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데니스 존슨 외 지음, 파리 리뷰 엮음, 이주혜 옮김 / 다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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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세계 속에 오래 머물며 푹 잠기는 느낌의 장편들을 좋아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재작년에 단편집 추천을 받아

퇴근길에 한 편씩 읽으며 아마 처음으로

단편 문학의 정체를어렴풋이,

기발한 설정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을,

날카로운 충격처럼 느껴지는 순간적인 이해를,

상상력을 동원해서 채워야하는 참여 요구를,

배웠던 것 같다.


9편의 작품을 모두 읽고

금단 증상처럼 다음 날부터 아쉬움이 찾아왔다.


그 이후로 단편집 소식을 들으면

활짝 웃게 되고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리 피곤해도 때론 대여섯 쪽 안에 모두 써 준

놀라운 작품 한 편을 읽을 여유와 체력은 충분한 것도 감사하다.


재밌는 단편들을 많이 만났다고

단편이란 이런 거구나 짐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 담긴 단편들은 또 특별하다.


문학잡지 <파리 리뷰The Paris Review>*의 문학 실험실에서

태어난 새로운 글들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추천받아

만든 선집이고그 중 3편이다.


편집부의 글처럼 단편 작품에 대해 즐겁게 새롭게 배운다.

소설의 형식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얼마나 큰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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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당시 출판 산업과 문학 교류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창간된 영문학 계간지.


“<파리 리뷰>는 요란한 선동가나 음모꾼이 아닌 좋은 작가들과 시인들을 환영한다잘 쓰기만 하면 언제든지” (윌리엄 타이런 작가).

 

노벨문학상이나 퓰리처상부커상을 수상한 작가의 글쓰기 철학이 궁금하면 <파리 리뷰>를 찾아보면 된다.”

 

** 이 책의 원제인 ‘Object Lessons’는 실물 교육이라는 뜻작품 뒤에 배치된 해설을 통해 공부가 되는 함께 읽기도 할 수 있다.

 

1


<히치 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폭우가 아스팔트를 할퀴며 푹 팬 바퀴 자국 속으로 콸콸 흘러들었다딱하게도 내 생각이 질주했다출장 중인 세일즈맨이 혈관 내막이 벗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약을 먹였다턱이 아팠다나는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일어나기도 전에 모든 일을 감지했다. (...) 차에 탄 가족의 다정한 목소리만 듣고도 우리가 폭풍우 속에서 사고를 당할 것을 알았다.”

 

그가 더는 버티지 못하리란 것을 나는 알았지만 그는 몰랐고그래서 나는 지상의 한 인간의 삶을 향한 지극한 연민을 품에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우리는 결국 모두 죽는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그것은 지극한 연민이 아니다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그는 내게 말할 수 없고나는 무엇이 현실인지 그에게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폐란 얼마나 대단한가어디선가 독수리가 소리를 지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여자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살아서 그 소리를 듣다니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나는 늘 그런 느낌을 찾아다녔다.”


관습을 부수는 통렬하고 날카로운 서사 제프리 유제니디스


단편소설은 개념대로라면 반드시 짧아야 한다그것이 단편소설의 어려움이다그렇기에 쓰기가 매우 어렵다서사를 간결하게 하면서 이야기로서 기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단편소설 쓰기의 주된 문제는 무엇을 생략할지를 아는 것이다남겨진 것은 반드시 사라진 모든 것을 함축해야 한다.”

 

잠시 내 정체성을 잃고 밑줄을 막 그을 뻔...!

 

신기하고 다행한 우연은 어제 읽은 단편이 (아마도조현병을 다루는 심리스릴러였다는 점이다유사한 읽기 훈련을 거친 듯 이 작품을 만나 약물중독환각환시환청을 겪는 주인공을 경험하는 일이 불편하지 않다병명을 알고 병증을 이해한다고 해서 고통과 경험까지 아는 것은 결코 아니다질문도 의심도 필요 없다아쉽도록 짧고 약물에 취한 듯 전개되는 느린 속도의 이 작품은 단 몇 줄로도 기대할 수 있는 갖가지 사건과 징신적 긴장과 공감각적 서사를 진하게 맛보게 해준다.

 

2


<어렴풋한 시간>


뭘까처음 읽으며 일독으로 정리되는 게 별로 없겠구나 싶었다재독하니 의 연대기가 그려진다가엾게도 태어난 것뿐인데 그런 불행이 연이어 닥치다니그렇다고 뉴스거리가 될 만한 극적인 사건과 희생이라기보다평범한 장소평범함 사람들평범한 동네(풍경), 평범한 일상이다누구의 삶에도 내밀하게 명멸한 격렬한 사건들은 있기 마련이지만단편에서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게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와 서사들이 이어진다분명 단편이나 결론에 이르면 오랜 여행으로 지친 기분이 든다시작부터 죽어 사라진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가 채워지기 보다는 남은 아이 을 외국으로 띄워 보내는 작가의 선택이 저릿할 정도의 외로움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같이 생생한 글 다니엘 알라르콘

 

3


<춤추지 않을래>


괜찮아. (...) 내 집인걸. (...) 춤을 춰도 돼.”

 

“(...) 우리는 완전히 취해서 춤을 췄어진입로에서 말이야. (...) 그 사람이 우릴 위해 이 레코드들을 틀어 줬어. (...)”

 

여자애는 계속 말했다모두에게 말했다.

뭔가 더 있었지만그 모든 것을 다 말로 할 수는 없었다.

얼마 후 여자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위대한 이야기는 영원한 가려움 데이비드 민스


주어진 거라곤 조금 더 큰 존재의 작은 조각사소한 것들의 집합체관점의 전환몇 주 늦게 듣는 진술이 전부다.”

 

카버는 (...) 엄청난 세심함과 강렬한 지성으로 작업했다. (...) 자신의 이야기를 세심하게 길러 나가면서 때로는 감출 만큼 영리하기도 했다. (...) 그는 자신이 뭘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그는 한 줄 띄우기의 힘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궁금하다란 표현 대신 가렵다,는 말을 써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단편이란 이렇게 심굴궂게 재밌을 수도 있구나싶은 작품이다싫은 점은 전혀 없다하지만 이 문장과 저 문장 사이이 문단과 다음 문단 사이에 도대체무슨 일이일어난 것인지가려워서 미칠 지경이다상상력은 경험의 산물이다나는 도무지 싹을 틔울 경험을 데려올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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