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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롱보다 몽롱 - 우리 여성 작가 12인의 이토록 사적인 술 이야기
허은실 외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2월
평점 :
홀짝이는 버릇 탓에 기대처럼 기분 좋게 빨리 몽롱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조금은 둔해진 통증이 있고 덕분에 야박한 수준의 여유도 생겼다.
눈이 어두워질 정도도 아니고 머리가 무거워질 정도도 아니고 숙취는 더구나 아님에도
이 책의 마지막 몇 장을 손끝으로 줄을 긋듯이 천천히 읽고 다시 읽고 있다.
도수가 점점 올라가는 순서로 테이스팅 하는 자리에 초대된 기분이다.
“왜 과거의 ‘나’들은 항상 즐거워 보일까. (...) 뭘 몰라서 그럴까. 그렇다면 뭘 몰랐을까. 나는 매일 뭔가를 알게 되면서 어두워지고 있는 것일까. 그저 지금 이 순간의 빛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일까.”
“나를 포함해서 그게 누구든. 우리는 오늘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만 기쁘고, 같은 실수를 세 번 반복하지 않을 정도로만 슬펐으면 좋겠다.”
저자의 술에 관한 룰을 읽으며 술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비슷비슷한 룰이 필수라는 생각을 거듭 한다. 여러 술자리의 여러 장면들을 보고 오래 생각한 것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어떤 내용은 동류를 만난 듯 반갑게 읽는다.
- 즐거울 때만 마신다. 그게 단둘이든 여럿이든.
- 울음이 언제나 생산적일 필요는 없지만, 눈물을 잘 쓰자.
- 혼자서는 잘 마시지 않는다 : 이건 이제 자신이 전혀 없다...
- 안주는 중요하다 : 중요한데... 안주를 준비하는 일에도 만드는 일에도 차리는 일에도 먹는 일에도 지치고 싶지 않다. 이건 내가 식도락이 부족해서 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유연하게 나를 이끌고 밀어주었던 술 마시는 마음들, 살면서 가 본 적 없던 곳으로 여행을 하는 건, 누군가를 새로이 알아 가는 일 같다. 새로운 술을 맛보거나, 낯선 곳에서 술 마시는 일도 그렇다.”
당시에는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내게 새 술을 가르쳐준 분들과의 시간이... 시간이 지날수록 귀해진다. 언제든 같이 마실 수 있으리라 여긴 미숙한 젊음... 몇 분과는 이번 생에는 다시 함께 술을 맛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발견한 맛있는 술보다, 누군가가 권한 술을 더 자주 마시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에서야... 그래... 그런 것 같다.
“종종 자신의 생각을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것은 알아차리기 어려운 권위와 권력을 가지게 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계 안에 매몰되어 있으면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알고 있는 채로, 어제보다 오늘 더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행위를 경계하는 것.”
“어떤 분명한 의도가 있는 말을 하고 어떤 분명한 의도가 있는 말을 삼키고 다시 한 잔 마시고. 조금씩 술맛을 깨닫는다. 생의 착잡함을 알아 버린 사람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돌아 마주하게 되는 것들. 뭉개지고 잘게 쪼개져 형체를 잃어버린 것들. 인간이, 물질이, 현실이 아닌 것들. 언어는 그 순간 발명된다.”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것들. 스스로 구원하고 구원받는 것들. (...) 세계가 빛을 잃어 가는 동안에도 조용한, 맑은 마음을 기다리자. 진창이 바삭하게 마르듯이.”
두 잔 다 마셨다.
책도 다 읽었다.
Still Life:
Two Glass Of Red Wine,
A Bottle Of Wine;
A Corkscrew And A Plate Of Biscuits On A Tray,
Art Painting by Albert An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