 가면서 학비를 벌어야 하는 경우에 대학졸업 후에 대학원 진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데까지 드는 시간, 돈을 감안하면 철학공부는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제도권 철학만은 철학행위에 한정한다고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학생의 경우 대학교에서 좋은 학점을 받고,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사유할 여유가 있을까 의심된다. 학교수업에서는 교수에게 비판적인의견을 제시했을 때 좋은 학점을 받기가 쉽지 않아(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1189.html) 수용적 사고-암기식 공부에 그칠 텐데 이런 환경에서 사유는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돈벌이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유,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학생 시절 전부를 좋은 점수, 좋은 대학, 좋은 학점에 볼모로 잡혀 노예로 살게 만드는 나라에서 100권의 책 읽는 시민이 나오기조차 힘든 것이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급해지기를 강요한다. 여유가 없다. 학교의 어원인 schole가 여유라는 점은 의미심장한데 여유가 없으면 사유하는 습관이 만들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생각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했는데 지금부터는 공부로 초점을 조금 옮길까 한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람들은 공부를 싫어할까? 올해 들어 공부를 싫어한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왜 그들은 공부를 싫어하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억지로 시켰기 때문에 공부=스트레스=억지로 해야하는 것의 등식이 생겼을 것이다. 그것은 공부를 단지 질문-놀이(하고 싶다)의 형식이 아닌 명령-필연의 형식으로만 접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왜 하니? 선생님이 시켜서요. 대학 가려고요. 대학은 왜 가니? 취직하려고요. 선생님-부모님이 가라고 해서요. 안 가면 차별받는다고 해서요. 안 가면 임금이 대졸자에 비해 낮아서요. 그냥요... 나는 이런 식의 억지공부가 니체가 비판한 기독교와 비슷한 맥락이라 이해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삶의 의미를 현실의 인생이 아닌 내세에서의 구원에서 찾았듯 억지공부에서 공부의 의미는 자기의 발전이나 변화가 아닌 사회제도의 편입 및 적응에 있다. 자신의 주체적 의지는 사라지고 노예 같이 복종하는 태도만 강화된다는 점에서도 일맥상통한다. 니체는 능동active과 반동reactive의 차이를 강조했고, 소박하게 말하면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복eudaimonia과 행복을 위해 수단이 되는 행동의 구분은 서양철학의 시원부터 지금까지 계속 양태를 바꾸며 이어져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가장 일상적인 용어로 치환하면 해야 한다sollen의 현실과 하고 싶다sein의 이상의 대립이 될 것이다. 결국 한마디로 자유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나는 자유로운 인간인가, 아닌가.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아닌가. 우리는 한 번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왜 자유로워야 하는가, 자유로우면 뭐가 좋은가.
나는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나는 왜 취업하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가, 내가 정말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하다 보니까 관성적으로 하고 있는 걸까, 인문학을 공부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 만약 내가 인문학공부를 좋아해서 한 번의 긍정이 이뤄졌다면 거기서 어떤 결과물이 주어져도 받아들일 수 있는 두번의 긍정, 긍정의 긍정이 이뤄졌는가, 한 번밖에 없는 순간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게끔 긍정하며,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별로 내키지 않지만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조금 해야할 것 같다.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읽고 쓰게 된 건 고등학교 때부터이다. 그 전에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고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책 읽으면 인생에 도움이 된다' 수준의 인식에서 독서와 글쓰기는 축구나 게임보다 낮은 수준의 취미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했고(중학교 때도 학원에 비슷한 시간까지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학교 끝나고 학원가는 시간까지의 '자유'시간을 제외하면 결과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수능, 입시를 위한 맹목적 공부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당했다. 나는 거기에 일정 수준의 반감과 부조리를 느꼈고 어쩌다가 세계문학전집을 읽게 되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 권을 읽어버린 나는 다른 한 권을 읽고 있었고, 이 연쇄작용은 쉼 없이 계속되었다(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말하면 책을 읽어버린 것이다). 단, 지금 생각해보면 이 시절 나의 한계는 책읽기에 대한 긍정이 한 번에 그쳤다는 것이다. 입시교육 대신 책읽기를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학교가 아닌 집에서 독서가 잘 이뤄지지 못했다. 책은 읽어야 겠는데 책도 내용이 어려우면 지루하고 머리 아프니까 게임이나 TV에 우선순위가 밀리곤 했다. 내게 맞는 독서리스트를 갖지 못한 것도 큰 약점이었는데 학교에서 나눠준 독서기록장에 나와 있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고전 100선에 나오는 책들을 읽으려고 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스피노자의 에티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아스, 단테의 신곡(지옥, 연옥, 천국 모두 다!), 맑스의 자본론(1 - 2의 초반까지 읽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7권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생각이다) 같은 책들은 글자를 읽었을 뿐 내용을 읽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해를 거의 하지 못했다. 한 번 펼친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오기 때문에 이해도 안 되는 책들을 끙끙거리며 벌 받듯 읽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런 책들만 읽은 것은 아니여서 세계문학전집과 스테디셀러들-황광우의 철학콘서트,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 김용규의 문학카페에서 철학읽기 등은 굉장히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에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책을 읽었던 얘들과의 격차를 좁히려면 쉽고 재밌는 책이 아니라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 이는 휴학을 했던 작년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하루 10시간,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평균적으로 이 정도는 공부한 것으로 미루어 나도 일단 그 시간을 '채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책은 평소보다 많이 읽었을지 모르지만 삶의 질은 굉장히 낮아졌고, 내가 좀 더 좋은 삶을 살자고 하는 짓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자기소외'를 경험하면서 근본적으로 앞의 질문을 묻게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이 상태로는 인문학에 아무리 길이 있고, 인생의 의미와 존엄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게 된 주제들이 있다. 양과 질, 능동과 수동(하고 싶다sein과 해야 한다sollen), 즐거움樂, 제도권 인문학, 저항[반항]으로서의 공부-놀이로서의 공부[즐거운 학문].
1. 양과 질. 이 주제는 고등학교 때 했던 '계산'부터 이어져왔지만 작년에서야 비로서 비판적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양은 자신이 하는 행동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인데 이 양 자체를 목적으로 하면 자기소외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기소외란 표현은 당연히 맑스를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인데 마치 시간을 자본처럼 무조건적으로 증가시키려다 보면 시간은 사물화된 시간이 되고, 이 사물화된 시간을 살고 있는 존재자는 살아 있는 지성의 창발적 활동이 아닌 기계화, 사물화된 노동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2. 제도권 인문학. 이는 제도권과 깊이 관련 있다. 결국 기준을 자기 자신이 아닌 남들에 둔다는 것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편이고, 경쟁의 승리의 목적은 제도권으로의 편입이다. 단순히 생각해서 다른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연구하는 사람과 연구만 하는 사람의 차이는 불 보듯 뻔한 것이기 때문에 제도권으로의 편입을 욕심내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뚜렷한 탐구의식, 능동적 탐구태도가 결여된 형태라면 결국 나의 좋은 삶을 위한 공부가 아닌 연구를 남들보다 많이 해 업적을 세우려는 명예욕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결국 자신과 공동체를 위한 학문탐구가 아니라 제도권에서 요구하는 업적을 쌓기 위한 수동적 노동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사람이 학계에서 권력을 갖게 되면 자신의 노예근성을 후학들에게까지 강요하는 악순환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3. 능동과 수동. 결국 능동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방법은 무엇인가. 이는 앞서 공부에 대한 원한(ressentiment)을 품게 된 사람에 대한 논의와도 연결될 것이다. 그들이 원한을 갖게 된 이유는 앞서 얘기했듯 왜 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기를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 속에서 즐거움이 됐든, 부모님-선생님 타인의 칭찬이 됐든, 지적 충만감이 됐든 뭔가를 생산해낸 사람은 괜찮고, 결국 자신이 공부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지만 아무 것도 생산해내지 못한 사람은 원한만을 생산하게 된다. 이 원한이 사람을 죽을 때까지 공부하지 않게 만드는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질병이다. 공부는 나와 안 맞는 것, 나는 공부 못하는 사람, 이런 잘못된 자기진단까지 겹쳐지게 되면 공부와 그 사람 사이에 만리장성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타인의존적인 칭찬을 제외하고 자아독립적 즐거움, 지적 충만감이 어떻게 생기는지 살펴보면 능동성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뭔가를 새로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끼긴 쉽지 않은 것 같다. 룩셈부르크의 수도가 룩셈부르크라는 사실을 알기 전의 '나'와 알게 된 후의 '나'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뭔가 차이가 생산되었을 때 즐거움, 지적 충만감은 발생한다. 이를 테면 'Hi'를 알게 되면 외국인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게 되고, 이 차이가 영어공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따라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행복이라 본다면(이때 행복은 오늘날 미국식 행복학이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엔돌핀 운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사회-정치적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공부는 자신이 품고 있는 질문에 해답 혹은 새로운 질문을 던져주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사회에 실현시켜줄 수 있을 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호기심이란 능동적 의지의 원천을 촉촉하게 유지할 것, 그 앎을 사회에 실현함으로써 더 큰 앎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낼 것, 공부 속에서 낮은 차원의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높은 차원의 행복eudaimonia가 있음을 느낄 것. 이것이 능동적 공부를 위한 핵심이 아닐까 싶다.
4. 저항으로서의 공부-놀이로서의 공부. 나는 높은 차원의 행복에 대한 의식은 고등학교 때부터 있었다.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저항,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 대학진학-취직-결혼-마이카-집-... 남들이 말하는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 고차원적 의미추구에 대한 의지... 하지만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한 번의 긍정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저항해야 할 적이 사라지면 이런 의지도 사라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또 그런 고차원적인 의미에 대한 의지가 실존적 차원에서 내재화, 나의 욕망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불완전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의지들은 중2병적인 심각함과 입시제도의 폭력성이 빚어낸 환상일 뿐 실재가 아니었다. 그것이 실재적 차원에서 나의 욕망이 되려면 내게 즐거움樂을 줘야 했다. 그 즐거움은 앞서 능동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고 생각한다.
대신 앞서 언급했던 4대성인의 가난이란 주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배부르고 등 따듯한 여유가 있어야 사유하는 습관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해놓고, 또 가난했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에 이를 수 있었다는 주장은 얼핏 보면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사유의 출발 조건이라면, 가난은 보편적 진리를 사유하는 존재자의 존재태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편적 진리를 무엇을 뜻하는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지만 이는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과 동떨어졌을 뿐더러 내가 다룰 수 있는 역량도 안 되기 때문에 정말 소박하게 이렇게 정의내려본다.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옳은 것. 예수가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재물들이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켜줬더라면 무조건적인 무한한 사랑을 꿈꿀 수나 있었을까? 설사 생각했더라도 실천할 수 있었을까?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어떤 물질적 이해관계에도 구애받지 않고 순수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사유-학문을 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사유의 치열함과 절실함이 부족할 것이고, 설사 치열하고 절실하게 사유했더라도 그렇게 만들어진 사상은 생기 없는 논리적인 축조물이 아니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몸과 정신이 별개가 아니라 사유하는 몸-몸이 하는 사유,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면 자발적 가난은 풍성한 사유의 잉태를 위한 전제조건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사유 와 윤리의 긴밀한 내적 관계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당연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윤리적인 것'을 대상으로 놓고 주체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가 사유하는 주체성에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유를 치열하고, 처절하고, 절실하게, 진실하게 한다면 사유의 옷을 입기 위해 다른 옷들을 벗어던지게 되지 않을까?
나는 즐거운 학문을 할 수 있으면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 속에서만 인생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공부의 범위를 책이나 학술적인 지식의 습득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고 본다면, 세상을 한 권의 책이라 생각하고 거기서 뭔가를 배워 나를 바꿔나가는 과정을 공부라고 본다면 나는 감히 공부 속에서만 인생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상태도 뭔가를 채우지 않고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으려면 매순간 배워야 하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공부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공부의 존재론이 결국 들뢰즈의 과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에 푸코가 쓴 서문의 제목처럼 "비-파시스트적 삶"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진학-취직-결혼-마이카-집... 이것들은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일 뿐인데, 이것들이 우리를 소외시키고 좀먹고 있다.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들은 이것이 저항한다고 해서 바뀔 거란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딴 짓'하지 않고 재빠르게 체제에 순응, 적응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체제에서 낙오돼 삶의 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 폭력의 굴레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두 가지다. 인간의 말을 할 것이다. 춤을 출 것이다. 나는 춤을 언어로 번역하면 발터 베냐민이 말하는 '문자의 사슬을 끊고 나오는 해방된 산문'이 될 거라 믿는다. 그리고 이 해방된 산문이 곧 인간의 말, 인간이 그려내는 무늬人文라 믿는다. 내가 그리는 무늬에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느껴줄지, 내가 건네는 친구의 요청에 사람들이 화답해줄 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정말 내가 하는 말이 인간의 말에 가까워진다면, 또 진정으로 춤을 술 수 있다면 이미 나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이 해방된 산문과 춤에는 파울 클레의 묘비명대로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꿈꾸고, 그들의 꿈 속에서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해방된 산문이 결국 인간을 해방시켜 줄 거라는 믿음까지도 믿는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