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우산과 모자는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는 모티프인데 특히 사다리에 걸려 있는 빨간우산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꿈에서나 나올 법한 이미지(사실 이런 꿈을 꿔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영화 같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 같기도...)인데 

현실을 환기시켜 꿈(가상)/현실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식의 뻔한 느낌은 아니었고 

앞서 말했듯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신선한 순간을 체험할 수 있었다. 

텅 비어 있는 탁자/의자. 일상에서 그것은 채워져야 할, 그러니까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핍되어 있는, 특정한 도구적 목적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그림에서 그것은 사물 자체로 존재한다. 예술은 사물을 구원한다고 했던가. 


비 내리지 않는 날의 접힌 우산. 쓸모 없는, 쓸모 없이 아름다운, 낭비. 과하거나 부족한 것이 있어야 한다 - 평균과 일반에서는 시적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 평균과 일반의 평균적이지 않음/일반적이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맥락화(탈맥락화/재맥락화)를 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손수건, 들판. 우리는 손수건을 보면서 손수건 너머에 들판을 동시에 본다. 지각의 경험적 재구성. 

손수건의 '있음'은 은폐로 해석당한다. 일차적으로 손수건에 의해 절단된 시각은 손수건이란 차이가 삽입된 들판을 다시 관찰할 것이다. 

배경이 아니라 사물로 무대에 오른 들판. 들판과 손수건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2차원적 시지각, 시각의 형식에 대한 자각과 질문이 쏟아진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세상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잠자리의 겹눈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본 적 있다. 너무나 많은 시각정보가 들어와 뇌가 터지지 않을까? 지금 뇌의 용량으로는 잠자리의 겹눈이 만들어내는 수 백, 수 천의 타자들을 감당해내지 못할 듯 싶다. 혹은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불가능한 새로운 의식세계가 열리게 될 텐데... 적어도 백허그의 설레임은 약화되겠지. 


bewusstsein/의식은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대상. 한 대상에 시선을 집중하면 주변 사물들은 배경이 되어버린다. 집중과 배제/소외의 변증법. 겹의 얼굴. 미간에 시선을 집중하면 주변 얼굴은 탈각하고, 입술에 시선을 집중하면 주변 얼굴은 탈각하고... 우리는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본다고 했던가. 선명하지 않음-시지각의 한계는 어떤 진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방어기제이면서 동시에 진실로부터 우리를 가로막는 한계/장애일 것이다. 선명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그대로 본다. 어떤 점을. 우리가 그 점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점이 우리를 포착하고 포획하는 것이다. 존재를 붙잡고 놔두지 않고 뒤흔드는 존재론적 점punctum. 그것은 찌른다. 그것에 찔려 방혈하거나 어딘가 걸려 끌려다닐 것이다. 이미지에 사로잡힌 영혼. 순간적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찌르는 점도 좋아하지만 알게 모르게 침투해 사라지지 않고 결국 한 몸이 되어버리는 점, 나는 그런 점들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가장 좋았던 하이라이트는 다름 아닌 인터뷰였다. 하루종일 작품생각만 했다는 황규백 작가. 부지러힌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젊은 작가들에게 조언하는 황규백 작가. 이 두 가르침으로 나는 또 한 명의 스승을 갖게 되었다. 듣는 순간 가슴에 새겨지는 말들. 이 심장의 문장들을 이성복 선생님의 <꽃에 이르는 길>처럼 나만의 책으로 꼭 만들고 싶다. 내 심장에 사는 선생님들이 잘 계실 수 있도록 집을 지어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하루종일. 눈 뜨자마자 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꿈에서 꿈으로. 일상을 꿈으로 만드는 마술은, 자신의 이상을 현실과 합치시키는 힘은 '하루종일'이라는 충실성에서 기인한다는 쉬워보이는 깨달음을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이메일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블로그 알림창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네이버 메인화면에 뜨는 실시간 검색들을 보면서 멜랑꼴리에 가까운 이상한 감정을 느낀 이유는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의 추구를 방해하고 혼선을 빚게 만들고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정보들의 난립, 외로움의 잘못된 사용.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외로움을 건강한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내면으로 침잠해 집중하는 게 필요한데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저기 주변만 둘러보다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리고 마는 정지 상태의 표류adrift. 


하루하루 행복하다는, 즐겁다는 황규백 작가. 

선생님, 하루하루 행복하고 즐겁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즐거움 : 창조-능동적인 태도/ 행복 : 존재의 방식 - 반복되는 양식. 충실성fidelity 하루하루 하루종일

이 하루하루 하루종일에서 단순히 시간의 양적 축적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어떤 순간에 시간의 질적 도약이 이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생까고 전부인 하나에 내 전부를 거는 것. 그래서 사랑하는 자에겐 전부가 아니면 무인 게 아닐까.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면. 


어떤 맹목성이 필요하다. 그 맹목적 빠짐/ 몰입/ 지향 속에서 그것이 정직하고 진실된 활동이 될 수 있도록 매 순간 자신을 의식하고 추동하는 일. 이것이 영원회귀의 자기극복의 나이브한 버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삶이란 예술을 위하여. 예술이란 사랑을 위하여. 사랑이란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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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8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rendevous 2015-05-18 01:02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에 덧글인데 내용 또한 정말 감동적이어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