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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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이고 무크지에는 [문어] 한 편이 실려 있습니다. <지구생명체는 항복하라>는 제목이 위협적이지 않고 뭔가 유쾌했는데, 문어가 실제 그 대사를 발화할 때는 결국 웃고 말았습니다.

 

그 내용 전에도 읽다가 너무(?) 자주 웃어서, 호르몬에 이상이 있는 건가 싶기도 했습니다. 태연하고 능청스러운 블랙 코미디 같은 팍팍한 유머가 제 취향에 딱 맞습니다. 풍자와 비판을 위한 가장 맞춤한 가면을 착장한 듯, SF 장르가 한증 더 자유로운 여지와 허용을 준다고도 느낍니다.

 

황당하면서도 허가 찔린 듯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는 작품은 현실의 많은 순간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 씁쓸함과 갑갑함으로부터 잠시 쉬어가게 해줍니다. 날카로운 시선과 깊은 사유는 여전하지만, 자전 소설이라 할 만큼 누적된 경험에서 흘러나온 담담한 문장들은 오히려 고수의 품격을 절감하게 합니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왜 이 지경인가만 반복해서 묻는 삶을 사는 독자인 나는, 그럴 수는 없어서 다른 간절함과 진지함을 품고 현장들을 지키고 의문을 묻고 끌려가는 옆에 선 이들의 삶을, 축축하고 시린 눈으로 바라보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켜켜이 쌓여가던 질문들을 작가의 인터뷰와 다른 글들과 문학 속에서 많이도 찾고 만납니다. 하루가 부족한 듯 쏟아지는 불안과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뉴스들을 최대한 피해보는 것만으로는 부끄러움이 짙어갈 뿐입니다.

 

세상은 만들어가고 변화시키는 대상이니까, 이길 수 있어서 시작한 싸움이 아니니까, 그래도 저항의 기록은 중요하니까, 미래의 다른 싸움을 희망이라 부르며, 작은 발판을 마련해두고 살해가 아닌 저항을 위한 작은 무기를 넘겨주는 것이 포기하지 않는 많은 분들이 계속하는 일이겠지요.



 

<나의 문어 선생님> 이후 문어에 대한 친밀감이 높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거대 문어가 복도를 채운 채로 내게 다가와서 나를 톡톡 건드리며 항복하라... 고 한다면... 화면으로 쌓은 정신적 친밀감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과연 [대게],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에는 어떤 놀라운 문학의 풍경과 현실로부터 온 목소리가 담겨있을까요. 하루라도 빨리 전지구적인 행동이 시작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쉽지 않을 듯해서 문득 너무나 무서워지는 기후이야기를 만날 [해파리]가 가장 궁금하긴 합니다.


연작이니 수록된 작품들을 다 읽고 나면 비로소 제게 남을 한 문장도 무척 기대됩니다. 설마 항복!”은 아니겠지요. 정식 출간본이 무척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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