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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ㅣ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평점 :
제목보다 믿을 수 없게 좋기 만한 라인업이 더 눈에 들어왔다. 무기력과 침잠이란 단어를 주기적으로 쓰던 흐릿한 새해를 보내는 중에 심장이 두근! 반응하며 설렜다. 좋아하는 작가들과 좋아하는 장르, 새로운 시리즈의 첫 출간!
프로결심러가 된 듯 수없이 생각을 다진다. 막말과 욕설은 생각도 떠오르지 않게 살자. 방향 모를 화는 내어 무엇 하나. 그럼에도 다시 강퍅하고 고약한 기분이 번지면 사랑과 사랑이야기를 읽는 것으로 병증을 달랜다. 다행히 분노만큼 사랑도 세상에 가득하다.
“아직도 이렇게 예쁜 색깔이구나.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이토록 아름답구나.”
시작은 사랑이었으나 결론은 아주 먼 곳, 새로운 사랑이야기다. 채식주의자면서 가능하면 절대 먹고 싶지 않은 브로콜리에 대한 반감을 덜어낸 고마운 이유리 작가의 표제작은, 가장 신선한 브로콜리의 단단함 같은 문장들로 감칠맛 가득하게 요리되었다.
알지 못한 채 어느새 음식을 입에 문 사람처럼 놀랐고, ‘감정전이’에 홀려 빠져들었다. 신화와 무속의 세계에서 가뿐하게 SF의 영역으로 옮겨온 능력은 어쩌면 진짜 현실이 될지 몰라... 하는 기대를 은밀하게 상상하도록 했다. 읽고 나니 제목이 선명해졌다.
‘공감’에도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인지 공감과 감정 공감. 인간은 감각하고 경험한 정보 데이터를 선별하고 왜곡하고 편집하고 회피하고 외면도 한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감정에 진심과 진실을 부여하여 귀하게 여기고, 누군가는 소모성 감각으로 여긴다. 뇌가 간질간질한 주제!
“솜 인간에게는 자해든 자기 파괴든 조금은 덜 위험하고, 더 보송한 일이 될 거예요.“
설재인 작가의 작품은 뇌에서 스파크가 팡팡 터지듯 강렬하고 유쾌하고 아팠다. 나는 사용해 본 적 없는 미림을 사서 맛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순간 생기기도. 자극을 경고하는 문학을 읽으며 새로운 자극을 상상하는 이율배반, 나는 참 불순한 독자다.
뭔가 더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스포일러가 안 될까. (에라 모르겠다~) 이야기의 (대애박!)설정에 즐거워하다 가만 생각해보니 과거의 모든 선택이 현재가 되었고 지금의 모든 선택이 곧 우리 미래가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미래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심사관이 맞구나.
어쩌자고 현실의 인류는 수많은 SF가 경고한 디스토피아를 모두 비웃을 미래가 아닌 멸종을 선택했는지는 참 모를 일이다. 바로 어제 1.5도 상한선은 물 건너갔다는 보고서를 읽었다. 지구 종말은 모르겠지만 인류 종말은 자업자득이 가능성이 높다. 슬프다.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 혹은 진짜 내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란 대체 뭘까요?”
천선란 작가의 작품은... 맘 놓고 조금 울었다. 사는 일에 대한 준비는 시행착오가 많으나 마련된 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죽음과 관련된 준비는 다 해두었다. 매년 업데이트하지만 별로 바꿀 내용도 없는 유서만 빼면. 삶의 마지막 기록은 뼈에 남았다 사라지는 거였구나.
하소연 같은 글을 쓰느라 두 권을 남겨 두고 분량이 다 찼다. 같은 장르, 모두 다른 주제, 단편들이라 한 권으로 다섯 작품을 만나는 호사를 누렸지만 단편 분량이라 또 아쉽다. 소처럼 말처럼 벌처럼 더 써주시길 바라는 부끄러운 욕심이 뭉게뭉게하다. 애정으로 봐주시기를.
두근거리던 심장과 간만의 설렘을 실망 하나 없이 찰랑하게 채웠다. 연말이 다가오면 다시 읽어 볼 예정이다. 일 년에 한 번 매해 첫 달, (일 년에 두 번으로 늘려 주셔요...) 새롭게 두근거릴 조우를 고대한다. 자이언트 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