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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 -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살아낸, 끝날 수 없는 생존의 기록
김잔디 지음 / 천년의상상 / 2022년 1월
평점 :
머릿속에 혼선이 온 듯 불쾌한 소식을 들은 날, 나는 가해자로 지목된 박원순 시장의 답변을 애타게 기다렸다. 행방불명 소식이 들릴 때도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대한민국 수도의 3선 시장이자, 시민운동가, 인권변호사로 살아온 삶을 걸고 답변을 주기를 기다렸다.
그가 생을 끝냈다는 확인 보도가 나왔다. 들끓던 머릿속도 불안하던 마음도 의미를 상실하고 쓰디쓰게 폐기되었다. 나는 그날을 이렇게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김지은입니다>는 잠시의 마음 다지기를 한 후 걱정보다 무난히 완독했고 육성이 담긴 오디오북을 들으며 편히 눈물도 나왔다. 그에 비해 이 책은 너무 아파서 자해를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읽기가 쉽지 않았다. 눈물이 아니라 땀이 흘렀다.
분노로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체증처럼 답답하고 위가 아팠다. 손가락을 문장에 대고 옮기며 꾸역꾸역 읽었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이 걱정하는 후폭풍과 끈질기게 힘들게 할 미래의 계산보다 당사자가 전하는 진실이다. 읽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마음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어떤 악의가 있어야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부주의한 게 아니었고 의도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의 야만적인 이기심에 가슴이 쓰라렸다. 나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인가, 나의 피해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인가. 나는 그냥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감사하게도 피해자가 살았기 때문에 나는 읽기 전보다는 힘이 붙은 마음으로 이 책을 통해 인지한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성폭력 사건이 본질이지만, 읽을수록 내 분노는 다른 내용에도 옮겨 붙었다. 실은 <김지은입니다>를 읽으면서도 동일하게 느낀 점이다.
김잔디(가명)씨는 서울시 ‘공무원’이다. 그러나 노동환경은 한숨이 모자랄 정도로 봉건적이고 종속적이다. 김지은, 김잔디 두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참모진들이 비슷한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고발이다. 예외이길 바랄 정도로 열악하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휴일에도 수시로 연락받고 지시받는다. 사적인 것, 공적인 것이 뒤섞이고 업무량 자체도 과도하다. 단언컨대 이 불법 관행은 유구한 역사가 있을 것이다. 아프고 충격적인 것은 인권변호사였던 시장의 이력이다. 노동과 인권과 여성은 같은 문제가 아니었을까.
서지현 검사의 미투와 김지은씨의 고발 이후 불어온 변화의 바람이 어디가로는 꽁꽁 막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 쉬운 희망을 그렸다는 것이 고통스럽다. 가해자 스스로의 개과천선은 없다는 것, 범죄는 고발과 처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본인이 바라는 모습으로 잘 사시길, 밝고 즐겁게 사는 삶이 힘이 되어 한국사회의 음습한 것들을 우리도 더불어 물리칠 수 있길 응원한다. 공무원이었던 김잔디씨조차 피해사실 고발에 애를 먹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른 피해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반드시 개선시켜야 한다.
표현한 적은 없지만, 고소장이 접수되기도 전에 피의자 측에 그 사실이 알려졌다는 반칙을 두고도, 아주 잠시 전혀 모르던 당신을 의심했던 것, 어쩌면 거짓이나 조작이길 바랐던 마음에 대해 이 글을 통해 깊이 사과드린다.
“이번 파고는 넘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이 끔찍한 비극을 누가 만들었는가. (...) 우리는 지금보다 괴롭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는 조금 더 살 만 한 사회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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