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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평점 :
어떤 배움은 참 늦다. 성실하게 학교를 다니고 시키는 대로 잘 따라 배웠지만, 살다보면 무엇을 왜 어떻게 언제 열심히 해야 하는지 막막해지곤 한다. 역사의식 역시 거의 부재한 상태로 살다가 차츰차츰 여리게 자라나는 형편이다.
특히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여전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현재의 무엇이건 과거의 선택이고 미래를 만든다는 것을 깨달으니, 몰라도 좋을 역사란 없었다. 새해 책모임에서 역사서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의 나라 전쟁사는 흥미로울 수도 있지만, 우리의 역사는 참 아프고 무겁다. 저자가 제공하는 새로운 문제의식도 대단하고, 시선의 중심을 전쟁을 피할 도리가 없는 백성들의 피해 사료를 근거로 삼은 기록이 너무나 귀하다.
“전란 중에 벌어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파헤쳤을 뿐만 아니라 모든 내용을 조, 청 양국의 1차 사료를 토대로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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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지식과 여러 매체를 통해 다양한 해석으로 모자이크된 이 시기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다시 톺아보았다. 추리나 르포와 같이 선명하게 고통과 피해자들로부터 출발해서 가해의 원인을 추적하는 흐름이 내내 벅찼다.
“남의 헛간 구석에서 쥐 죽은 듯 숨어 있던 이괄은 이경(9시~11시) 무렵 (...) 도성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80여 명의 도성 백성들이 참살 당했다.”
너무 쉽고 경망한 지적과 비난과 후련한 욕설을 모두 배제하고, 촘촘하게 결과물을 도출한 배경과 정책과 판단오류와 결정적인 실책들을 짚어간다. 조사범위는 당대 철학과 세계관, 외교의 모든 범위를 아우르는 작업이었다.
“개성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손을 내밀기 시작한 조사는 서울에 도착한 이후에는 엄두도 못 낼만치 많은 뇌물을 요구했다. (...) 고심하던 조정에서는 없이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울 수밖에 없었고, 이래저래 백성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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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변동으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바뀐 게 아니고, 주위의 강대국들이 사라진 게 아니라면, 이 책에서 전란들을 분석한 역학 관계는 오늘날 분단으로 더욱 복잡해진 대한민국의 처지를 가늠해보는데도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
불안과 두려움 없이 사는 시절이 아니라서, 의식은 자꾸만 책에서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저자도 그렇게 현재를 살아가는 안목을 키우라고 이 책을 전달해 주신 거라 그렇게 믿는다.
특히 폭력적인 언사가 노골적이고 더 이상 주저하지도 않는 혐오 강화 시절이라 차분한 성찰과 현실 적용은 더 중요하다. 이 역시도 우리 역사에 깊이 새겨진 커다란 상흔이라고 생각하며 똑같이 맞서지는 않으려 매일 애쓴다.
모든 경험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길 수는 없지만, 그냥 사라져도 무방한 사연과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 흔적을 따라 온전치 못한 기억도 마땅히 배우고 추념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 책의 어떤 현장성은 지금도 너무 가슴 아프고 개별적인 슬픔으로 가득한 듯했다.
“임진강의 방어를 맡고 있던 어영사 이귀는 군사들보다도 먼저 달아났다. 당시 조정의 여론은 이귀의 처형을 주장했으나, 인조는 끝까지 그를 감쌌다. 그후에도 이귀는 여전히 인조의 총애를 받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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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초에 큰 뜻을 품은 큰 사람이 못되지만, 살면서 희생이나 헌신이 부족해서 큰 재난이 일어나는 경우는 자주 못 보았다. 그보다는 각자가 책임과 직업윤리를 안 지켰을 때 세상살이가 험해지는 건 안타까울 정도로 자주 본다.
“당시 인조가 그들(후금)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그의 용기라기보다는 평소에 지녔던 숭명 사상이 그 척도였다. 그러나 (...) 그 무렵 조선의 재정 상태는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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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인조 정권에서 행한 모든 정치적 행동은 조선 측에 전혀 득이 없을뿐더러 후금 측을 자극하는 무모한 행동이었다고밖에는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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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 곳곳에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도, 누구도 측정해주지 않아도 자기 몫 이상을 하며 사시는 존경스러운 분들이 많이 계실 것이다. 덕분에 세상은 이만큼이나 작동하고 이어져 온 것이다.
역사서를 읽고 배우고 나면 늘 감당할 도리가 없는 감정이 일렁인다. 진상 규명과 사과가 필요한 이들에게 돈을 주겠다는 모욕, 애도와 추모가 간절한 이들에게 돈 더 벌게 해주겠다는 모욕을 근래에 목격해서 심정은 더욱 복잡하다.
왕조 시대에도 공화정 시절에도 공동체를 운영하고 경영하려는 이들은 무지해서도 무능해서도 안 된다. 조롱하고 욕하는 것으로는 변화도 안전도 불가능하다.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망치는 것은 쉽고 빠르다는 걸 알아서 무섭고 두렵다.
“삼가 원하건대 신의 처지를 굽어 살피시어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소서.”
“병자호란의 참패 원인은 당시 군왕인 인조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하겠으나, 이 밖에도 (...) 당시 도원수 직책을 맡았던 김자점과 심기원이 벌인 행동을 보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외부에서 가해진 굴욕에 무력한 리더와 권력이 어떤 참담한 위기를 초래했는지 역사는 거기 버티고 서서 거듭 경고한다. 불편에는 쉽게 발끈하면서도 불의는 잘만 참아온 내 몫도 역사의 풍경을 어둡게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하니, 조금 억울하고 많이 부끄럽다.
역사서를 좋아하는 큰 아이와 함께 읽을 수 있어 좋으면서도 복잡한 기분이었다. 내가 놀랐듯이 아이도 이런 ‘혼군’이 존재했고, 그로인한 참화에 많이 놀랐다고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 되는 공부이길 바라며 기성세대로서 혼곤한 한국현대사를 설명할 책무가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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