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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부터의 탈출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12월
평점 :
인간은 신기한 개체이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은... 여전히 서늘하고 떨리지만 ‘의미’나 ‘가치’가 있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원자의 결합과 해체이다. 유전자는 이어져도 개체는 고유성을 잃고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의식’을 가진 생물로 진화했다. 체력이 좀 나았던 20세기에는 인간의 의식이 왜, 어떻게 창발emerge하는지가 궁금해서 생각을 오래 했다.
그러니 삶의 의미meaning of life는 각자가 부여한 의미의 수명life of meaning만큼만 가치가 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인간이란 무엇인지, 무엇이여야 하는지... 그런 질문들이 좋다. 지구의 지배종인 된 것으로 만족했는지 스스로를 망칠 일을 열심히 하는 지금은 인간이 더 신기하고 신비롭다.
고바야시 야스미는 ‘죽이기’ 시리즈를 내내 쓰다가 - 앨리스도, 클라라도, 도로시도, 팅커벨도 죽였다 - 마지막 유작으로 이 작품을 남겼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윤리란 무엇인지를 물으며. 사이언스키즈로 사회화되어 어른이 되면 미래세계에서 우주인으로 살게 될 줄 알았던 나는 SF 문학의 오랜 팬이다.
지금은 SF와 현실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지만 현실에서 미처 인지하지 못한 모습들을 여전한 충격을 주며 펼쳐주는 SF 미스터리는 좋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의 3대 원칙’에서 전개하여 여러 충돌을 다루는 방식도 재미있다.
“물론 진짜 인간은 아니야. 진짜 인간을 만드는 건 34원칙에 위배될 우려가 있거든. 진짜 인간은 인간에게 위험하니까 못 만들어. 인공지능이 만드는 건 안전한 인공지능 로봇이지. 안식처에서 너희를 돌보는 그런 로봇.”
작품 속에서 인간은 본격적으로 스스로를 개량해서 ‘원조 인류’와 다른 ‘변이 인류’가 등장했다. 그리고 인공지능로봇은 사회구조운용의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다. 원칙을 지키는 인공지능로봇과 대비되어 여전히 동종 인간을 해치려는 인간의 모습을 보는 일은 씁쓸하다.
한편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원칙, 규칙, 수칙, 법, 성과, 결과가 판단과 평가 기준이 된 사회구조가 내재한 문제점은 무엇일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윤리’란 무엇일지 집요하게 묻는 방식도 흥미롭다. 판데믹 시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어휘들과 때론 겹치기도 했다.
상상의 세계가 아니더라도 모호하고 유약하고 실수투성이인 인간들은 빅데이터영업이 일반화되고 알고리즘사업이 확대되는 사회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판데믹 시절에 내가 당황하고 분노한 감정의 기저에는 ‘당연하게 누리고’ 살 것이라 여긴 것들의 제한과 박탈이 있었다. 작품 속 사부로의 분노가 감각적으로 이해되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부로는 갑작스레 분노를 느꼈다. 무엇에 분노한 건지는 본인도 몰랐다. 기억력이 시원치 않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걸까. 아니면 자신을 포함하여 그와 같은 노인들을 바보 취급하는 이 시설의 시스템에 화가 난 걸까. 혹은 노화라는 현상을 생물에게 부여한 신에게 화가 난걸까.”
물리적 비대면이 심리적 대면을 더 친밀하고 공고하게 해줄 것이라는 낙관도 있지만, 이 시절에도 늘 할 수 있는 한 도움을 주고 받고 사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도 알지만, 협력과 연대는 이제 해시태그와 후원하기의 클릭으로 정리되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
인간에 대한 질문을 만나면 내 기억은 집요하게 한 작품으로 되돌아간다. 내가 나 일 수 있는 증거는 기억 밖에 없구나, 하고 몹시 놀랐던 그 경험으로. 기억을 잃은 나는 이전의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게 된다는 충격의 순간으로, 인간이란 기반이, 고유성이, 기록이, 역사와 처음으로 만난 것과 같았던 그날로.
https://www.youtube.com/watch?v=NoAzpa1x7jU
Roy Batty:
"I've seen things you people wouldn't believe. Attack ships on fire off the shoulder of Orion. I watched c-beams glitter in the dark near the Tannhäuser Gate.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coughs] tears in rain. Time to die."
“그래도 너희를 위해서야.”
“기억을 봉인하는 것도?”
“괴로운 기억은 없는 편이 낫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