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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트리
오가와 이토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6월
평점 :
‘여름은 곧 릴리, 릴리는 곧 여름’ 내게는 OO은 곧 여름 방학, XX은 곧 겨울 방학인, 의식 같은 반복이 있었다. 학창 시절은 지겹고 힘들기도 했지만, 누가 내게 시험보라는 말을 다시 하지 않는 대신 방학도 영원히 사라진 건 지금도 좀 아쉽다.
“어둠 속에서 별을 올려다보는 우리를 바다가 새까만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여름에만 오지 말고 겨울에도 올 순 없어?”
여름휴가가 매번 설레지는 않았다. 무더위 여행은 끔찍하니, 책을 쌓아두고 읽는 휴가 습관은 그렇게 생겼다. 요즘은 당연한 것들이 기쁘다. 여름 음식들 중 하지감자를 매일 먹는 중이다. 왜 아직 맛있을까. 대용량 카레도 두 번 만들었다. 그리운 여름향기 중 하나다.
“기름한 핫도그 빵에 겨자버터를 바르고 장아찌를 끼우는 기쿠 할머니의 수제 샌드위치다. 이날은 노란 단무지와 붉은 차조기로 물들인 가지장아찌가 번갈아 규칙적으로 들어 있었다.”
본 듯도 하고 알 듯도 한 낯선 장소가 그려진 오가와 이토 작가의 작품은 새로운데 익숙하고 모르는데 늘 그립다. 비슷할 리가 없는데, 작품세계로 들어가니 내 추억도 함께 펼쳐진다. 릴리라는 친구도, 밭일하시는 할머니도 안 계셨는데.
의심 없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언제나 안전하게 품어준 이들이 있던 시절, 편안했던 공간, 그런 건 어떻게 만들어 내는 걸까. 사람의 품이 장소의 분위기일까. 그렇다면 내가 만든 지금의 집은 어린 누구에게도 편안한 곳일까.
방학이 끝나면 늘 얼마나 컸나, 하고 궁금했다. 그렇게 묻는 어른들도 늘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시간에, 어른의 시선이 걷힌 장소에서 아이들은 성장한다는 것을 그때 그분들은 다 알고 계셨던 걸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니, 설명하고 증명하지 않아도 대단하다고 훌륭하다고, 그렇게 살다 보면 모두에게 좋은 일들이 생기는, 그런 꿈같은 세계를 꿈꿔본다. 모두 다르게 생긴 형형색색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함께 살듯이.
“할머니의 밭은 마치 조그맣게 응축된 지구 그 자체 같았다.”
“이렇게 많은 생물 중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환경을 파괴하거든.”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걸, 나는 내 이전의 모든 이들이 애쓴 삶이 도착한 곳이라는 걸, 안다고 생각한 몰랐던 진실을 작품 속에서 그립게 만나 다시 배운다. 이제는 사라진 장소들이 사람만큼 그립다.
“오래오래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 잊고 놓아 주는 것도 필요해.”
“할머니의 몸이 투명해진 만큼 윤곽은 오히려 더 뚜렷해져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기쿠 할머니의 영혼은 나와 릴리가 분명히 이어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