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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큐레이터 - 박물관으로 출근합니다
정명희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1년 11월
평점 :
어릴 적이었다고 해도 직업의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세상엔 직업이 몇 개 없는 줄 알았다는 것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태로 자라 전공학과를 정할 때조차 직업군에 대한 변별력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뭉뚱그려서 교육자, 과학자, 공무원... 이런 정도였달까.
그러다 무척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어느 잡지 기고 글에 직업이 ‘여행가’라고 표시된 것을 보았다. 여행가?! 뭐하는 직업인지도 몰랐지만 그보다 이런 직업이 가능하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직업의 세계가 우주 탄생의 순간처럼 개념적 빅뱅이 일어났다.
진로를 변경하지도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직업을 택하지도 안(못)했지만, 그 후로는 늘 부러움과 질투가 스며든 시선으로 타인의 직업을 상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세상에는 재밌고 멋진 직업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 중 하나가 저자의 직업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인데, 제목을 보라, ‘한번쯤’... 여유로움과 느긋한 그 느낌에 내용을 읽기 전에도 엄청나게 부럽다. 더 멋진 명칭은 학예연구사이다. 규모로 최고를 가리는 방식은 민망하고 유치할 수도 있지만,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은 2005년 개관 당시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전시관들의 내용도 충실하다.
세상에 처음부터 끝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우아할 수 있는 직업은 없다. 학예사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책 내용에 무척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담아 주셔서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반짝반짝 신비롭고 재미날 것만 같은 기대는 바사삭 흩어진다. 그럼에도 그 모든 물밑작업(?)이 멋지다.
일단... 물건 정리, 관리, 보존이 무서운 나를 벌벌 떨게 하는 전시관의 무려 수십 배에 달하는 수장고 유물들 - 그냥 물건도 아니고 유물들! -을 관리 보존하는 일이 어마어마하다. 테마를 정하고, 그에 맞게 전시할 유물들을 정하고, 전시 기획하고, 전시하고, 정리하고, 정리 보존하고, 다시 처음부터...!
삽화가 별로 없지만 유심히 본다. 진짜 작업복에 진심인 직업이다. 치마, 넥타이, 액세서리, 신분증 패용이 모두 불허 물품들이다. 이전에는 바지 밑단을 양말 속에 넣었다고 한다. 읽다 보면 큐레이터 이외에 다른 직업들도 만난다. 한글 발음으로 적으니 어색하기도 한데,
- 레지스트라 : 소장품관리사. 소장품을 구입하거나 기증, 기탁하는 업무. 국가에 귀속된 발굴매장문화재를 관리하는 일.
- 컨서베이터: 보존과학자. 유물들이 전시 환경에 노출되어도 안전한 상태인지 판단하고, 보관과 전시에 적합하게 보존 처리. 유물의 관리와 복원 담당.
숨 막히게 조심스럽고 치밀해야하는 직업이다. 전 과정을 다 읽으면 이런 일을 반복하는 분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상상을 초월하는 협업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경력’으로 정리 기록되는 것이 뭔가 울적하고 억울하다.
유물과 전시에 대한 충분한 애정과 체력과 진심이 필요한 일이고 그래서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업무 부담이 어마어마해서 차라리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싶다, 전시회 끝날 때까지만 입원하면 되는 정도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싶다... 라는 말들은 얼마간은 진심일 것이다. 그래도 사고는 안 됩니다!
전시란 수많은 진행과정이 각자의 마감을 가지고 착착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다. 한 두 번이 아닌 마감을 모두 클리어하며 달리는 분들에 마음이 짠하고 아프다. 심정적으로 고단을 공감한다.
큐레이터는 전문성이 아주 진한 직업이라 생각했는데 맡은 업무가 이렇게 포괄적이고 총괄적인 줄은 몰랐다. 아무리 봐도 한 사람이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다. 누가 좀 잘 도와주시길! 전시회에 룰루랄라 가볍게 즐겁게 즐기고 평가도 쉽게 한 지난날을 반성해본다.
그리고 너무 무서운 내용을 읽었다. 박물관 귀신... 이야기가 아니라, 관람객을 위한 감동의 글, 보도자료, 언론인터뷰 등등 무척 많은 글을 쓰는 직업인데... 저자는 저장을 잘 못해서... 다 쓰고 날아간 글들이 있다고 하니... 너무나 무서웠다.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됩니다! 다행스러운 일은 다시 쓴 글이 더 좋을 때가 많았다는 점! 역시 인간의 능력은 위기에서 본격 발휘되는 것인가.
그리고 문화재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닌데 전시를 위한 문화재 반출을 부탁하러 간 학예사에게 ‘도둑이 들고 가는 거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 건 무척이나 잘못된 질문이라 생각한다. 왜 부탁을 해야 하는가? 전시를 위해서는 전시 기획의 타당성만 입증되면 반출할 수 있는 관련법은 없는 건가?
뭔가... 힘든 이야기만 잔뜩 쓴 거 같은데 그건 독자로서 나의 감정 이입의 결과물이고 책은 또 다른 별개의 멋진 기록이니 부디 오해는 마시고 반갑게 한번쯤, 큐레이터의 세상을 만나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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