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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의 비밀
오가와 이토 지음, 이지수 옮김 / 더블북 / 2023년 2월
평점 :
팬데믹 전이라는 시대 구분 같은 게 내게 생겼다. 2018년에 올린 일기 묶음이라니 그리운 옛일처럼 느껴진다. 물론 너무 즐기며 살다 결과적으로 팬데믹을 맞은 것이니 마음 편히 좋아할 수만은 없다. 일기 형식이 아니라 진짜 일기라서 출간된 책임에도 좀 조심스러운 기분으로 읽게 되었다.
베를린은 출장 목적으로만 방문했다. 6월 한낮에도 잠시 가만히 있으면 곧 체온이 내려가서 몹시 추웠다. 고된 일을 끝내고 반나절 자유 시간이 생겨 거리를 걸어 다녔다. 서점과 역사관을 방문한 듯 걷는 것만으로 만날 수 있는 저자와 역사적 인물들이 거리 이름으로 가득했다.
릴레이 회의와 토론은 구체적으로 기억이 안 나고 걸어 다닌 시간만 여전히 선명하다. 친절한 베를린 시민들에게 물어 보면 어디든 지도 없이도 찾아갈 수 있었다. 첫 프라이탁 가방을 구입한 것도 베를린이었다. 다정한 작가가 베를린에서 무엇을 하고, 어떤 사유와 경험을 글로 담았을 지가 무척 궁금했다.
“겨울의 밑바닥을 지난 느낌이라서 정신적인 일조시간이 길어졌다. 앞으로 나날이 봄과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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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파리, 오세르, 카우나스, 홋카이도, 반려견 유리네... 모두 부럽단 생각만 하며 문장을 따라다녔다. 2018년의 풍경들, 현실에서 나도 만난 지명, 나는 모르지만 실존하는 사람들. 내 마지막 출장 겸 여행도 2018년 겨울. 읽다가 구글맵을 켜고 심리적으로 아주 멀어진 곳들까지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20년 전의 내 감각과 지금은 감각은 다를 테고, 어쩌면 옛날의 꿈같았던 기억을 그대로 남겨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도 있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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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에서 살아보거나 적어도 한동안 머물며 현지인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관광지 사연보다 늘 더 재밌다. 더구나 글 잘 쓰는 작가의 일기로 만나는 재미는 각별하다. 작가라서 일기도 책의 초고 같다. 일기를 꾸준하게 쓰지 못하고 문득 쓰는 습관을 조금 반성하게도 된다.
“지금 지구는 그런 자못 ‘지적인’ 사고방식과 ‘훌륭한’ 이론 덕분에 소멸의 위기에 빠져 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기도를 한두 시간 하시는 분들도 계시다는데, 치열한 명상과 내적 논쟁과도 같은 질문을 하신다는데, 밤에 고요하게 하루를 살아낸 나를 글로 정리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습관을 갖고 싶어진다.
“로댕의 작품에 인격이 있다면 카미유가 만들어낸 작품에는 감정이 있다. 로댕이 끊임없이 이상을 추구했던 것에 반해 카미유는 현실을 직시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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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지인들 중에 밝고 기쁜 투로 <달팽이 식당>을 오가와 이토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여럿이다. 섬세하고 생생하고 성실하게 사유하고 느낌을 다루고 기록을 남기는 작가의 일상을 만나고 나니 좋아한다는 그 표현이 더 따뜻해진다.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에세이는 작가와의 친밀감을 높인다. 친구들에게 선물하면 무척 반가워할 책이다. “‘조이풀, 조이풀’, ‘영차, 영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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