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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초록으로, 다시 - 나태주 한서형 향기시집
나태주 지음, 한서형 향 / 더블북 / 2022년 7월
평점 :
천연 오일을 품은 향기시집, 표지의 초록이 눈부시고 아름답다. 책점까지는 아니고 그냥 펼쳐 보았다. 첫 번째 시는 곤란하게도(?) 행복... 이다. 스트레스와 비례하는 오전 커피 탓에 속이 쓰리고 아프기 시작한다. 이럴 땐 좀 비딱해지는데...
<행복1>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한국인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이 짧은 시 속에 담겨 있는 듯. 돌아갈 집이 없고, 집을 구하긴 했는데 빚이 잔뜩, 혹은 평생 집을 구할 정직한 방법이 없어 보이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시절은 수상하고, 마스크는 불편하고, 시간도 없고 오르는 물가에 비용도 부담이라는 기사 제목을 직전에 보았다. 생각을 멈추지는 말자. 안부도 묻고 서로를 살피자.
혼자서 부르기 좋은 노래들이 표절이라는 흉흉한 소문들, 표절을 확정하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하고, 어차피 순수 창작은 10% 내외라고 하고, 아무도 증언하지 않는 게 관행이라면.
섭섭하고 화가 나는 건 창작의 퍼센트가 아닐 지도 모른다. 구전되는 노래들이라고 폄하할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거짓말, 거짓, 그 대가를 너무 자연스럽고 당당히 누리던 시간들... 모를 일이다. 어쨌든 판결이 난 건 아니니까.
위가 아프면 날카롭고 뾰족해진다. 향기를 힘껏 깊이 들이마신다. 다음 시는 무엇일까, 이번에도 그냥 펼쳐본다.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참 즐거운 시간이다.
<말>
하루 종일 버리고 버린 나의 말
사람들 가슴에 던지고 던진 나의 말
비수가 되지 않았기를
쓰레기가 되지 않았기를
(...)
이 시는 눈앞에 붙여 둬야겠다. 욕을 안 할 뿐... 내가 뱉는 말들의 음색이 말투가 표정이 비수처럼 날아간다. 이전에 한 결심은 다 무용하고 말이 시작되면 얼어붙어 단단해진 덩어리들이 탄환처럼 날아간다. 매번 참 싫은데... 도저히 멈춰지지 않아 말을 줄여보려고 한다. 가능한 묵언... 적어도 그 만큼은 감정을 덜 내뱉을 수 있겠지.
세 번째 우연과 행운, 오늘도 산책을 나가보라는 등떠밈인가.
<풀꽃 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을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
부모님 댁 베란다 화분에 이름 모를 풀꽃이 피었는데, 뽑지 말라고 보기 좋다고 하셔서 이젠 아주 튼튼하게 나무처럼 자랐다. 이름은 아직도 모르고 색깔과 모양은 안다. 이웃 말고 친구와 연인이 되어도 좋은 거지.
미적거리는 몸을 일으켜 오늘도 산책을 나서게 되면 친구와 연인을 더 만들어봐야겠다. 이웃은 못 되더라도. 색깔을 알고, 모양을 알고.
시집은 늘 좋은데, 향기가 담겨서 기분이 더 빨리 차분해졌다. 아직 통증이 느껴지지만 신기하게 허기도 느껴진다. 금방 읽을 수도 있고 외워볼 수도 있고 한참 생각에 녹여볼 수도 있고 오래 기억할 수도 있고 따라하다 나를 바꿔볼 수도 있고. 시란 참 귀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