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풍경 - 문자의 탄생과 변주에 담긴 예술과 상상력
이승훈 지음 / 사계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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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 부모 세대는 동몽선습부터 배웠다고 하는데, 나는 좀 늦게 시작했으니 천자문으로 시작하자고, 나와는 무관한 한문 공부 계획이 생겼다. 할아버지께 천자문 선물을 받고 조금 즐거웠고, 입학 한 초등학교에서도 붓글씨 수업이 있어서 그러려니 했다.

 

한자 수업을 받은 세대라서, 한자를 먼저 익히고 한문을 배우는 것이 맞는지, 중국어 원음과 원전은 아니지만, 언어와 문학은 이야기로 책으로 접하는 게 맞는 건지는 좀 헷갈렸다. 뭐든 시험 과목이 되면 흥미가 사라지는 법이고, 수업이 따분하면 더 그렇다.

 

내 최초의 질문은 천지현황에서, 어째서 하늘이 검다고 표현한 것이냐는 거였는데, 물리학을 배우기 전까지 아무도 대답을 주지 않았다. 우주는 어둡고 춥고 지구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없는 공간이다. 대부분의 깊은 공간 속에 찰나로 존재하는 빛들.

 

30대에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한자공부도 함께 시작했다. 기간과 목표가 있어야 잘 따라하는 수험세대라서 한자능력시험 준비를 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놀랍게도 엄청 재미있었다. 표의문자라는 건 역사와 사회를 담은 퍼즐과도 같았다.

 

활용할 기회가 적어 다 잊고 필기 노트들만 남았지만, 어쨌든 시험 한정 공부가 그토록 재미있었으니, 더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는 얼마나 더 대단한 내용일지 설레고 기대가 컸다. 제목도 멋지다, 한자의 풍경. 한자라는 언어의 풍경. 언어 문명의 풍경. 인류의 풍경.

 

추상화된 문자 기호를 읽고 인식할 때 활성화되는 이 영역을 스타니슬라스 드앤은 문자 상자(letter box)라고 부른다. (...) 문자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뇌의 같은 위치에 문자 상자가 있다. (...) 우리가 문자의 서체나 크기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이 문자 상자 덕분이다.”


 

체계와 정서 모두를 챙긴 역작이 이 책이라고, 세상을 풍경을 바꿔달라는 엄청난 응원 메시지도 받았다. 525일부터 읽기 시작해서 열흘 간 일독을 했다. 다행히 함께 읽는 모임이 생겨서 다시 즐겁게 완독해볼 예정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정좌해서 단정한 기분으로.

 

갑골문 존()자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치는 모습이다 (...) 존경(尊敬)이라는 단어는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잡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에서 비롯했다.”


 

저자가 평생 공부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나눠주었으니, 책의 형태를 한 보물이다. 해박함도 통찰도 문명 해설사처럼 전해주는 설명도 모두 최고다. 특히 2023년이란 현재에 지치고 질리고 소비된 독자라면 더 의미 있을 언어의 기원을 향한 긴 여행이다.

 

갑골문과 금문의 자의 머리에는 신()이라는 독특한 표시가 있다. 앞서 밝혔듯 자는 고대 형벌 가운데 얼굴 등에 문신을 새기는 묵형을 집행할 때 쓰는 날카로운 송곳을 나타낸다. 의 머리에 이 있음은 길들여 순종케 했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 용이... 상상의 동물이 아니라 실존했단 말인가...

 

엄청 재밌다. 한자를 몰라도 관심이 없었어도, 그런 건 다 상관없다. 묵독의 독서 방식 대신 어릴 적엔 수업 시간에 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았던 강독을 하고 싶을 만큼. 촘촘하게 다 소개하고 싶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니 읽어 보시기를 힘껏 권한다.

 

! 사계절 TV에 한자의 풍경 특강 자료가 있습니다. 책을 먼저 보시고 감탄하시기를 저는 권하고 싶지만, 강의를 듣고 흥미를 가지시는 것도 좋겠지요. 막연한 SNS 헤맴보다 훨씬 재밌습니다. https://youtu.be/D5pd2DDIt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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