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 1 (양장) 소설Y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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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상공을 덮은 한랭한 대기가 서서히 지나가는 시간이다겨울이 따뜻해서 계절을 잃은 새싹들이 흙을 뚫고 나온다는 소식이 들리는 시절이라 적응을 하지 못한 손과 귀가 얼어붙었다공기가 쨍하니 이마가 서늘해서 정신은 조금 맑아지는 듯하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안전하게 추위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예전엔 요란함과 소란스러움이 잦아드는 겨울이 참 좋았는데 이제는 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생명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 작품 속 세계는 내가 사는 판데믹의 세계보다 더욱 황량하고 처참하다그래도 어떻게든 적응을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위안과 힘을 얻는 방식도 존재한다그러나 매일 누군가에게 만족과 웃음을 주는 일이란 사실 기획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기쁘고 즐겁고 신나는 일이 뭐가 그렇게 자주 있을까더구나 이런 세상에서.

 

바깥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텔레비전 속 액터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며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따뜻하고 부유한 삶을 누리는 그들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하고온갖 극적인 상황에 휘말려 고통받는 그들의 드라마로부터 오히려 안도감을 얻기도 한다.”

 

현실의 독자들인 우리가 영위하는 방식과 달라 보이지 않지만차이점은 스노볼에서 제작되는 드라마는 모두 연기가 아니라 실제 삶이라는 것이다리얼리티 쇼의 인기는 이미 시작된지 오래이긴 하다타인의 삶이 담긴 시공간은 왜 흥미로울까.

 

그렇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하루종일 편집 없이 그대로 지켜보는 것은 불필요하고 지루한 것이다그래서 디렉터는 (...) 자신이 판단하기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추려서 근사한 이야기로 만든다.”

 

한국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일 년은 사계절이라 믿고 경험하며 살았다여전히 그렇긴 하지만 계절이 서로 섞여들기 시작하고 경계가 모호해진 것도 사실이다날씨는 짐작과 기대를 자주 우습게 만들었고우리는 그래도 이름이 남은 계절감을 최대한 찾아보려 한다.

 

스노볼에는 사실상 날씨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거대한 유리 천장으로 둘러싸인 밀폐된 땅에는 (...) 그래서 스노볼은 인공적으로 날씨를 만들어낸다. (...) 그리고 이러한 날씨를 뽑는 사람이 바로 기상 캐스터다.”

 

이 정도면 살만한 안전한 환경인건가그런데 인간의 최고 약점이자 운명은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에너지를 찾아 먹고입고그 외 모든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마지막 남은 발전소는 원전 핵발전소 이다생존과 관련된 장소이기도 하고혹시나 사고가 생기면사고가 없더라도 방사능 폐기물을 처리하지 못하면 남은 인류도 멸종한다.

 

온기와 평화의 대가는 늘 있게 마련이지만 짐작보다 잔혹했다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시스템을 어찌되었든 유지해나가는 것이 현실이기도 해서 머리가 무거워졌다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근본적인 해결을 하지 않는다그러니 아무리 사람들이 일하다 죽어도 죽지 않을 환경을 만들기보다 보상금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스노볼이 여전히 따뜻할 수 있는 이유는 기적적인 지리 환경 덕분만이 아니라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버린 사형수들이 작동시키고 있는 미지의 발전소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인간이 태어나면 생존을 위해 적응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이 때의 환경은 주어진 그대로이다그래서 적응에 성공하면 획득한 모든 삶의 방식이 당연해진다예외와 돌발이 불편해지고 뭐라고 바꾸는 일이 피곤해진다그런 노력 대신 더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 기회를 더 많이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사회는 그런 욕망을 원료로 작동되기 때문에 사회구성원들을 목적에 맞게 사회화시키고불행은 각자의 일로 설명한다인간이 모여사는 일은 필연적으로 사회체를 구성하는 일이라 스노볼의 세상 역시 마찬가지이다문제는 얼마나 그 비밀이 어둡고 격차가 끔찍한가이다.

 

타인에게 이용당하려 태어나거나스노볼을 유지하라는 사명을 타고난 사람의 세상은 처음부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근데 우리가 쓸 전력을 생산하는 게 착취라니물론 지금의 삶이 천국은 아닐지라도 이보다 나은 선택은 없어.”

 

이본 미디어 그룹은 백 명이 넘는 사람의 기억과 목숨그리고 인생을 가지고 놀고 있다이들이 전부 사형수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본의 잘못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이 정도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바이러스에도 추위에도 계속 일하는 이들이 많다그들이 부당하게 일하지 않도록 그런 부분이 근절될 때까지 완전한 파업을 한다면 나는 기쁠까얼마나 오래 지지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이 부러운 점은 세상이 멸망했고노출되면 모두를 죽이는 바이러스가 있다는 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점이다손쉽게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자신들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고 조작했다는 점이다그리고 그걸 밝히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

 

평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세상을 바꾸는 거야나를 향한 금기와 한계를 깨기 위해나와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의 안전과 평온을 위해원래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기꺼이 감내하고 이어 가는 것그게 세상을 바꾸는 일의 본질이야.”

 

그래서 스노볼의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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