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과의 조우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 스콧 롤랜드 외 출연, 베르너 헤어조크 목소리 / 야누스필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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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는 존재하는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의 정상 봉우리에 여전히 신은 살고 있을까? 우리는 해발 수심 만 미터 지점에 어떤 생물들이 사는지 알고 있으며, 히말라야는 신이 사는 곳이 아니라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지구의 운동으로 인해 생긴 '높은 곳'임을 알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지구의 신비는 거의 다 해명되었고, 인류가 아직 미개척지인 우주로 눈길을 옮긴 지도 오래 전 일이다. 신비가 사라진 자리를 권태가 채운다. 낯섦이 사라지면서 설레임도 사라지고 익숙함만 남게 되는 것처럼. 자연은 더 이상 경외해야 할 대상도, 신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신적인 시공간도 아니며, 인류에게 위협을 가하는(물론 자연'재해'라는 예외가 존재하지만) 맹수 같은 적도 아니다. 근대는 자연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자본으로 환원돼야 할 대상이 되었고, 인류가 물질적 번영을 누리는 동안 자연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자연파괴의 피해는 고스란히 인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왔고, 지속가능한 발전/그린에너지란 새로운 구호들이 생겨났다. 

남극. 그것은 어떤 공백으로 존재했다. 남극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실상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곳. 아마 살면서 한 번이라도 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되기 때문에 자연히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곳은 멀고, 춥다.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즉각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할까? 배를 타고 가야 할까? 여권은 챙겨야 겠지? 남극은 대륙인데, 이 대륙엔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 미국, 러시아, 중국 등등 강대국들이 영토분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이곳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누이트 족. 이글루에 사는 사람들. 이글루 안은 따뜻할까? 어렸을 때 보았던 무성 펭귄만화처럼 이글루는 반듯할까? 세종기지에선 무엇을 할까? 검색결과 부존자원과 자연환경을 조사, 연구, 개발한다고 한다. 

예전에 세종기지 대장님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이야기. 하나는 남극세종기지에 가게 되면 기존의 연봉보다 4배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한국의 연구원이 뉴욕인가 미국 어디쯤을 통과하는 배 안에서 서양의 미녀를 꼬셔 결혼까지 성공했다는 이야기. 사실 이것말고도 임무수행 도중 눈보라가 몰아쳐서 결국 기지로 귀환하지 못한 대원의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앞의 두 가지가 내겐 가장 강렬했다. 추위에 강하다면 남극에서 취업을! 친구의 말처럼 서양에서는 배우자를 만나는 데 있어서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가치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의견에 동감.      

남극에는 신비가 존재했다. 이성을 초월해 있는 비합리적인 신비라기보다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지구의 속살 같은 느낌이랄까. 남극의 생태계,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신기하게 생긴 생물들과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고래의 노래. 한 번 길을 정하면 바꾸지 않는 펭귄. 그리고 재밌는 사람들. 원주민의 피를 물려받은 엔지니어. 철학자. 화산학자. 과학자들. 무엇이 그들을 세상의 끝으로 끌어들인 걸까? 그곳에서 그들은 무슨 꿈을 꾸며 살아갈까? 매일매일 새로운 꿈을 꾼다는 말에 조금 설레였던 가슴. 상상력의 규제적 사용을 넘어 초월적 사용을 위해! 우리의 정신과 감각을 새롭게 갱신시키는 새로운 예술을 찾아. 

이런 '아름다운 지구' 느낌의 다큐멘터리는 아름다운 지구의 자연을 보는 맛은 있지만 조금 지루하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이 다큐는 거의 지루하지 않았다. 남극이란 낯선 공간적 배경도 한몫 했겠지만 여기서 살아가는 생명들의 이야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극을 단순히 감상을 위한 관조의 대상이 아닌 느낌의 시공간으로 변모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눈을 감고 무작정 걸어보았다. 세상 끝에 이를 때까지. 여권, 숙박, 돈, 모든 것을 잠시 잊고 무작정 걷고 또 걸어 세상의 끝까지, 고래의 노래가 있는 곳까지 날아서 헤엄쳐서 걸어서 기어서 갔다. 바다코끼리, 펭귄, 고래, 이름을 모르는 각양각색의 해양생명체들, 자기만의 빛을 발하고 있는 살아 있는 별들. 나도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고 싶다. 흐름에 몸을 맡기면 가능할 것이다. 어떤 알 수 없는 기분, 기운에 눈을 감고 몸을 맡기는 연습을 할 것. 그렇게 눈을 감고 유영을 즐기다 정신을 차렸을 때 색다른 공기를 듬뿍 마실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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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우산과 모자는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는 모티프인데 특히 사다리에 걸려 있는 빨간우산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꿈에서나 나올 법한 이미지(사실 이런 꿈을 꿔본 적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영화 같다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것 같기도...)인데 

현실을 환기시켜 꿈(가상)/현실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식의 뻔한 느낌은 아니었고 

앞서 말했듯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신선한 순간을 체험할 수 있었다. 

텅 비어 있는 탁자/의자. 일상에서 그것은 채워져야 할, 그러니까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핍되어 있는, 특정한 도구적 목적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만 그림에서 그것은 사물 자체로 존재한다. 예술은 사물을 구원한다고 했던가. 


비 내리지 않는 날의 접힌 우산. 쓸모 없는, 쓸모 없이 아름다운, 낭비. 과하거나 부족한 것이 있어야 한다 - 평균과 일반에서는 시적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 평균과 일반의 평균적이지 않음/일반적이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맥락화(탈맥락화/재맥락화)를 하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손수건, 들판. 우리는 손수건을 보면서 손수건 너머에 들판을 동시에 본다. 지각의 경험적 재구성. 

손수건의 '있음'은 은폐로 해석당한다. 일차적으로 손수건에 의해 절단된 시각은 손수건이란 차이가 삽입된 들판을 다시 관찰할 것이다. 

배경이 아니라 사물로 무대에 오른 들판. 들판과 손수건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2차원적 시지각, 시각의 형식에 대한 자각과 질문이 쏟아진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세상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잠자리의 겹눈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본 적 있다. 너무나 많은 시각정보가 들어와 뇌가 터지지 않을까? 지금 뇌의 용량으로는 잠자리의 겹눈이 만들어내는 수 백, 수 천의 타자들을 감당해내지 못할 듯 싶다. 혹은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불가능한 새로운 의식세계가 열리게 될 텐데... 적어도 백허그의 설레임은 약화되겠지. 


bewusstsein/의식은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 대상. 한 대상에 시선을 집중하면 주변 사물들은 배경이 되어버린다. 집중과 배제/소외의 변증법. 겹의 얼굴. 미간에 시선을 집중하면 주변 얼굴은 탈각하고, 입술에 시선을 집중하면 주변 얼굴은 탈각하고... 우리는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본다고 했던가. 선명하지 않음-시지각의 한계는 어떤 진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방어기제이면서 동시에 진실로부터 우리를 가로막는 한계/장애일 것이다. 선명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그대로 본다. 어떤 점을. 우리가 그 점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점이 우리를 포착하고 포획하는 것이다. 존재를 붙잡고 놔두지 않고 뒤흔드는 존재론적 점punctum. 그것은 찌른다. 그것에 찔려 방혈하거나 어딘가 걸려 끌려다닐 것이다. 이미지에 사로잡힌 영혼. 순간적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찌르는 점도 좋아하지만 알게 모르게 침투해 사라지지 않고 결국 한 몸이 되어버리는 점, 나는 그런 점들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가장 좋았던 하이라이트는 다름 아닌 인터뷰였다. 하루종일 작품생각만 했다는 황규백 작가. 부지러힌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젊은 작가들에게 조언하는 황규백 작가. 이 두 가르침으로 나는 또 한 명의 스승을 갖게 되었다. 듣는 순간 가슴에 새겨지는 말들. 이 심장의 문장들을 이성복 선생님의 <꽃에 이르는 길>처럼 나만의 책으로 꼭 만들고 싶다. 내 심장에 사는 선생님들이 잘 계실 수 있도록 집을 지어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하루종일. 눈 뜨자마자 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꿈에서 꿈으로. 일상을 꿈으로 만드는 마술은, 자신의 이상을 현실과 합치시키는 힘은 '하루종일'이라는 충실성에서 기인한다는 쉬워보이는 깨달음을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이메일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블로그 알림창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네이버 메인화면에 뜨는 실시간 검색들을 보면서 멜랑꼴리에 가까운 이상한 감정을 느낀 이유는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의 추구를 방해하고 혼선을 빚게 만들고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정보들의 난립, 외로움의 잘못된 사용.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외로움을 건강한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내면으로 침잠해 집중하는 게 필요한데 길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저기 주변만 둘러보다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리고 마는 정지 상태의 표류adrift. 


하루하루 행복하다는, 즐겁다는 황규백 작가. 

선생님, 하루하루 행복하고 즐겁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즐거움 : 창조-능동적인 태도/ 행복 : 존재의 방식 - 반복되는 양식. 충실성fidelity 하루하루 하루종일

이 하루하루 하루종일에서 단순히 시간의 양적 축적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어떤 순간에 시간의 질적 도약이 이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생까고 전부인 하나에 내 전부를 거는 것. 그래서 사랑하는 자에겐 전부가 아니면 무인 게 아닐까.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면. 


어떤 맹목성이 필요하다. 그 맹목적 빠짐/ 몰입/ 지향 속에서 그것이 정직하고 진실된 활동이 될 수 있도록 매 순간 자신을 의식하고 추동하는 일. 이것이 영원회귀의 자기극복의 나이브한 버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삶이란 예술을 위하여. 예술이란 사랑을 위하여. 사랑이란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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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8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rendevous 2015-05-18 01:02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에 덧글인데 내용 또한 정말 감동적이어서 감사합니다 ^^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나는 사람들이 일주일 1권씩 책을 읽으면 세상은 바뀔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만 권의 책을 읽은 박사 한 명보다 백 권의 책을 읽은 일반시민들이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 사람의 천재가 써낸 기념비적 역작이 문명 자체의 전환을 몰고 오기도 하지만 나이브하게 생각했을 때 일반 시민들이 책을 읽는다면 적어도 이상한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앉혀놓는 우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플라톤을 읽고 국가의 역할과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한다면, 장자를 읽고 사람들 간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의식의 실체는 무엇인지, 진정한 의미의 평등은 무엇인지(백혼무인이 나오는 편), 뼈에 흠집을 내지 않는 칼질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한다면 지금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라 확신한다.

 

 답이 이렇게 간단하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말한다. 책은 재미없다. 책은 어렵다. 책 읽으면 누가 밥 먹여주냐? 책 읽어서 어디다 써먹냐?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아직도 책 타령이냐? 지금은 영상의 시대다. 요즘은 좋은 책이 안 나온다 등등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영상의 시대가 오면서 책읽기를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더 늘어난 추세다. 감각을 자극하는 영상물에 익숙한 학생들은 책에서 쉽게 지루함과 싫증을 느낀다. 책에서 보상은 느리게 온다(곧바로 오지 않는다). 보상을 보상으로 생각하는 깨달음도 느리게 온다. 정규교육 과정에서 해야 하는 공부뿐만 아니라 사교육에서까지 이어지는 물량공세에 지친 학생들에게 책은 놀이가 될 수 없다. 책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울 것이다. 공부할 것도 많은데 공부에 상관없어 보이는 것을 쉬고 노는 시간에 머리 아파해가면서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책은 참된 앎을 알려주는 지식과 지혜의 보고가 아니라 이상한 아이들의 괴상한 취미, 책덕후들의 전유물일 지도 모르겠다(적어도 일부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책읽기 어려운 사회라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사회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얘기하면 발끈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한다, 네가 말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공자왈, 맹자왈만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반문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동의한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을 한다. 중요한 건 생각의 내용이고 형식이다. 점심에 뭐 먹을지 생각하는 건 생각인 건 맞지만 동물적 본능에 의한 자연적 행위이므로 생각이라 부르기에 민망한 부분이 없지 않다. 매우 저차원적인 생각이란 뜻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앎, 플라톤의 이데아를 생각한다고 해서 고차원적 생각을 한다고 장담할 순 없다. 무지의 앎과 이데아가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실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으면 그 개념을 모르는 상태와 차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름만 알고 있는 상태를 개념을 이해했다는 것과 혼동한다면 개념의 이름조차 모르는 상황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름만 아는 사람은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수동적으로 개념을 암기하는 데 그친다면 사유라고 보기 힘들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생각을 창조해냈을 때, 자기의 생각을 주체적으로 생산해냈을 때 진정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Dasein이든 Ubermensch이든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야만 사유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기존의 앎과 다른 차이를 생산했을 때 사유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사유는 생각보다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하는 사람은 사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만의 '생활하는 자는 창조할 수 없다'는 명제와 공명하는 이 명제는 사유의 본질 중 하나가 배타성이란 걸 암시한다. 생각하는 자만이 생각한다, 사유는 고독한 작업이라는 하이데거의 말(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영화 '한나 아렌트'에서 본 장면이라 실제로 똑같은 말을 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하이데거의 사상을 토대로 비춰봤을 때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된다)도 일맥상통한다. 

 

 사유하는 사람들은 왜 사유하는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진정한 앎에 이르기 위해서일 것이다.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플라톤주의자도 있겠지만 사회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통념(bon sens)과 인식 자체의 상투성에 의해 가려진 상대적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사유하지 않는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자기 인생의 주인-주체로서 삶을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진실하고 정직한 삶-한마디로 그리스 시대에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뜻하는 '좋은 삶eu zen'을 향한 욕망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상태, 삶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정신적이고 고차원적인 의미를 추구하고 싶은 욕망이 싹트지 '의미의 질병'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배부르지도 않고 등도 차갑지만 의미를 추구했던 사람이 인류 역사상 비일비재했고, 그들에 의해 역사가 진보했다고. 맞다. 석가와 소크라테스는 각각 왕족, 귀족 출신이긴 했지만 공자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일반인이었고, 예수는 천한 신분이었다. 그들은 배고픈 상황에서도 사유를 했을 것이다. 가난의 탈출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고, 의미 있는 삶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에 후세에 성인이라 불릴 만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태어나지 않은 석가, 소크라테스 역시 자발적으로 가난해졌기 때문에 당대에 잘 나가는 철학자 정도에 머물지 않고 현재 인류에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류의 정신적 스승으로 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얘기는 뒤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고, 정리하자면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좋은 삶을 향한 욕망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 또 사유하지 않으면 좋은 삶을 향한 욕망이 배태되기 힘들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읽기 힘든 시대 - 사유하기 힘든 시대라는 규정에서 먹고 살기 힘든 시대라는 규정을 끌어낼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4대 성인이 살았던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엄청나게 풍요로워졌는데 먹고 살기 힘든 시대라니. 한국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이 들으면 뒤로 넘어갈 만한 이야기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의 공과를 높이 사는 이가 들으면 빨갱이의 선동질이라고 욕 먹을 만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심심찮게 생존권 자체를 위협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사를 통해 꽤 자주 접하고 있다. 용산 사태,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밀양 송전탑, 강정 해군기지, 세월호 등등 우리는 하루아침에 평범한 노동자에서 임금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파업하는 종북좌빨 노조가 되고, 불타는 망루, 고공크레인에서 공권력에 의해 처리되는 '범법자'가 되고, 진정한 애도가 '금지된' 세월호가 된다(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는 진단은 현대사회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라는 조르조 아감벤의 진단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아감벤이 지적했던 대로 예외상태가 일상이 된 모습이다.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사회에서 제시하는 삶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된다. 커트 라인cut-line. 시민과 비-시민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의미를 추구하는 좋은 삶(eu zen, bios)과 동물적 생존을 의미하는 삶(zen, zoe)의 경계가 끊임없이 이동하며 누군가를 삶에서 배제시키고 있는데 이런 사회에서 삶이 보장되지 않은 일반인이 취직에 도움이 안 되는 철학공부를 한다는 건 하나의 모험이다. 부모가 어느 정도 학비를 지원해줄 수 있는 경우라면 정말 철학에만 용맹정진해 교수가 되든 연구원이 되든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알바해 가면서 학비를 벌어야 하는 경우에 대학졸업 후에 대학원 진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데까지 드는 시간, 돈을 감안하면 철학공부는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제도권 철학만은 철학행위에 한정한다고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학생의 경우 대학교에서 좋은 학점을 받고, 스펙을 쌓아야 하는데 사유할 여유가 있을까 의심된다. 학교수업에서는 교수에게 비판적인의견을 제시했을 때 좋은 학점을 받기가 쉽지 않아(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1189.html) 수용적 사고-암기식 공부에 그칠 텐데 이런 환경에서 사유는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돈벌이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유,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학생 시절 전부를 좋은 점수, 좋은 대학, 좋은 학점에 볼모로 잡혀 노예로 살게 만드는 나라에서 100권의 책 읽는 시민이 나오기조차 힘든 것이다. 사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급해지기를 강요한다. 여유가 없다. 학교의 어원인 schole가 여유라는 점은 의미심장한데 여유가 없으면 사유하는 습관이 만들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생각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했는데 지금부터는 공부로 초점을 조금 옮길까 한다.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람들은 공부를 싫어할까? 올해 들어 공부를 싫어한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왜 그들은 공부를 싫어하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억지로 시켰기 때문에 공부=스트레스=억지로 해야하는 것의 등식이 생겼을 것이다. 그것은 공부를 단지 질문-놀이(하고 싶다)의 형식이 아닌 명령-필연의 형식으로만 접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왜 하니? 선생님이 시켜서요. 대학 가려고요. 대학은 왜 가니? 취직하려고요. 선생님-부모님이 가라고 해서요. 안 가면 차별받는다고 해서요. 안 가면 임금이 대졸자에 비해 낮아서요. 그냥요... 나는 이런 식의 억지공부가 니체가 비판한 기독교와 비슷한 맥락이라 이해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삶의 의미를 현실의 인생이 아닌 내세에서의 구원에서 찾았듯 억지공부에서 공부의 의미는 자기의 발전이나 변화가 아닌 사회제도의 편입 및 적응에 있다. 자신의 주체적 의지는 사라지고 노예 같이 복종하는 태도만 강화된다는 점에서도 일맥상통한다. 니체는 능동active과 반동reactive의 차이를 강조했고, 소박하게 말하면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복eudaimonia과 행복을 위해 수단이 되는 행동의 구분은 서양철학의 시원부터 지금까지 계속 양태를 바꾸며 이어져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가장 일상적인 용어로 치환하면 해야 한다sollen의 현실과 하고 싶다sein의 이상의 대립이 될 것이다. 결국 한마디로 자유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나는 자유로운 인간인가, 아닌가.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아닌가. 우리는 한 번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왜 자유로워야 하는가, 자유로우면 뭐가 좋은가. 

 

 나는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나는 왜 취업하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가, 내가 정말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하다 보니까 관성적으로 하고 있는 걸까, 인문학을 공부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가, 만약 내가 인문학공부를 좋아해서 한 번의 긍정이 이뤄졌다면 거기서 어떤 결과물이 주어져도 받아들일 수 있는 두번의 긍정, 긍정의 긍정이 이뤄졌는가, 한 번밖에 없는 순간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게끔 긍정하며,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별로 내키지 않지만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조금 해야할 것 같다.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읽고 쓰게 된 건 고등학교 때부터이다. 그 전에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고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책 읽으면 인생에 도움이 된다' 수준의 인식에서 독서와 글쓰기는 축구나 게임보다 낮은 수준의 취미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했고(중학교 때도 학원에 비슷한 시간까지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학교 끝나고 학원가는 시간까지의 '자유'시간을 제외하면 결과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지만) 무엇보다 수능, 입시를 위한 맹목적 공부의 이데올로기를 주입당했다. 나는 거기에 일정 수준의 반감과 부조리를 느꼈고 어쩌다가 세계문학전집을 읽게 되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 권을 읽어버린 나는 다른 한 권을 읽고 있었고, 이 연쇄작용은 쉼 없이 계속되었다(사사키 아타루 식으로 말하면 책을 읽어버린 것이다). 단, 지금 생각해보면 이 시절 나의 한계는 책읽기에 대한 긍정이 한 번에 그쳤다는 것이다. 입시교육 대신 책읽기를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에 학교가 아닌 집에서 독서가 잘 이뤄지지 못했다. 책은 읽어야 겠는데 책도 내용이 어려우면 지루하고 머리 아프니까 게임이나 TV에 우선순위가 밀리곤 했다. 내게 맞는 독서리스트를 갖지 못한 것도 큰 약점이었는데 학교에서 나눠준 독서기록장에 나와 있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고전 100선에 나오는 책들을 읽으려고 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스피노자의 에티카,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아스, 단테의 신곡(지옥, 연옥, 천국 모두 다!), 맑스의 자본론(1 - 2의 초반까지 읽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7권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생각이다) 같은 책들은 글자를 읽었을 뿐 내용을 읽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해를 거의 하지 못했다. 한 번 펼친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오기 때문에 이해도 안 되는 책들을 끙끙거리며 벌 받듯 읽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런 책들만 읽은 것은 아니여서 세계문학전집과 스테디셀러들-황광우의 철학콘서트,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 김용규의 문학카페에서 철학읽기 등은 굉장히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에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책을 읽었던 얘들과의 격차를 좁히려면 쉽고 재밌는 책이 아니라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 이는 휴학을 했던 작년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하루 10시간,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들이 평균적으로 이 정도는 공부한 것으로 미루어 나도 일단 그 시간을 '채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책은 평소보다 많이 읽었을지 모르지만 삶의 질은 굉장히 낮아졌고, 내가 좀 더 좋은 삶을 살자고 하는 짓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자기소외'를 경험하면서 근본적으로 앞의 질문을 묻게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이 상태로는 인문학에 아무리 길이 있고, 인생의 의미와 존엄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게 된 주제들이 있다. 양과 질, 능동과 수동(하고 싶다sein과 해야 한다sollen), 즐거움樂, 제도권 인문학, 저항[반항]으로서의 공부-놀이로서의 공부[즐거운 학문].

 

1. 양과 질. 이 주제는 고등학교 때 했던 '계산'부터 이어져왔지만 작년에서야 비로서 비판적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양은 자신이 하는 행동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인데 이 양 자체를 목적으로 하면 자기소외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기소외란 표현은 당연히 맑스를 염두에 두고 쓴 표현인데 마치 시간을 자본처럼 무조건적으로 증가시키려다 보면 시간은 사물화된 시간이 되고, 이 사물화된 시간을 살고 있는 존재자는 살아 있는 지성의 창발적 활동이 아닌 기계화, 사물화된 노동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2. 제도권 인문학. 이는 제도권과 깊이 관련 있다. 결국 기준을 자기 자신이 아닌 남들에 둔다는 것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편이고, 경쟁의 승리의 목적은 제도권으로의 편입이다. 단순히 생각해서 다른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연구하는 사람과 연구만 하는 사람의 차이는 불 보듯 뻔한 것이기 때문에 제도권으로의 편입을 욕심내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뚜렷한 탐구의식, 능동적 탐구태도가 결여된 형태라면 결국 나의 좋은 삶을 위한 공부가 아닌 연구를 남들보다 많이 해 업적을 세우려는 명예욕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결국 자신과 공동체를 위한 학문탐구가 아니라 제도권에서 요구하는 업적을 쌓기 위한 수동적 노동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사람이 학계에서 권력을 갖게 되면 자신의 노예근성을 후학들에게까지 강요하는 악순환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3. 능동과 수동. 결국 능동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방법은 무엇인가. 이는 앞서 공부에 대한 원한(ressentiment)을 품게 된 사람에 대한 논의와도 연결될 것이다. 그들이 원한을 갖게 된 이유는 앞서 얘기했듯 왜 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기를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 속에서 즐거움이 됐든, 부모님-선생님 타인의 칭찬이 됐든, 지적 충만감이 됐든 뭔가를 생산해낸 사람은 괜찮고, 결국 자신이 공부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지만 아무 것도 생산해내지 못한 사람은 원한만을 생산하게 된다. 이 원한이 사람을 죽을 때까지 공부하지 않게 만드는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질병이다. 공부는 나와 안 맞는 것, 나는 공부 못하는 사람, 이런 잘못된 자기진단까지 겹쳐지게 되면 공부와 그 사람 사이에 만리장성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타인의존적인 칭찬을 제외하고 자아독립적 즐거움, 지적 충만감이 어떻게 생기는지 살펴보면 능동성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뭔가를 새로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끼긴 쉽지 않은 것 같다. 룩셈부르크의 수도가 룩셈부르크라는 사실을 알기 전의 '나'와 알게 된 후의 '나'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뭔가 차이가 생산되었을 때 즐거움, 지적 충만감은 발생한다. 이를 테면 'Hi'를 알게 되면 외국인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게 되고, 이 차이가 영어공부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따라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행복이라 본다면(이때 행복은 오늘날 미국식 행복학이나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엔돌핀 운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사회-정치적 삶의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공부는 자신이 품고 있는 질문에 해답 혹은 새로운 질문을 던져주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사회에 실현시켜줄 수 있을 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호기심이란 능동적 의지의 원천을 촉촉하게 유지할 것, 그 앎을 사회에 실현함으로써 더 큰 앎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낼 것, 공부 속에서 낮은 차원의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높은 차원의 행복eudaimonia가 있음을 느낄 것. 이것이 능동적 공부를 위한 핵심이 아닐까 싶다.


4. 저항으로서의 공부-놀이로서의 공부. 나는 높은 차원의 행복에 대한 의식은 고등학교 때부터 있었다.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저항,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 대학진학-취직-결혼-마이카-집-... 남들이 말하는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 고차원적 의미추구에 대한 의지... 하지만 이것은 다시 말하지만 한 번의 긍정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저항해야 할 적이 사라지면 이런 의지도 사라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또 그런 고차원적인 의미에 대한 의지가 실존적 차원에서 내재화, 나의 욕망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불완전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의지들은 중2병적인 심각함과 입시제도의 폭력성이 빚어낸 환상일 뿐 실재가 아니었다. 그것이 실재적 차원에서 나의 욕망이 되려면 내게 즐거움樂을 줘야 했다. 그 즐거움은 앞서 능동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고 생각한다. 

 대신 앞서 언급했던 4대성인의 가난이란 주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배부르고 등 따듯한 여유가 있어야 사유하는 습관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해놓고, 또 가난했기 때문에 보편적 진리에 이를 수 있었다는 주장은 얼핏 보면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사유의 출발 조건이라면, 가난은 보편적 진리를 사유하는 존재자의 존재태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편적 진리를 무엇을 뜻하는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지만 이는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과 동떨어졌을 뿐더러 내가 다룰 수 있는 역량도 안 되기 때문에 정말 소박하게 이렇게 정의내려본다.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옳은 것. 예수가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재물들이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켜줬더라면 무조건적인 무한한 사랑을 꿈꿀 수나 있었을까? 설사 생각했더라도 실천할 수 있었을까?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어떤 물질적 이해관계에도 구애받지 않고 순수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사유-학문을 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에 비해 사유의 치열함과 절실함이 부족할 것이고, 설사 치열하고 절실하게 사유했더라도 그렇게 만들어진 사상은 생기 없는 논리적인 축조물이 아니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몸과 정신이 별개가 아니라 사유하는 몸-몸이 하는 사유,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면 자발적 가난은 풍성한 사유의 잉태를 위한 전제조건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사유 와 윤리의 긴밀한 내적 관계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당연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윤리적인 것'을 대상으로 놓고 주체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가 사유하는 주체성에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유를 치열하고, 처절하고, 절실하게, 진실하게 한다면 사유의 옷을 입기 위해 다른 옷들을 벗어던지게 되지 않을까?  

 

 나는 즐거운 학문을 할 수 있으면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 속에서만 인생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공부의 범위를 책이나 학술적인 지식의 습득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고 본다면, 세상을 한 권의 책이라 생각하고 거기서 뭔가를 배워 나를 바꿔나가는 과정을 공부라고 본다면 나는 감히 공부 속에서만 인생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상태도 뭔가를 채우지 않고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으려면 매순간 배워야 하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공부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공부의 존재론이 결국 들뢰즈의 과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에 푸코가 쓴 서문의 제목처럼 "비-파시스트적 삶"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진학-취직-결혼-마이카-집... 이것들은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일 뿐인데, 이것들이 우리를 소외시키고 좀먹고 있다.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들은 이것이 저항한다고 해서 바뀔 거란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딴 짓'하지 않고 재빠르게 체제에 순응, 적응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체제에서 낙오돼 삶의 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 폭력의 굴레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두 가지다. 인간의 말을 할 것이다. 춤을 출 것이다. 나는 춤을 언어로 번역하면 발터 베냐민이 말하는 '문자의 사슬을 끊고 나오는 해방된 산문'이 될 거라 믿는다. 그리고 이 해방된 산문이 곧 인간의 말, 인간이 그려내는 무늬人文라 믿는다. 내가 그리는 무늬에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느껴줄지, 내가 건네는 친구의 요청에 사람들이 화답해줄 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정말 내가 하는 말이 인간의 말에 가까워진다면, 또 진정으로 춤을 술 수 있다면 이미 나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이 해방된 산문과 춤에는 파울 클레의 묘비명대로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꿈꾸고, 그들의 꿈 속에서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해방된 산문이 결국 인간을 해방시켜 줄 거라는 믿음까지도 믿는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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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번 시간 프랑스혁명 최고의 발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한 적이 있다. 근대의 최고의 발명은 개인. 신에 종속된 중세적 인간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의 탄생. 하지만 '나는 자유인이다' 선언이 곧바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 자유와 부자유는 변증법적 관계 속에 있어 진정한 자유는 변증법의 그물, 사슬을 뚫고 나왔을 때 가능한 무엇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유명한 프로이트의 친부 살해 모티브를 생각해볼 수 있다. 금기를 선언했던 아버지가 죽고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금지되는 역설. 자유는 억압-부자유와의 긴장 속에서 부자유를 지양하면서 얻어지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절대적 자유는 존재하는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지에 대해선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정확한 예시는 아니겠으나 이런 예시를 들어보고 싶다. 우리는 일상의 굴레를 불편해, 답답해하면서도 한편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김수환 교수의 <책에 따라 살기> 북콘서트에서 들은 말이 있다. 정혜윤 PD는 '저녁이 있는 삶'이 실시되고 실제로 어떤 저녁들이 있는지 관찰하기 위해 인터뷰를 실시했는데 노동자들에게서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무엇을 해야할 지 몰라 TV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업무시간이 줄어들어 그에 따른 수입감소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개인에게 무한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비하지 않고 살 수 없게 만드는 소비사회의 자유의 역설처럼 우리에겐 상대적 자유만 가능한 지도 모르겠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절대적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려나? 그것도 죽음이란 안티테제를 지양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는 자유라면 절대적이라 보기 힘들 지도 모르겠다.

 

 문화는 자연의 인간화이다. 인간이 더 잘 살기 위해 만든 문화는 동시에 인간을 억압한다. 김진영 선생님은 여성과 결혼을 보면 전근대 사회인지, 근대 사회인지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결혼은 하나의 사회제도일 뿐인데, 성인남성/여성은 결혼을 해 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인식이 넓고 깊게 퍼지고, 일종의 정상적 원형으로 제시되면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뭔가 결함이 있는 것으로,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폭력적 인식을 형성한다.

 자연을 극복하고, 인간화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오디세우스를 꼽았다. 이는 엄기호의 <단속사회> 에필로그에서도 다른 관점으로 흥미롭게 다뤄진 바 있다. '꾀돌이' 오디세우스. 이전의 항해자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이를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건너갔다'(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 오디세우스는 지혜로운, 이성적인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를 어떻게 통과했던가? 그의 묘안은 기둥에 몸을 묶는 것이었다. 대신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았으나 자신만은 세이렌의 천상의 노래를 향유했다. 노래를 듣되 노래를 듣고 바다에 빠져 죽지 않도록 육체만 속박하면 된다는 발상이었다. 이를 이성/자연(육체)의 분리라고 보았다. '나'와 '내 몸'의 분리. 선생님은 성형수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육체와 정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육체에 칼을 대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묶어둔 몸은 어디 있는가. 그곳에 남겨져 있다. 정신은 건너왔지만 몸은 건너오지 못하고 남겨져 있다. 이 두고 온 것, 배제된 것은 멜랑콜리적인 것이 되고, 반드시 회귀한다. 몸은 땅속에 묻혔으나 혼은 구천을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원혼의 유령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영적인 종교인이거나 예술가이다. 작년에 어느 소설가는 우리에게 광주의 혼들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소년이 온다>. 한강 소설가는 어느 팟캐스트에 출연해 자신이 쓴 소설 중에 가장 밝았던 <희랍어 시간>을 탈고한 후 '빛나는' 밝은 소설은 소설을 쓰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에게 광주는 하나의 원체험으로 남아 광주를 온전히 애도하고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에 대한 근원적 불신을 해소할 수 없으리란 결론에 도달해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게 됐다고 했다. 혼들을 제 몸으로 불러들이는 작업, 혼들에게 제 몸을 빌려주는 초월로 넘어가지 않고, 혼들과 대화하면서 '살아남은 자'로서 고백하는 작업, 두고 온 아이의 노래를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작업, <소년이 온다>를 2014년의 책으로 선정하게 된 데에는 광주의 혼들뿐만 아니라 아직 진도 바다에 가라앉아 있는 세월호의 원령들에 대한 미완의 애도, 아니 어쩌면 시작조차 되지 않은 애도의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진리를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적었는데 적어도 근대사회에서 진리와 동일시되었던 이성은 과연 인류를 자유롭게 했는가? 아도르노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변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황지우 시인이 적었듯 '끔찍한 모더니티'는 변형을 거듭해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호명되고 있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생존 자체, 국민의 생명 자체가 통치대상이 된 '생명관리정치'의 시대를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멜랑콜리를 우리는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지난 시간에 잠깐잠깐 언급됐던 수전 손택이 좀 더 전면에 등장했다. '캠프'로 대변되는 문화운동의 탈정치성, 도피주의적 성격을 비판했는데 손택이 근대에게 무엇을 본 것일까. 모던의 태도는 심각함, 진지함, 깊이로 요약된다. 헤겔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치밀한 시스템의 철학. 루마니아 출신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어느 저서에서(독설의 팡세 혹은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헤겔로 대변되는 독일의 엄격한 시스템-독일정신을 비판한 적이 있다. 엘리트주의/정신주의/고급문화로 대변되는 유럽의 모던이 아닌 대중문화로 대변되는 미국의 포스트모던, '감수성의 혁명'을 이끈 수전 손택. 진지함, 심각함과 거리두기(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이성으로 사회를 총체적으로 기획하고자 했던 근대의 실패(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무거움에 대한 저항감, 무거움에 대한 참을 수 없음의 감각을 체득했을 지도 모르겠다.

 

 베냐민이 다룬 '군주의 우울'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궁중에 필수적인 존재가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바보-광대(내시)이다. 군주-권력자에겐 그가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꼭두각시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인형. 인간-장난감. 광대는 우울하지 않은, 우울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웃음을 주는 존재이자 웃음 자체이다. 우울한 군주는 웃긴 광대를 보면서 우월성을 느낀다. '천박한 것들은 우울할 줄 몰라' 멜랑콜리는 귀족의 특권적 질병이며 노동자들은 가질 수조차 없는 계급적인 것이라는 설명을 상기했다(지금은 맥락이 달라졌지만). 공부를 하면 점점 더 우울해진다는(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 설명 또한 떠올랐다.

 

 '쯧쯧쯧.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줄도 모르고 희희덕거리고 있는 꼴이 말이 아니로구나. 땅에 머리를 처박고 위험을 벗어나려는 타조처럼 무식하고, 무지한 사람들. 다 같이 공부하면 될 텐데 왜 공부를 안 할까... 공부를 안 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데 언제 당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어진 거짓평화에 안주하는 꼴하곤. 그늘 없음. 깊이 없음. 표면적 광택. 천박한 치장.'

 위악적으로 적었으나 멜랑콜리커는 세계를 비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며, 멜랑콜리의 자리에서 냉소적 우월성을 향유한다. 멜랑콜리는 어떤 '진실'이기 때문에 멜랑콜리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은 허위로 보이게 된다. 슬픔에 빠졌을 때 세상이 슬프게 보이고,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이 연극처럼 낯설게 보이는 것처럼. 황현산 평론가는 트위터에서 페미니스트를 혐오한다는 IS 김군을 여성과의 관계에서의 좌절/열등감이 여성혐오라는 매우 병들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멜랑콜리도 언제든지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유될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찬호 교수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차별에 찬성하는 이들을 이런 경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보상심리랄까? 자신의 고통, 멜랑콜리에 대한 감정적 보상을 받기 위해 자기보다 뒤처진, 낮은 이들을 경멸하고, 차별함으로써 향유하는 냉소적 우월성. 하지만 오찬호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들의 차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있으며, 거기에 불안함,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 야만적 차별게임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파괴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 폴 발레리. 작시를 그만두고 그가 책도 없고 책상과 의자만 있는 공간에서 몰두했던 질문('책은 다 우둔한 것들입니다. 나의 장점은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고통은 육체에서 온다. 육체를 가지면 고통스럽고, 따라서 멜랑콜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 순수한 정신. 멜랑콜리에 오염되지 않은 정신의 유토피아에 은거한 무슈 Teste - 발레리. 치명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관절염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에 쓴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살려고 애써야 한다)' 구절이 다르게 다가왔다.(그런데 왜 발레리의 책들은 국내에 번역이 안 되는 것인가... 문학동네 팟캐스트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황현산 평론가에게 부탁했던 것처럼 누가 번역 좀 해주시면 좋으련만. 일단은 황현산 역의 랭보를 기다려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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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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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인문학부의 통폐합 및 '인문학의 위기'가 가속화되면서 학교 바깥으로 인문학 강연들이 이뤄지고 있다. 대안연구공동체, 철학아카데미, 다중지성의 정원, 수유너머, 아트앤스터디(인문숲)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이 정도 된다. 비서울권 지역에선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서울 지역에선 도서관을 거점으로 인문학 특강, 저자 강연 등을 열기도 하고(정독도서관에서 특히 더 그런 것 같고, 마포도서관에서 한길그레이트북스 같이 읽는 모임도 페이스북을 통해 봤다) 서울의 인문학 단체들이 지역공동체를 찾아 교육격차를 해소하려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플라톤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인문학 특강은 자리가 없을 정도라고 하니 겉으로 보기에 인문학의 수요-공급은 풍요로워보일 정도이다. 적어도 양적 측면에서는. 혹은 양적 측면에서만. 최근에 읽은 황현산 평론가의 칼럼을 보면(아마 경향신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 대학에서 HK연구교수 제도 등을 통해 논문을 양산해내고 양적으로는 인문학이 풍요로워보일지 몰라도, 그에 따른 질적 성장도 이뤘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주신다. 국제학술지(특히 미국의 유명한 학술지)에 논문이 올라야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관습과 더불어 인문학 분야에서도 영어로 논문쓰기를 요구(강요)하고 있는 판국이라 모국어로 사유해야 하는 인문학이 깊은 뿌리를 내리기 힘든 상황이라는 이야기였다(<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제국의 언어-학술어'인 영어, 최소한 독일어로 논문을 써야지, 그것도 안 되면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써야 한다는 웃픈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실력 있는 인문학자를 길러내는 일은 유능한 엔지니어/기술자를 길러내는 것보다 힘든 일이라고 한다. 직업상의 위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문학적 지식, 역량을 전문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르기까지 다른 분야에 비해 더 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는 과학자나 예술가에게도 통용된다. 기능적이고 실용적이고 즉각적으로 쓸모를 제공하는 '유용성'과 멀리 있는 작업들. 그래서 남들보다 좀 더 외롭고 쓸쓸하지만, 어쩌면 좀 더 높은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한마디로 인문학자는 학원에서 단기 6개월 코스를 착실히 밟는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눈에 보이는 수치로 성과를 환원해 평가하고 지원금을 줄지 말지 결정하는 '조급한' 사회에서 인문학에는 잉여의 딱지가 붙는다. 내가 잉여라니. '괜찮은' '그럴싸해 보이는' '그럴 듯한' 직업에 '지원'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스펙을 생각하면 인문학은 내게 가장 많은 주고 남기지만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대기업에서 인문학을 스펙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말도 들려오기 하지만 거기서 인문학적인 것, 인문학의 본질을 요구할 것 같진 않다. 스펙으로서 인문학(스펙이 군사무기를 설명하는 용어였다고 하니 인문학을 들고 취업(전쟁)시장에 뛰어드는 건 자살행위?!). 책을 읽고 자유의 의미에 한층 다가섰다고 해서 그 자유가 즉각적으로 실현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최소한의 물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을지-한마디로 밥 굶지 않고 살 수 있을지 걱정되는 날이면 부자 부모님에게 용돈 타가면서 문학하고, 학문했던 이전 세기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물론 개중에는 베냐민처럼 가난에 시달렸던 사람도 적지 않으리라).    어쨌든 시민/대중인문학이 확산되면서 여러 곳에서 강의를 들었는데 길어도 8강(8주)이어서 깊이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았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 강의만 듣고 해산하다 보니 친구를 사귀기도 힘든 환경이었다. 그나마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임은 경복궁 맞은편에 위치한 <시민행성>에서 진행하고 있는 문학 세미나이다. 작년에는 세계문학 세미나로 2주에 한 번씩 8번, 16주 동안 카프카, 보르헤스, 체홉을 다뤘고 올해에는 한국현대시 세미나로 개편해 황동규, 최승자, 이성복, 황지우 등을 읽어나가고 있다. 띄엄띄엄 읽었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작년 여름에 매봉 역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스페이스 공감 공연을 보러 가면서, 보고 나서 역에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날카롭게 찔리고(punctum) 베이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래서 뒹구는돌, 뒹구는돌 하는구나 했더랬다. 그런데 겨울에 작가세계 김우창 특집호에서 문광훈 교수의 김우창론에서 제2회 김수영문학상 심사평에서 뒹구는돌에 대한 비판적 비평적 견해를 접하면서 '아, 보기에 따라선 이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 이게 소위 말하는 주례사 비평과는 다른 Kritik이구나 했다. 그리고 2월 15일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같이 읽었다. 돌아가면서 같이 읽어보고 싶은 시를 낭독하고, 낭독이 끝난 후 시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내가 염두해둔 시는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였으나 다른 분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바람에 코멘트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이분의 코멘트에서 공감했던 부분은 나누고 싶어 여기 옮겨둔다. 


 이 시에서 어딘가 뭉개진 것들이 나온다.  


뭉개진, 문드러진, 흘러내리고 있는 기형의 존재들. 


희생자들은 곳곳에 녹아 흘렀다(눈)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맑은 물 /흐르고/ 흐르는 물따라/ 불구의 팔다리가/흐르는 곳으로/갈 수 있을까(다시, 정든 유곽에서)

내 노래를 주르르 흘러 내리기도 하였다(처형)

나는 너의 방이었다/(...)/풀밭 옆으로 숨죽여 흐르는 냇물이었다(세월에 대하여)

그의 목소리와 웃음과 눈짓은 흘러 내린다 집과 나무와 /전봇대도 흘러 내린다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이도/흘러 내린다 (기억에 대하여)

내 사지는 못 박혀 고름 흘려요(사랑일기)

시간은 모래 언덕처럼 흘러내렸다(모래내-1978년)


 왜 이렇게 흐르고 흘러 내리는가? 현실의 단단한 지반이, 육체의 유기적 조직이 무너지고 해체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무의식 깊숙이 폭력이 각인된 이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디가 고장나 문둥병 환자처럼 살이 썩어 녹아내리고, 인간이 벌거벗은 생명Homo sacer-고기'덩어리'로 소시지처럼 흐르는 풍경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이렇게 자동적으로 살아지는 생명-기계에 반발하고 저항하기 위해 시인에게 '깨어남'이 중요했을 것이다. 잠든 세상에서(몸은 녹슬은 기계, 즐거움에 괴로움 섞어/잠을 만드는 기계), 잠들길 강요하는 세상에서 꺠어있기 위한 발악으로 시인은 고통을 민감하고 섬세하게 감각하고 증폭시키는 하나의 증상/징후가 되길 거부하지 않았다(아픈 것들의 아픔으로 네가 갈 때까지/네 혓바닥은 괴로움의 혓바닥이요 네 손바닥은 병든 나무의 나뭇잎이요). 


시인의 독백처럼 들리는 구절


<여러 번 흔들어도 깨지 않는 잠, 나는 잠이었다

자면서 고통과 불행의 정당성을 밝혀 냈고 반복법과

기다림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날렸다>  


이전 시간에 다룬 최승자와 맞닿은 부분도 많이 발견되었다. 잠자고 있는 세상, 꿈꾸는 시인. 이 꿈은 현실 너머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낭만주의적 꿈이라기보다 냉엄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세계로 침잠하는 뉘앙스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깨어나지 않았으면' 싶은 순간이 있다. 고민일랑 다 잊어버리고 안식에 잠기고 싶은 때가... 그런데 시인이 말하지 않았는가. 망각은 삶의 죽음이라고... 그 편안함은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살아있지 않다는 가장 생생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뭉개진''흘러내림'의 이미지를 접하면서 나는 즉각적으로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를 떠올렸고, 이성복 시인이 스스로 밝힌 보들레르와 니체의 영향을 생각했다. 겉으로는 근엄하지만 속으로는 광기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처럼 그럴 듯해 보이는 현실에 내재한 광기와 고통을 드러내는 시인. '시 없이 살 수 있는가' 절실하게 묻고 또 물으며 찾아오는 시를 받아적는 기분으로 써낸 청년 이성복. 이원 시인은 시민행성에서 진행한 한 강의에서 '흘러낼 수 있는 것은 모두 흘러내리게 하지만 그것이 얼굴 너머로 넘치지 않고 붙잡고 있는 것이 베이컨의 윤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말은 '아픔은 <살아 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나 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다' '망각은 삶의 죽음이고, 아픔은 죽음의 삶이다'고 적은 이성복과 공명했다. 이 시 곳곳에서 80년대의 공기를 느낄 수 있는 현실의 갑갑함을 표현하는 '벽'이 출몰하지만 시인은 기억(대부분 한자표기)을 말한다. 


'참회의 전날 밤 무릎까지 쌓이는 표백된 기억들'(다시, 정든 유곽에서)

고개 떨구면, 누룽지 같은 기억들이 일어나고(돌아오지 않는 강) 

우리의 기억 속에 밥도 안 먹고 사는 사내. 아버지일지도 모른다//(...)우리의 기억 속에 꼼짝 않는,/ 앞머리 없는 기차(세월의 집 앞에서)

해장국 집에/ 들어갔다 선지 같은 기억들을 씹었다, 뱉았다(소풍)


 뒹.구.는.돌.은.언.제.잠.깨.는.가. 


 사산아가 태어나고, 고름이 흘러내리는 처참한 이미지을 담담한 목소리를 그려내는 시 속에서 나는 베냐민의 정지변증법을 생각한다. 대답하지 못하는 세월들이 흘러갈지라도 붙잡고 있어야 한다. 흘러내리는 덩어리를, 흐르는 세월을, 부드러운 껍질을 뚫고 새어나오는 종기의 내장 같은 질문들을. 


 우연이 스치는 질문-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번 너는 뒤돌아 보아야 했다 

(모래내-1978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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