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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째 열다섯 ㅣ 텍스트T 1
김혜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월
평점 :
인어공주도 무서웠지만 어릴 적에 가장 무서웠던 건 한국전래동화였습니다. 잊고 살다가 2000년대 생들도 전래동화를 읽는 지가 문득 궁금했습니다. 시도해 보았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물들을 본 적도 없고 정서도 너무 낯설어 감상이 어려웠습니다.
새로운 장르로 재구성되거나 스토리가 차용되면 좋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이전에 구전되던 문학들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니까요. 반갑게도 여러 작품으로 만납니다. 찾아보니 아름다운 그림책들도 많습니다. 이 책은 단군신화를 차용했습니다.
인간이 되고 싶어 한 호랑이와 곰 이야기도 사랑스럽지만 “난, 별로~”하며 거절한(저런 말은 안 했지만) 여우족이 멋집니다. 권위적인 존재에게 감화되고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존재가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으로 잘 어울립니다.
김혜정 작가의 전작들을 읽은 독자들은 어린이 독심술사 같은 능력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린이들들 잘 아니, 많은 문장들이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들로 들립니다. 상당히 단순했던 단군신화가 풍성한 이야기로 빛납니다.
인간이 되어 인간의 수명을 사는 것과 거절하고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 어느 쪽이 상이고 어느 쪽이 벌일까요. 제가 지나치게 이분법적 사고를 하나요? 환웅이 준 ‘원구슬’은 500년에 한 번씩 늘어납니다. 죽을 위기에 처한 인간을 도와서 불멸의 여우족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 소설이라 주인공은 열다섯입니다. 이해가는 설정이지만 이 나이로 사는 건 막막하고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일단 중학교를 거듭 다니는 삶 어떤가요? 이번엔 할머니와 엄마와 함께 학교생활을 합니다. 세쌍둥이로 위장 전학을 갑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전개와 결말이네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어쩌면 일부 어른들이 가진 마법 능력, 한 눈에, 순식간에 서로를 알아보고 좋아하고 친구가 되고 사랑에 빠지는 일. 그런 관계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분리, 차별, 혐오하라는 악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너는 가을이야. 나는 상관없어. 네가 야호든 뭐든 다 괜찮아. 너는 가을이니까.”
오백 년쯤 살면 인간을 미워하게 될까요, 더 사랑하게 될까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중 무엇을 더 많이 보게 될까요. 어쩌면 오래된 실망과 상처도 단 한 사람과의 관계로 잘 치유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일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돌이켜 보면 같은 삶은 없었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작가는 한 가지 이상의 갈등과 서사를 이 장편에 담았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서도 무척 심각하게 다룹니다. 전쟁과 죽음이 등장합니다. 재밌게 읽어 보시라고 소개는 하지 않습니다. 한 가정과 교실을 넘어서는 세계관이 탄탄하게 구성되어 끝까지 흥미롭습니다.
낯선 존재를 만나고 삶에 받아들이는 문제, 관계 속의 나를 바라보고 정체성을 고민해보는 문제, 비슷한 고민들에 힘들었던 우리들의 성장기를 떠올리고 새롭게 생각을 가다듬어 보는 기회가 됩니다. 어쨌든 민족의 원형을 담은 이야기, 단군신화도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텍스트T 1’이라고 하니 2도 3도 있겠지요. 김혜정 작가의 다음 작품을 고대하며 기쁘게 책을 십 대들에게 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