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밀구락부
이화경 지음 / 한길사 / 2026년 6월
평점 :
한길사 장편소설, 매번 그렇듯 이번에도 짐작 이상일 거라 기대합니다. 문학으로 다시 체험하는 역사일 듯도 하구요. 읽는 내내... 육성으로는 다시 들을 길이 없는 조부모님 이야기들이 더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천아지. 천한 것. 형편없는 이름. 이번에도 천하다고 쫓겨날까봐 무서웠다.”
주인공과 조연들로 이루어진 구성이 아니라서 좋다. 감정 이입을 좀 더 하는 화자는 있지만, 덕분에 다른 상황이라면 알고 싶지 않은 인물의 이야기도 빠트리는 문장 없이 다 읽을 수 있다. 남 얘기할 필요도 없이,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 위한 내 인내심과 시간도 줄어드는 편이라서, 독서 자체가 훈련과 공부가 되었다.
기록되고 자주 회자되는 인물들로 역사가 바뀌어왔다고 단순화시키기 쉽고, 목소리도 존재도 지워진 이들을 기억하기란 어렵다. 비극적인 상황을, 수치스러운 역사를, 책임이 적은 이들에게 전가하는 멸칭과 심리와 논리를 되새긴다.
“바뀐 이름으로, 바뀐 처지로, 바뀐 마음으로 그녀는 있는 힘껏 진짜 자기 자신으로 살아보려 한다.”
굶주리다 팔려간 어린 시절, 도망밖에는 묶인 지옥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던 상황, 함께 어려움을 견디고 도와준 어른의 부재가 참 아프고 서럽다. 그래서 화자 천아지의 이후 선택은 그 시절의 허기에 기인한다.
물론 그녀가 유일한 피해자는 아니다. 글을 모르는 대다수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깨닫기 전에, 맞고 짓밟히고 죽어갔다. 그러나 “서른 살의 배운 여자”가 된 천아지는 조선에서 쓸모가 없었다.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꿈꾸는 것은 단 하나, 살아남는 것, 할 수만 있다면 자유로워지는 것.”
그녀가 사랑한 식민지 지식인은 저항의 수단으로 공부하고, 이론으로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가 아주 강했지만, 그 이론은 설명의 수단일 뿐, 실질적 무기가 되지 못했다. 변화를 위한 힘을 가진 이들 중에는, 독립보다 권력을 더 원하고, 타인의 열망을 자신의 야망을 위한 연료로 쓰려는 더 끈질기고 독했다.
유일한 사랑은 늘 미래와 가정 속에서만 희망과 약속을 얘기하고, 그녀는 자신이 도달한 답을 찾지 못한다. 생존을 위한 다음 선택은, 급변하는 한반도 상황에서 지속적인 보호 장치도 바라던 미래도 되지 못한다.
“한 번도 국가가 보호해주지 못했기에, 국가가 있는지조차 몰랐던 그녀에게 국가가 마지막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국가가 호명해준 이름은 스파이였다.”
내게는 내 조부모님들과 부모님이 전해준 진실의 엽편들이 있다. 작가에게도 그럴 것이다. 소설의 방식이지만 나는 작가에게 이어진, 역사적 진실의 조각들을 만난다. ‘전체’ 진실은 모르겠다. 한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진실은 드러나는(to be revealed)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진실은 울퉁불퉁하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때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사건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더 진실하다. “매끄럽고 앞뒤가 딱 떨어지는 것”들은 재구성과 조작과 연출 혹은 잘 포장된 거짓말일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