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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ㅣ 창비세계문학 42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카프카는 천재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잘 모르겠지만 <변신>은 천재가 쓴 글이라 믿게 되었다. 벌레가 된 이유도 없고 감금, 배척, 혐오를 당하다 죽는 기대 배반적인 전개가 엄청났다. 소독약을 뒤집어쓴 듯, 단식으로 내부에 음식물이라곤 안 남은 듯 초기화되는 느낌이었다. 악몽을 꾼 후 현실이 도리어 낯설어진 기분이었다.
실존주의자이면서 혹은 실존주의자라서, 존재가 얼마나 불안한지를 이토록 강박적으로 촘촘하게 완성된 자신의 세계에서 뒤흔들고 위협하고 무화시키는 작가라니. 현실에 억압된 수많은 욕망과 충동은 꿈속의 장면처럼 발현했다 깨어난 꿈처럼 사라진다. 몰입할 때는 쾌감이 지극하지만 바로 내동댕이쳐진다.
몇 작품을 더 읽었고 <성Das Schloss>는 읽게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장편에 버금가는 분량에도 미완성 작품이다. 얼마나 안타깝고 궁금할 것인가. 천재적인 실존주의자가 바라 본 온갖 모순을 함께 목격하다가, 작품 속에서마저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하면 현실의 길을 잃은 듯 막막할 것이다.
창비출판사에서 골라 보내준 책을 보고 제목을 몇 번이나 읽었다. '성 The Schloss, 프란츠 카프카'. 내가 보는 것이 내가 보는 것이 맞는가. 운명주의자가 될 뻔한 순간을 간신히 넘겼다. 공들여 주창한 모든 변명과 합리화의 근거들을 그대로 안고서 기묘한 우연으로 닥친 기회를 펼쳤다.
저 멀리 뚜렷하게 보이는 성이지만 접근할 수가 없다. K는 토지 측량사로서 일을 하러 왔으나 일을 청한 사람도 허가도 사라졌다. 그저 물리적으로라도 가보려 하지만 그마저 불가능하다. 성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더 멀어져만 가고, 뭐라도 시도 할 때마다 더 깊은 곤경에 빠진다. 결국에는 불법 체류자로 숨어 살게 된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주인공의 이름이 K라는 것이 눈에 띈다. 마을의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일반적인 이름이고 유래를 설명하는 각주도 있다 - 예) 라제만 Lasemann <- lazen 목욕, 체코어. 그래서 K는 이방인인 것이다. 마을에 속하지 못하는, 이해 받지 못하는, 역할을 가지지 못한 자이다. 함께 할 수 있는 구성원이 아닌 것이다.
이 마을에 도착한 순간부터 K는 필요 없는 측량사, 조수에게 무시당하는 상사, 약혼자를 빼앗기는 남자가 되었다. K가 뭘 하든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신분 추락을 경험한다. 추락한 깊이 만큼 성은 더 멀어져간다. 애초에 K는 성에 접근할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었는데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사람은 아무리 격려해 주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법이지. 천을 벗어야만 볼 수 있어.”
위계의 정점에 위치한 성과 철저하게 복종하는 마을 사람들의 관계는 불합리하고 불명확할수록 더욱 강화된다. 성에서 내려 온 명령은 무엇이든, 관리들의 모든 권위는 의심받는 법이 없다. 실체가 모호해 신적 권위를 갖춘다. 잠든 것과 깬 상태가 구분 되지도 않는 관리들의 직무란 관습의 존속과 스스로 관습 자체가 되는 것이다.

도중에 망상에 끌려 들어가기도 하고 꿈을 꾸듯 시간 한 단락을 잃기도 잊기도 했다. 성을 감싸고 성을 실존시키는 비대면 신비주의에 정신이 어지럽다. 아무 가능성도 없는 계층 상승을 꿈꾸는 이들이 색색의 풍선처럼 부풀다 찢어진다. 잠시 자유를 궁금해 하던 에로스는 아늑한 관습의 자리로 돌아간다.
“우리를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를 멸시하기로 결심하면 그것만으로도 모든 사람이 속한 무리에 한몫 낀 셈이 되는 걸요.”
제가 만든 상상과 망상에 목숨을 걸고 목숨을 빼앗으며 복종하는 인간(스러움), 배경 음악과 비명이 난무하는 놀이동산에서 설탕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어지러운 사람처럼 어지럽다. 질서는 올바른 판단이었던 적도 안전한 적도 없었으니, 이들처럼 전혀 모르거나 모른 척 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무엇인가.
“민원인은 잠자코 앉아 있는 것만으로 벌써 그의 가엾은 삶 속으로 들어와 달라고, 그 삶이 당신의 것인 양 여기고 노력하고 그의 쓸데없는 요구에 공감해달라고 요청하는 거죠. (...) 그러한 초대에 따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실상 관리이기를 포기하는 거죠. (...) 엄밀히 말한다면 자포자기의 상태, 더욱 엄밀히 말한다면 무척 행복한 상태라고 할 수 있어요.”
타인을 대상화하기를 멈추는 순간, 실존이란 자포자기, 매혹적인 초대, 행복한 상태, 관료 시스템의 균열, 무결점으로 선전된 이데올로기의 거부이자 파괴이다. K의 추락하는 삶을 따라다니는 일은 무척 피곤했다. 온 세계가 협력해서 K를 노리고 있는 듯해 긴장이 팽팽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는 피로함이다. 환상 체계 속 K도 실재할 수만은 없을 터.

의미 없는 이니셜뿐인 이름을 가진 K의 직업은 거대한 의미를 내포할지 모른다. 토지 측량사 Landvermesser는 히브리어로 'maschoach'이며, ‘메시아 maschiasch'와 유사하다고 역자는 주석에 설명한다. 미완성이 아니었다면 결말의 K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어떤 역할이 맡겨졌을까. 환상에서 깨어나는 사람들, 실체를 드러내고 붕괴하는 성도 볼 수 있었을까.

내게는 도착하길 바랐던 ‘성’이라는 구체적인 목적지가 있었던가. 도착을 하지 못한 이유는 구부러진 길이었나, 방향을 못 잡은 나인가, 혹은 잊고 만 다른 이유인가. 나는 마을 사람으로 정착한 걸까, 이방인이 되어 다른 길로 나섰던 것일까. 사회적 존재로서 소외감을 느끼는가. 실제로 소외되고 있는가. 그렇다면 고민할 것인가 모른척할 것인가. 가려고 했던 그 성을 그리워도 하는가.
“어서 가보세요. 저편에서 어떤 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여기서는 모든 것이 기회로 가득하니까요. 물론 어떤 기회들은 이용하기에는 너무 크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좌절을 맛보기도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