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시간 프랑스혁명 최고의 발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한 적이 있다. 근대의 최고의 발명은 개인. 신에 종속된 중세적 인간이 아닌 자유로운 개인의 탄생. 하지만 '나는 자유인이다' 선언이 곧바로 인간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 자유와 부자유는 변증법적 관계 속에 있어 진정한 자유는 변증법의 그물, 사슬을 뚫고 나왔을 때 가능한 무엇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유명한 프로이트의 친부 살해 모티브를 생각해볼 수 있다. 금기를 선언했던 아버지가 죽고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금지되는 역설. 자유는 억압-부자유와의 긴장 속에서 부자유를 지양하면서 얻어지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절대적 자유는 존재하는가,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지에 대해선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정확한 예시는 아니겠으나 이런 예시를 들어보고 싶다. 우리는 일상의 굴레를 불편해, 답답해하면서도 한편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김수환 교수의 <책에 따라 살기> 북콘서트에서 들은 말이 있다. 정혜윤 PD는 '저녁이 있는 삶'이 실시되고 실제로 어떤 저녁들이 있는지 관찰하기 위해 인터뷰를 실시했는데 노동자들에게서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무엇을 해야할 지 몰라 TV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업무시간이 줄어들어 그에 따른 수입감소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개인에게 무한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비하지 않고 살 수 없게 만드는 소비사회의 자유의 역설처럼 우리에겐 상대적 자유만 가능한 지도 모르겠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절대적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려나? 그것도 죽음이란 안티테제를 지양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는 자유라면 절대적이라 보기 힘들 지도 모르겠다.
문화는 자연의 인간화이다. 인간이 더 잘 살기 위해 만든 문화는 동시에 인간을 억압한다. 김진영 선생님은 여성과 결혼을 보면 전근대 사회인지, 근대 사회인지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결혼은 하나의 사회제도일 뿐인데, 성인남성/여성은 결혼을 해 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인식이 넓고 깊게 퍼지고, 일종의 정상적 원형으로 제시되면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뭔가 결함이 있는 것으로,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폭력적 인식을 형성한다.
자연을 극복하고, 인간화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오디세우스를 꼽았다. 이는 엄기호의 <단속사회> 에필로그에서도 다른 관점으로 흥미롭게 다뤄진 바 있다. '꾀돌이' 오디세우스. 이전의 항해자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이를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건너갔다'(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 오디세우스는 지혜로운, 이성적인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를 어떻게 통과했던가? 그의 묘안은 기둥에 몸을 묶는 것이었다. 대신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았으나 자신만은 세이렌의 천상의 노래를 향유했다. 노래를 듣되 노래를 듣고 바다에 빠져 죽지 않도록 육체만 속박하면 된다는 발상이었다. 이를 이성/자연(육체)의 분리라고 보았다. '나'와 '내 몸'의 분리. 선생님은 성형수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육체와 정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육체에 칼을 대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 묶어둔 몸은 어디 있는가. 그곳에 남겨져 있다. 정신은 건너왔지만 몸은 건너오지 못하고 남겨져 있다. 이 두고 온 것, 배제된 것은 멜랑콜리적인 것이 되고, 반드시 회귀한다. 몸은 땅속에 묻혔으나 혼은 구천을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원혼의 유령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영적인 종교인이거나 예술가이다. 작년에 어느 소설가는 우리에게 광주의 혼들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소년이 온다>. 한강 소설가는 어느 팟캐스트에 출연해 자신이 쓴 소설 중에 가장 밝았던 <희랍어 시간>을 탈고한 후 '빛나는' 밝은 소설은 소설을 쓰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에게 광주는 하나의 원체험으로 남아 광주를 온전히 애도하고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에 대한 근원적 불신을 해소할 수 없으리란 결론에 도달해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게 됐다고 했다. 혼들을 제 몸으로 불러들이는 작업, 혼들에게 제 몸을 빌려주는 초월로 넘어가지 않고, 혼들과 대화하면서 '살아남은 자'로서 고백하는 작업, 두고 온 아이의 노래를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작업, <소년이 온다>를 2014년의 책으로 선정하게 된 데에는 광주의 혼들뿐만 아니라 아직 진도 바다에 가라앉아 있는 세월호의 원령들에 대한 미완의 애도, 아니 어쩌면 시작조차 되지 않은 애도의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진리를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적었는데 적어도 근대사회에서 진리와 동일시되었던 이성은 과연 인류를 자유롭게 했는가? 아도르노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변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황지우 시인이 적었듯 '끔찍한 모더니티'는 변형을 거듭해 '신자유주의'란 이름으로 호명되고 있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생존 자체, 국민의 생명 자체가 통치대상이 된 '생명관리정치'의 시대를 살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멜랑콜리를 우리는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지난 시간에 잠깐잠깐 언급됐던 수전 손택이 좀 더 전면에 등장했다. '캠프'로 대변되는 문화운동의 탈정치성, 도피주의적 성격을 비판했는데 손택이 근대에게 무엇을 본 것일까. 모던의 태도는 심각함, 진지함, 깊이로 요약된다. 헤겔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치밀한 시스템의 철학. 루마니아 출신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어느 저서에서(독설의 팡세 혹은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헤겔로 대변되는 독일의 엄격한 시스템-독일정신을 비판한 적이 있다. 엘리트주의/정신주의/고급문화로 대변되는 유럽의 모던이 아닌 대중문화로 대변되는 미국의 포스트모던, '감수성의 혁명'을 이끈 수전 손택. 진지함, 심각함과 거리두기(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이성으로 사회를 총체적으로 기획하고자 했던 근대의 실패(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무거움에 대한 저항감, 무거움에 대한 참을 수 없음의 감각을 체득했을 지도 모르겠다.
베냐민이 다룬 '군주의 우울'에 대한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궁중에 필수적인 존재가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바보-광대(내시)이다. 군주-권력자에겐 그가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꼭두각시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인형. 인간-장난감. 광대는 우울하지 않은, 우울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웃음을 주는 존재이자 웃음 자체이다. 우울한 군주는 웃긴 광대를 보면서 우월성을 느낀다. '천박한 것들은 우울할 줄 몰라' 멜랑콜리는 귀족의 특권적 질병이며 노동자들은 가질 수조차 없는 계급적인 것이라는 설명을 상기했다(지금은 맥락이 달라졌지만). 공부를 하면 점점 더 우울해진다는(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 설명 또한 떠올랐다.
'쯧쯧쯧.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줄도 모르고 희희덕거리고 있는 꼴이 말이 아니로구나. 땅에 머리를 처박고 위험을 벗어나려는 타조처럼 무식하고, 무지한 사람들. 다 같이 공부하면 될 텐데 왜 공부를 안 할까... 공부를 안 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데 언제 당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어진 거짓평화에 안주하는 꼴하곤. 그늘 없음. 깊이 없음. 표면적 광택. 천박한 치장.'
위악적으로 적었으나 멜랑콜리커는 세계를 비의를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며, 멜랑콜리의 자리에서 냉소적 우월성을 향유한다. 멜랑콜리는 어떤 '진실'이기 때문에 멜랑콜리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은 허위로 보이게 된다. 슬픔에 빠졌을 때 세상이 슬프게 보이고,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이 연극처럼 낯설게 보이는 것처럼. 황현산 평론가는 트위터에서 페미니스트를 혐오한다는 IS 김군을 여성과의 관계에서의 좌절/열등감이 여성혐오라는 매우 병들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멜랑콜리도 언제든지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유될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찬호 교수가 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차별에 찬성하는 이들을 이런 경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보상심리랄까? 자신의 고통, 멜랑콜리에 대한 감정적 보상을 받기 위해 자기보다 뒤처진, 낮은 이들을 경멸하고, 차별함으로써 향유하는 냉소적 우월성. 하지만 오찬호 교수가 지적했듯이 이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들의 차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있으며, 거기에 불안함,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 야만적 차별게임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파괴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 폴 발레리. 작시를 그만두고 그가 책도 없고 책상과 의자만 있는 공간에서 몰두했던 질문('책은 다 우둔한 것들입니다. 나의 장점은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고통은 육체에서 온다. 육체를 가지면 고통스럽고, 따라서 멜랑콜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 순수한 정신. 멜랑콜리에 오염되지 않은 정신의 유토피아에 은거한 무슈 Teste - 발레리. 치명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관절염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에 쓴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살려고 애써야 한다)' 구절이 다르게 다가왔다.(그런데 왜 발레리의 책들은 국내에 번역이 안 되는 것인가... 문학동네 팟캐스트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황현산 평론가에게 부탁했던 것처럼 누가 번역 좀 해주시면 좋으련만. 일단은 황현산 역의 랭보를 기다려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