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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을 때까지 기다려
오한기 외 지음 / 비채 / 2024년 9월
평점 :
가을 겨울을 좋아하고 더위에 속절없이 취약해서 ‘녹는다’는 말도 두렵지만, ‘녹아야’ 비로소 흡수되고 향유되는 것들이 있다. ‘디저트’들을 구성하고 창작한 문학이라니! 최애 디저트들의 향이 읽기 전부터 뇌를 헝클이는 기분.
“똥을 먹으면 걸작을 쓸 수 있다는 소문이 난 거야.”
오한기 작가의 작품들을 만나 웃음이 터지지 않은 적이 없다. 팬데믹의 음울한 한 시기를 웃게 해준 고마운 기억 후에 처음이라 더 반갑고 기대되면서, ‘민트’에서 살짝 체한 듯도 했다. 최초의 민트향이 치약이었기에, 내게 민트는 삼키지 않는 재료다.
오한기 작가와 민트초콜릿이라니, 상상해본 적 없는 조합에 조금은 설레고 현기증이 스치기도 했다. 이내 예의 (내게는)유쾌한 방식으로, 에세이 같기도 자전소설 같기도 한 민트와 초콜릿을 전복적으로 뭉개는 차용과 전개에, 부친 상례 이후 처음 소리 내어 웃었다.
발작적으로 찬사를 보내고 싶기도 원망을 하고 싶기도 하다. 민트에는 관심이 없지만, 저는 다크 초콜릿을 좋아한단 말입니다, 작가님! 과연 나는 향후 초콜릿을 구매할 수 있을지 흥미롭다. 어쨌든 초콜릿이 보이는 모든 순간 이 작품이 생각날 것은 분명하다. 역시는 역시!
“나는 그렇게 투명하고 가뿐하게 살아본 적이 잘 없어서 한 번쯤 그래보고 싶었어.”
또 다른 흥미로웠던 단편에는 ‘젤리’가 등장한다. 종종 자제력을 잃고 사고 마는 곰젤리의 촉감과 양감과 질감과 향과 색,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생명체로 등장한다. 소설의 매력을 절감하게 하는 멋진 작품이다. 말랑하고 다정하고 그립고 사랑스러운 분위기에 마음 놓았다 쭈뼛한 호러를 맛보았다.
초콜릿에 이어 젤리 역시 다음에 살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하는 마력이 있고, 입 안에 넣고 어떤 생각을 하며 씹거나 녹일 수 있을지 한편으로 망설여지고 다른 한편 잔인한 모방 심리가 발동한다. 사랑스러운 형태를 녹여 삼킨다는 제전 같은 섭식.
“녹을 때까지 기다리자.”
그리고 박하사탕, 역시 민트(류)향이라서 내게 간식이나 디저트 메뉴였던 적은 없지만, 내용이 매력적이고 명치를 얻어맞은 듯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주었다. ‘새삼’ 다 아는 세계가 낯설어지는, 계속 분해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라지고’ 있다는 단어로 치환되자 겁이 나고 서글퍼지는 생.
부친과 이별한 후라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문장이 아프고 다 녹기 전까지의 아주 잠시의 시간이 가감 없는 인간의 삶 같다. 부친과의 시간이 거의 녹아 사라지고 있었는데도 몰랐던 것이 새삼 안타깝고 애통하다. 사랑하는 이들을 보고 만날 남은 시간이 울고 싶을 만큼 간절해진다.
손을 잡고, 뭐라도 나눠 먹으며, 아직은 녹고 있는 중이라고, 아직은 괜찮다고,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그런 생각을 고요히 하며 소중한 이들을 보고 싶다. 다 읽고 나니 현실에서 곧 다가올 가족모임이 반가워진다. 읽기 전엔 그 시간 동안 혼자 자고 싶었는데.
디저트 이벤트처럼 다채로운 앤솔로지다. 여러 해 만에 다시, 올 12월에 슈톨렌을 하나 살지도 모르겠고, 민트나 박하향이 나는 무언가를 씹거나 삼킬 지도 모르겠다. 낯선 디저트도 반갑게 만들어주는 인상적인 작품들이다. 덕분에 즐겁고 기운도 조금 더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