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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ㅣ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평점 :
근래에 내 세대를 찾아가는 듯한 묘한 느낌으로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경험을 했다. 현실이 20세기로 빠르게 퇴행하니 그 흐름에 동참한 것인가. 한국판 스파이 액션 스릴러 <헌트>를 보고,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이 여전히 뛰고 구르는 모습에서 살아버린 세월을 오히려 진하게 느꼈다.
오래 전 보았지만 무척 좋아하는 배우들이 출연했음에도 기억이 흐릿한 이 소설 원작의 영화를 다시 볼까 하다가, 원작을 제대로 읽어 보기로 했다. 두 시간보다 더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이미 쉽지는 않다고 정편이 난 작품이라, 나 역시 쉽고 재밌으니 읽어 보시라 권하진 못한다. 그런데 그 도전할만한 높이의 벽이 오히려 재미라고 하면 설득이 되려나. 캐릭터를 구축하는 짧지 않은 약간은 수다스럽다 싶은 묘사도 나는 다 재미있었다.
차분하고 액션도 별로 없어서 뚜렷한 인상을 주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22년에 만나기에는 등장인물들이 시대에 특화된 특이한 캐릭터들로 보이기 때문에, 통상적인 사고방식과 행동과 구별되는 면면이 다양하다. 그 괴리가 인간, 인간성, 사회, 사회화 등에 대해 사유하는 단초들이 되어 준다.
“오늘날 이미 낡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낡기는 했어도 그의 시대에는 충성스러운 사람인 것이다. (...) 현대풍이라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 모든 바람에 떠밀려 가지 않는 것도 나름대로 명예로운 것이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붙들고 딱 버티는 것, 그 시대의 참나무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스파이들은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는 강력한 연대/유대감을 느끼고 직업과 세계에 대해서도 무척 진지한 태도를 형성했지만, 사실 그들이 하는 일의 정체는 그리 변변하지도 떳떳하지도 자랑스러울 것도 없다.
종교와 맹신, 신념과 광기의 얇은 경계에서 자리를 찾으며, 혹은 모두에 속하는 인물들이, 대의만은 거대하게 품은 모습들이 다른 무엇보다 ‘지난’ 시대를 진하게 느끼게 하지만, ‘몇 년도’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모두 함께 동시대를 산다는 증명일 수는 없다. 모두 각자 자기 시대를 살고 있다. 때론 의사소통이 되고 합의에 이르는 것이 기적일 만큼.
“누군가 도덕도 결국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 자네 그런 견해에 동의하나? 자넨 아마 동의하지 않겠지. 도덕은 당연히 목적 속에 들어 있는 거라고 할 테지.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그 목적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하는 거야. 특히 영국인의 경우에는 복잡하거든.”
생명을 바쳐 수호해야할 신념과 이념이 있지만, 그들의 목표는 믿는 것처럼 혹은 스스로 속이는 것처럼 인류의 구원이 아니다. 생각이 달라서 위협이 된다고 느끼는 상대를 죽이는 일이다.
어쩌면 인류는 거대담론의 이러한 모순과 비밀에 지쳐 다 포기하고 당장의 쾌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방식을 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믿음과 상상은 고단한 일이고, 그에 따라 사는 일은 더 위험한 일이므로.
“흠잡을 데 없는 자본주의자이면서도 혁명을 지지합니다. 혁명을 완전히 때려잡지 못할 거라면 그걸 감시하는 게 좋지요. 조지,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세요. 요즘은 그렇게 살아야 해요. 그게 중요해요.”
역시, 영화가 다시 보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하려는 사람에게는 늘 열 가지 이상의 핑계가 갖추어져 있지요. (...) 어떤 것을 하는 데 필요한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에요. 그건 자기가 원하기 때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