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과의 조우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 스콧 롤랜드 외 출연, 베르너 헤어조크 목소리 / 야누스필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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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는 존재하는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의 정상 봉우리에 여전히 신은 살고 있을까? 우리는 해발 수심 만 미터 지점에 어떤 생물들이 사는지 알고 있으며, 히말라야는 신이 사는 곳이 아니라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지구의 운동으로 인해 생긴 '높은 곳'임을 알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지구의 신비는 거의 다 해명되었고, 인류가 아직 미개척지인 우주로 눈길을 옮긴 지도 오래 전 일이다. 신비가 사라진 자리를 권태가 채운다. 낯섦이 사라지면서 설레임도 사라지고 익숙함만 남게 되는 것처럼. 자연은 더 이상 경외해야 할 대상도, 신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신적인 시공간도 아니며, 인류에게 위협을 가하는(물론 자연'재해'라는 예외가 존재하지만) 맹수 같은 적도 아니다. 근대는 자연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자본으로 환원돼야 할 대상이 되었고, 인류가 물질적 번영을 누리는 동안 자연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자연파괴의 피해는 고스란히 인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왔고, 지속가능한 발전/그린에너지란 새로운 구호들이 생겨났다. 

남극. 그것은 어떤 공백으로 존재했다. 남극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실상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곳. 아마 살면서 한 번이라도 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되기 때문에 자연히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곳은 멀고, 춥다.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즉각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할까? 배를 타고 가야 할까? 여권은 챙겨야 겠지? 남극은 대륙인데, 이 대륙엔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 미국, 러시아, 중국 등등 강대국들이 영토분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이곳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누이트 족. 이글루에 사는 사람들. 이글루 안은 따뜻할까? 어렸을 때 보았던 무성 펭귄만화처럼 이글루는 반듯할까? 세종기지에선 무엇을 할까? 검색결과 부존자원과 자연환경을 조사, 연구, 개발한다고 한다. 

예전에 세종기지 대장님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이야기. 하나는 남극세종기지에 가게 되면 기존의 연봉보다 4배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한국의 연구원이 뉴욕인가 미국 어디쯤을 통과하는 배 안에서 서양의 미녀를 꼬셔 결혼까지 성공했다는 이야기. 사실 이것말고도 임무수행 도중 눈보라가 몰아쳐서 결국 기지로 귀환하지 못한 대원의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앞의 두 가지가 내겐 가장 강렬했다. 추위에 강하다면 남극에서 취업을! 친구의 말처럼 서양에서는 배우자를 만나는 데 있어서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가치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의견에 동감.      

남극에는 신비가 존재했다. 이성을 초월해 있는 비합리적인 신비라기보다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지구의 속살 같은 느낌이랄까. 남극의 생태계,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신기하게 생긴 생물들과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고래의 노래. 한 번 길을 정하면 바꾸지 않는 펭귄. 그리고 재밌는 사람들. 원주민의 피를 물려받은 엔지니어. 철학자. 화산학자. 과학자들. 무엇이 그들을 세상의 끝으로 끌어들인 걸까? 그곳에서 그들은 무슨 꿈을 꾸며 살아갈까? 매일매일 새로운 꿈을 꾼다는 말에 조금 설레였던 가슴. 상상력의 규제적 사용을 넘어 초월적 사용을 위해! 우리의 정신과 감각을 새롭게 갱신시키는 새로운 예술을 찾아. 

이런 '아름다운 지구' 느낌의 다큐멘터리는 아름다운 지구의 자연을 보는 맛은 있지만 조금 지루하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이 다큐는 거의 지루하지 않았다. 남극이란 낯선 공간적 배경도 한몫 했겠지만 여기서 살아가는 생명들의 이야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극을 단순히 감상을 위한 관조의 대상이 아닌 느낌의 시공간으로 변모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눈을 감고 무작정 걸어보았다. 세상 끝에 이를 때까지. 여권, 숙박, 돈, 모든 것을 잠시 잊고 무작정 걷고 또 걸어 세상의 끝까지, 고래의 노래가 있는 곳까지 날아서 헤엄쳐서 걸어서 기어서 갔다. 바다코끼리, 펭귄, 고래, 이름을 모르는 각양각색의 해양생명체들, 자기만의 빛을 발하고 있는 살아 있는 별들. 나도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고 싶다. 흐름에 몸을 맡기면 가능할 것이다. 어떤 알 수 없는 기분, 기운에 눈을 감고 몸을 맡기는 연습을 할 것. 그렇게 눈을 감고 유영을 즐기다 정신을 차렸을 때 색다른 공기를 듬뿍 마실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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