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
이경 지음 / 래빗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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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힘이 있나요>

 

종 전체의 생존 - 출산과 양육 - 을 인구 절반인 여성에게 떠맡긴 인류의 방식은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서는 최고의 선택일지 모른다. 다른 모든 노동은 제 값이 있어도, 그 노동은 가격이 없으니까.

 

기자님은 10년 넘게 언론업에 종사했다고 하셨죠? 하지만 아기 입장에선 그게 뭐? 내 똥이나 치워줘. 이런 식이죠. 이 시간 동안 보호자는 아기에게 (...) 물리적으로 완전히 묶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떤 강도로 얼마나 오래 요구하는 기준도 없어 거부조차 어렵다. 사회시스템 - 교육, 복지, 기타 안전망 - 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는 어떤 육아는 돌봄제공자가 병들거나 죽기 전에 끝나지 않는다.

 

만삭 임산부의 배우자를 그렇게 늦게 퇴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좆같은 조직 문화와, 배우자 출산휴가도 좆같이 짧은데 이것마저도 쓰려 하면 눈치를 좆같이 보게 만드는 좆같은 육아휴직 제도를 가진 좆같은 회사의 시대착오적 존재 자체를 방치하고, 나아가 은근슬쩍 연명시키기까지 하는 좆같이 덜떨어진 사회에(...).”

 

진짜 죽을 것같을 때 그래도 살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어이없게도) 무척 작은 도움, 호의, 숨구멍, 대화 이런 것들도 가능하다. 이 작품은 그 점을 젖병 소독 기능을 제공하는 AI로 현학적이고도 적확하게 보여준다.

 

나는 젖병 소독의 천사, 보틀스의 엔젤이야. 잘 부탁해, 미주.”

 

마침내(?) AI와 함께 살아가는 인류, 미래 노동의 문제, 출산과 육아와 모성의 문제를 다루는 것도 같지만, 내게는 인간이기 때문에매뉴얼에 설명되지 않은 사소한 교류와 변화와 예외와 예상 못함 등이 몹시 인상적이다.

 

양자역학적이고 그래서 혼란스럽지만, 한 가지 본질로 규정되지 않는 것이 바로 생명의 본질이다. 혼란과 망각의 정신없던 한 시절의 생존을, 단편 소설로 기록하고 기억하자는 작가의 의도/의지에 기분이 먹먹했다.

 

현실은 늘 이론보다 불투명하고 혼란한, 끓고 있는 죽 같은 것이죠. 그런 현실에 처한 우리에겐 (...) 애매하고 불투명해도 유연하게 확장하기 쉬운 비본질적인 사고가 필요할 때도 많다고 믿어요.”






<인간의 미래는 과학기술상품이 보장해줄 지옥 탈출일까>

 

잔뜩 긴장하고 펼친 작품엔 진짜 황새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표제작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에서 전편에서 만난 욕설을 다시 만나 픽 웃음이 난다. 이 욕을 이렇게 여러 번 따라 적어본 건 처음인 듯.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됐잖아! 좆같네, 진짜! (...) 임신에서부터 출산, 육아까지 14개월 만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멍청이가 되어버렸다.”

 

여전한 육아지옥이다. 비합리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을 알지만, 꺼림칙하게 들리는 효과적인 비난도 똑같이 들린다. 지옥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절절한 대비책같이 읽혀 나도 기분이 절박해진다. 예상치 못한 문장에서 눈물이 솟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이 집엔 나와 이안이 둘뿐이다. 세상에 태어나 겨우 100일 남짓 살아본 사람과 엄마로 겨우 100일 남짓 살아본 사람 둘이서 다 알아서 해야 했다.”

 

신종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전국 어린이집 2주간 긴급 휴원 명령은 눈앞에서 숨구멍이 닫히는 재난이겠고, ‘황새영아송영 앱은 희미한 구원 같은 불빛이겠다. 그리고 엄마가 없어도 괜찮아펭귄 베타서비스 체험.

 

아무리 애써서 경계를 해도 어느새 깊은 잠에 들어버릴 정도의 맞춤 서비스 제공자가 타인의 감정 노동을 착취할 염려 없는 AI라면 나는... 미래의 노동에 대해, 구매자이자 소비자로서의 나에 대해 진심으로 상상해버렸다.



 

직접 경험을 통해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느리게 배우는 인간에 비해, 매뉴얼 숙지와 빅데이터로 능숙해진 존재라면, 그 서비스를 개별 구매하기 위해 인간은 또 다른 노동 지옥 속에서 허우적대는 방식일 거란 멈칫한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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