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저쪽
정찬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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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헛소리들로 미세먼지 퍼진 것처럼 부옇게 될 때마다 쨍하는 글로 정리해주는 칼보다 날카로운 사유와 필력나는 정희진 작가의 팬이다때로는 제목만으로 등줄기에 얼음과 불이 동시에 지나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죽지 않을 만큼 때리고 사과와 화해랍시고 꽃선물을 하는 가정 폭력의 장면제목만 보고 펼쳐 읽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정찬 작가 소설을 읽고 무슨 얘기인가 하실 텐데정희진 작가는 정찬 작가에게 아주 큰 영향을 받았다고 거듭 언급하곤 했다그래서 나의 연상도 기록도 이렇게 겹친다창비에 연재를 시작하셨단 소식에 놀라고 설렜다감사히 선물 받은 책을 뒤늦게 감사히 읽어 보았다.

 

젊음도 학업도 사랑도 삶도 유예되곤 했던 시절, 1970~80년대를 살며 만나 사랑했고 27년 만에 다시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이렇게 정리하니...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이다현실이 엄혹하고 끔찍할수록 젊은 생명들이 가진 기쁨과 슬픔은 묘하게 빛난다.

 

지금도 기막힌 일들이 지천이지만불과 몇 십 년 전인데 유신체제와 군사쿠데타로 이어지던 시절의 자유는 숨 막히게 억압당했고 불의와 부정이 세상의 전면에서 판치던 시대였구나 싶다.

 

누군가는 수배도피수감으로 생을 소진하고누군가는 그의 지인이라는 이유로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성폭행를 당하기도 했던가장 책임이 큰 주범 중 한 명이 사과도 없이 잘 먹고 잘 살다 얼마 전 편안히 집에서 생을 마쳤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들 투성이지만 살아남아서 재회할 수 있어서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사람을 위로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은 어떤 형태이건 얼마간이라도 사랑을 느끼는 일이구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자신의 생을 스스로 끝낸 청년이자 시인그리움과 사랑을 꿈꾸며어린 시절의 강변을 보며 자신의 존재를 소멸한 또 다른 연인살아남았지만 그 대가로 자아를 분열시켜야했던 삶이 유린된 여성.

 

무력하고 비참하고 아프고 슬프고 힘겹고 두려운 혼란 속에서 살아갔던 이들에게현실의 모습이 어떤 모양새로 어그러져도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물줄기처럼 사랑은 닿을 수 있었기 때문에폭력과 상처가 너무 커서사랑이라는 약처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프고 눈물이 난다.

 

저쪽은 나는 걸어본 적 없는선택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피해갔을 길... 이었을 것이다나처럼 이해득실을 재빨리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은 젊은 시절에도 걷지 않았을... 꿈과 희망과 기대로 생겨나고 다듬어진 길이다.

 

역사의 보폭은 느리고 한 인간의 삶은 너무나 짧으니 사람마다 자기 생애에서 무언가에 승리하는 것이 쉽게 허용되지 않지만적어도 스스로에게 패배하는 인간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는 그분의 말은 저의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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