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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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확실성, 말조차 금지된 슬픔을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

 

읽기 시작하니 호흡이 잦아들었다. 부친과 사별한 지 수개월 만에, 숙부도 갑작스럽게 떠나셨다. 모든 것을 받아 들여야 하는 현실의 시간 속에서,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심연의 시간이 어긋난 채로 흐른다.

 

삶과 죽음이 실은 양면의 가진 한 장의 종이일 뿐이라거나, 죽음은 실은 이러저러한 경험이라는 평생 배운 모든 철학적 숙고가 현실의 사별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 특별한 상실은 영원히 새겨진 상흔처럼 뜨겁고 쓰라렸다.



 

알게 되면 이 사실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아직 십대인 아이들을 양육한 책임을 진 상주로서,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반복되는 지옥 같은 일상을 담담히 이어가야하는데, 정신은 불러도 대답 없는 부친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해, 표표히 대기 중으로 날아갈 듯했다.

 

누군가 말리기 전까지 잠든 부친을 깨우려했던 무용한 몸짓처럼, 애도의 시간은 현실만이 아닌 시공간을 부유하며, 때론 잠든 밤 어두운 물 밑바닥으로, 때론 눈부신 한낮의 부연 대기 속으로 망상과 같은 되돌린 방법을 찾아 헤맸다.





 

불행한 영혼이 둘이냐, 하나냐의 문제였다.”

 

종이책은, 이토록 담담하고 차분하게 구원과 수치심과 안도감과 두통을 하나하나 다시 맛보고 헤어지게 하는, 이야기가 담긴 종이책은, 꽉 잡고 읽을 수 있다는 물성으로 위로가 되고, 외면과 망각이 아닌 마주봄으로 통증을 덜어낸다.

 

다가올 나이에 맞게 삶이 늘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

 

납작한 직선이 아니고 간명하지 않아서, 문장들의 틈새에서 울다 쉬다 하소연도 위로 받았다. 기억하는 모든 사랑과 후회를 담고, 한 시간씩 산책을 하며 뻐근한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작품도 있구나, 놀랍고 고맙다.

 

내가 더 가까운 혈육이라서 내 슬픔이 더 크다고 여겼는데, 함께 한 산책길에, 매일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한 큰 아이에게 이 책을 건네주고 싶다. 네가 찾은 길은 나와 다를 지라도 도착까지 덜어낸 슬픔은 비슷할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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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의 심리학 - 예술 작품을 볼 때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오성주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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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많지만, 그림을 보고 그처럼 격동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누가 처음 한 말인지 모르나, 어린 시절 이런 내용의 얘기를 듣고, 예술 감상을 위해서는 공부가 필수라고 믿어왔다.

 

열정적인 학습자는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예술 교양서를 읽었고, 그만 봐도 되겠다 싶게 자주 본 전시 주제나 예술가들도 생겼다. 그럼에도 매번 도슨트에게 배우는 게 많으니, 여전히 관련 지식은 적고 감상방식도 얄팍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참여형 현대예술만 재밌기도 했다.

 

더러 잊고 살고 대개는 그런 감상을 할 시간조차 없이 살다가 이 책을 만나 덥석 반갑다. 흔히 예술작품을 대상으로 두고 감상법을 설명하는 시점이 아니라, “본다는 것을 통해 느낀다는 것을 설명하는 소재가 예술이라 더 좋다.



 

설레며 기대한대로 전형적인(?) 과학적 설명과 분석을 객관적 조건으로 삼아 확장하는 설명 방식이라 아주 재밌다. 대상, 자극, 정보 수용, 능동적 해석인 감상이 몸의 기능으로 잘 설명되면서 예술이 가진 아름다움과 매력이 대비적으로 더 빛을 발한다.

 

! 그림 감상이 좋은 본질적인 이유들: 감각적 즐거움, 인지적 탐색과 통찰, 감정적 정화화 재충전, 긍정적 산만함.



 

내용이 풍성하고 문장이 쉬워서, 쉬지 않고 즐겁게 따라 읽을 수 있다. 적절한 이미지들이 설명을 돕고, 독서하는 동시에 예술 작품 감상을 하는 듯한 효과를 주기도 한다. 심리학적 지식과 패턴에 대해 배우는 것도 재밌고, 그럼에도 고유하고 능동적인 행위 주체로서 개인이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것도 좋다.

 

“(...) 감상자가 선택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그림 감상은 수동적인 행위라기보다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감상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또한 어떤 경험이든 개방성이 높은 것*이 어떤 영향과 결과를 가져오고, 우리 삶을 풍부하고 선명하고 즐겁게 만드는지를 짚어주는 점이 유용하다. 당장 숫자로 표시되는 성과만이 아니라, 감정을 흔들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경험을 하는 기회와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더 필요하다. * 경험 개방성 openness to experience

 

기법이나 미술사에 대한 지식 정보와 이해의 방식이 아닌, 감상 주체로서 내게 일어나는 멋진 경험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함께 배우고 찾는 예술심리학** 책이다. 참 즐겁게 읽었다. 덕분에 진행 중인 전시회 일정을 알아보고 싶어진다. ** 예술 경험 - 예술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 - 을 다루는 학문. 경험미학, 실험미학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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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끝내는 지구과학 - 극변하는 지구의 미래를 해독하자
니나가와 마사하루 지음, 송경원 옮김 / 모스그린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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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계에는 지구와 비슷한 대기를 지닌 행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지구 외에는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곳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물리와 화학을 선택한 내가 배우지 못한 교과서 기초지식으로서의 지구과학을 이 책에서 만난다. 워낙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반가운 기분으로 학생처럼 차근차근 배워볼 수 있다. 2,000년도 더 전에 지구가 구형이라는 것이 알려졌다는 내용은, 21세기에도 지구평면설을 신봉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맹신하는 이들을 과학적, 논리적, 물증으로 설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런 맹신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성장 과정에서의 과학교육과 교양으로서의 지속적인 과학 공부가 더 중요하다. 정보량보다 생각하는 방식을 제대로 훈련받는 것이 결정적이다.



 

지구에 관한 내용을 읽다보면 겸손한 기분이 더 커진다. “생존이란 것이 얼마나 많은 요인들 - , 물질, 역학, 구조, 순환 등등이 섬세하게 작동해서 유지되는 중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지구내부구조를 배우면, 액체로 채워진 공의 껍질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더구나 그 껍질은 여기저기가 찢어져서 이동 중이다. 가라앉고 솟아오르고 충동하고 부서지고 하는 모든 순간이 인간과 다른 모든 생명체들의 생사를 좌우한다. 오랫동안 업데이트 하지 않은 지진 등의 천재지변 시 사용할 생존배낭을 열어 담아 둔 품목을 다시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일 종으로 최다 번식한 인류이지만, 그 문명이 지구 전체 규모로 일어나는 대기와 해수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유해를 끼치는 것이 새삼스럽다. 우리는 왜 완벽한 지구생태계를 거스르며순환하지 못하는 모든 쓰레기들을 만들어낸 것일까.

 

온난화라는 표현조차 정확하지 않은 지구 가열화heating의 시대 - 지표와 해수와 대기 모두가 끓어오르는boiling - 를 지금 살고 있다. 더 이상 아무도 미래의 일이라고 느긋할 수는 없다. 물론 지구평면설을 믿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여전히 기후문제가 거짓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 트럼프는 취임 1주일 만에 70개가 넘는 기후대응 정책을 전면 무력화시켰다.



 

다른 문제들처럼 기후 문제도 정확한 지식을 공부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담담하고 간결하게 지식 정보를 제공하는 단정한 이 책이 기초지식을 배우고 현실 문제로 사유를 확장하는데 기분 좋은 가이드가 될 것이다. 우리 집 중2도 한번쯤 읽어 봐주기를 바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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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렌드 블랙슈가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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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미를 좋아해서 그런 류로 오래 마시다 구입해본 묵직하고 진한 맛... 매년 낯선 2월에 만나서 더 좋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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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에르 드 부아르 18호 Maniere de voir 2025 - 인간붕괴, 지구의 위기 마니에르 드 부아르 Maniere de voir 18
필리프 데캉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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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코리아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인구 문제라고 하면 증감과 연령비율 같은 미지근한 온도의 숫자들이 떠오른다. 그야말로 정책결정자들이나 변화를 만들어낼 스케일의 문제라서, 내 문제로 가까이 당겨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통계학에서 데이터로 다룰 듯한 인구 이야기를 르몽드의 계간지에서 다룬다는 것이 생경했고 그래서 궁금했다. 펼쳐본 페이지마다 인간다움에 반하는 갖가지 인간 행동으로 인한 전 세계 인구 변동들이 아찔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 지역, 국가, 민족에서 인구변화로 기록될 정도면, 얼마나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있었던 것인가. 인류 역사는 범죄의 역사라고도 하지만, 제노사이드의 폭력은 절멸과 추방과 식민지화를 부르는 전쟁의 방식이었다. 또한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단일민족이란 신화 속에 살던 한반도 지역 거주민들도 외침과 식민지와 전쟁과 내란을 감당하며 살아야했지만, 언어와 문화와 국가공동체는 비교적 단단하다. 나는 민족주의자도 국가주의자도 아니지만, 그 경계가 보장하는 안정과 평화에 안도하며 산다.

 

이에 비해 연방이나 체제 붕괴, 혁명, 오랜 전란을 겪는 지역민들은 그 고단함을 상상할 수도 없는 생존을 이어가고 있고, 끝없는 디아스포라의 형태로 거주 불안을 감당하고 있다. 감소와 부재의 스케일은 수백만 명에 이른다.

 

나는 아주 오래 인구문제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분류와 통계는 오류 자체이며, 너무 말끔한 일반어는 대체로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칭하거나 대표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협박과도 같은 숫자를 앞세운 주장들은 대개 협박이나 협잡이며, 늘 가장 큰 원인은 과소비를 통해서 더욱 파괴적이고 비인간화되는 소비자본주의에 있다고 본다. 소비지를 양성하는 동시에 분열시키고 사회화시키고 소비능력을 유지한 노동자로 묶어두는데 가장 좋은 방식이, 메가 도시의 밀집군락이다.

 

평균적인인구 문제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직면한 진짜 문제들은, 과밀화, 고령화, 과소비로 인한 인간 사회와 지구 생태계 모두의 황폐화다. 이 모든 문제의 발발에는 관리되지 못한 폭력의 문제가 있다. 타인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비인간화의 문제가 있다. 이미 상품화된 전시 인간의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에서는 다산이 사회문제가 되지만, 20세기 말에 (한국 사회에서)환경 이슈들을 접하고 학습과 활동을 시작한 세대에 속하는 나와 친구들은, 미래가 염려되어 자녀 관련 고민이 컸고, 무자녀로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출산이란 소비자 재생산에 다름 아닌 걸까... 단호히 아니랄 수가 없다.

 

각자가 규정하는 기후 위기가 무엇이건, 인류의 생존에 대규모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인 건 분명하다. 해법은 이미 나온 것 같지만, 어쩌면 계속 외면당할지 모른단 불안감이 크다. 이미 늦은 건가 싶은 현실에, 위기를 가속화하는 정치적 결정이 난무한 것도 괴롭고 어렵다. 계속 배우며 견딜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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