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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6
에밀리 디킨슨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평점 :
어떤 책들을 만나면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선물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가장 호사스러운 체험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평생을 연구한 자료를 담은 한 권의 책도, 삶의 농밀한 것들을 아름다운 언어로 전하는 시집도 그러하다.
생전에 출간된 일곱 편의 시가 모두 편집되었다는 정보에 놀랍고 안타까웠다. 단 한 장뿐인 사진에서 그는 영원히 열여섯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나, 응시하는 시선은 오랜 눈 맞춤을 통해 스스로를 불멸의 존재로 남길 것만 같다.
이상할 정도로 과격한 언어들로도 소개되는 그의 존재와 삶이 많이 궁금했다. 은둔과 격리라는 평가는 오히려 진심보다 형식이, 태도로서의 사회성이 미덕이고 과대평가된 문화 때문이 아닐까. 그의 시는 외부 세계를 모르지도 피하지도 않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작은 방에서 렌즈 두 개로 우주를 다 보았던 것처럼, 시인도 노란 집 자신의 2층 방에서, 커튼이 열린 틈으로도 전쟁의 화마가 사라진 세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풍경을 다 만났을 지도 모른다.


2세기 전 살았던 시인의 삶이 비밀의 화원처럼 펼쳐진 곳으로, 변신의 마법을 부린 듯 간결하고 아름다운 번역어를 통해 입장할 수 있었고, 원하는 만큼 오래 머물 수도 있었다. 고요하고 낯설고 매혹적이었다. 어떤 단어들은 진하고 뜨겁게 피어난 불꽃같았다.


나는 때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그의 시 속에서 방문해 보기도 하고, 작고 가벼운 시집과 함께 내 세계로 산책을 나갔다. 두 세계 모두에서 꽃이 피고, 물이 흐르고 , 나무가 푸르고, 숲이 존재했다. 그의 몽상은 나의 관찰보다 정확하고 아름다웠다.

그의 펜촉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벌과 나비를 반가이 맞았고, 신기하게도 자꾸만 행운의 네 잎 클로버가 눈에 띄었다. 봄이라기엔 두려운 세찬 빗소리도 시가 떠올라 놀라지 않았고, 오래 접은 베이킹도 시인이 빵을 굽던 시간을 생각하며 오븐을 데워보았다.
그가 생을 마친 55세가 내 나이에서 멀지 않다. 1800여편의 시에는 그가 경험한 - 직접 경험이든 문학적 상상이든 - 세상이 담겨있을 것이다. 실체화된 시어들이 만든 세상일 것이다. 선집에서도 새소리가 들리고, 벌레들이 울고, 꽃들이 피고, 잎들이 날아다닌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것들 중 언어로 바꿔 기록할 것이 몇 개나 될까. 문득 그런 생각... 50대의 에밀리 디킨슨을 상상해 보았다. 생의 마지막까지 그가 기록하고 싶었던 세계의 조각들... 번역된 시집이란 문학전공자가 아닌 독자가 누릴 수 있는 사치와 호사의 절정 같구나.
남북 전쟁의 화마 속에서, 수명을 가진 인간의 몸속에서, 1800년대의 여성 속에서. 그리하여 의식을 펜으로 조각한. 재능보다 뜨거운 애정이 가득했던, 세상의 시들로 몸을 덥히며 산. 자신의 사망 증명서 직업란에 ‘집’이라고 적은 시인이 있었다. 모든 순간이 환희로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