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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김남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한 번의 삶에서도 사람은 여러 생을 살 수 있다. 어느 순간의 선택으로 인한 변화가 격렬할수록 생이 나뉜 풍경을 연출한다. 내 과거는 종종 전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의 저저가 펼쳐 놓은 삶의 면면들이 내가 전생에 경험한 내용들과 너무 자주 겹쳐서... 반갑고도 불편했다.
이렇게 살 거라고 생각한 것들, 한동안 그렇게 살았던 것들, 이젠 그런 시간과 유사성이라곤 없는 삶을 살면서도, 이 삶은 가짜이고 바꿀 수 없이 나를 구성한 것들은 모두 그 과거에 있다고 믿는 그런 이야기들...
“내가 선택한 삶의 길을 만족하며 살아가지만 이렇게 계속 가도 괜찮은 걸까. 생의 마지막날까지 여행을 하고 글을 쓰며 살아갈 수 있을까. (...) 밥벌이는 언제까지 가능할까.”
내게 해를 가하지 않은 저자를, 그의 삶을, 그 탓에 원망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내게로 향하는 분리배출을 미룬 감정들이다.
“서른을 넘긴 후 나는 늘 혼자 살아왔는데, 정말로 혼자였던 날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매 순간을 타인의 친절에 기대어 살아 왔다.”
“오늘도 작은 호의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건너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고, 삶의 품격을 지키며 남은 생을 살아내는 사람이고 싶다.”
아주 오래 나는 궁금했다. 뉴스에 등장하는 나쁜 사람들은 어디에 그렇게 많이 살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평생을 타인의 호의와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다. 가장 가까운 타인들인 가족들은 물론이고, 전혀 모르는 이들, 아주 잠시 시공간을 나눈 이들, 심지어 언어도 통하지 않던 이들까지.
세상은 ‘호의’와 배려를 기꺼이 나눠주는 친절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평소에는 다들 할 일을 하며 살고 있다가, 누군가가 곤경에 처하거니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이가 손을 번쩍 들고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한 겨울의 눈이 펑펑 내리는 부다페스트에서 커다란 가방을 끌고 도대체 이 지도는 왜 이렇게 불친절한가... 헤매고 있을 때 잡화점, 교회, 식당에서 거리로 나와서 알지 못하는 언어로 묻고 전화를 걸고 약도를 그려준 이들을 떠올린다. 이럴 때 현실은 영화보다 더한 판타지이다.
누구나 양면성도 아니고 다면성이 있다. 항상 일관적이지 않으면 모두 가짜라고 하는 건 지나친 단정이다. 문제는 상대에 따라 달리 반응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건 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게을러서 간명한 게 좋기도 하지만 경험으로 믿는 것들도 있다. 진심은 힘이 세고 다정함, 호의, 친절은 대부분 비슷한 반응으로 돌아온다는 것.
가능하면 도움 받는 일보다 도울 수 있는 일이 더 많으면 좋겠단 모순적인 욕심이 있다. 나이다 들수록 사양하는 태도가 더 강해지는데 좋은 일이 아니란 생각을 더 자주한다. 상대가 기분 좋게 힘들지 않게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시키는 일이고, 그것 역시 일종의 좌절이라 자연스럽게 외부로 향하는 선한 에너지를 막는 꼴이다.
그러면서 내가 도울 때는 사양 말고 받기를 강권하니 이보다 모순적일 순 없다. 돕고 도움 받는 일은 상호 간은 물론 파급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윤리를 형성한다. 타인을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대신 모르는 존재로 살아가다가도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 모두는 서로 도울 것’이란 얼마나 든든한가. 얼마나 다정한 뒷배인가.
주어진 가족을 떠나, 내가 만든 가족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가족들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무수한 변형들을 그렇게 느슨하지만 촘촘한 연대로 만드는 일. 그런 사회를 만드는 일에 대단하지 않아도 소소하게 꾸준히 참여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연대가 내가 가장 바라는 보험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가입 조건은 지구생명체일 것! 단 하나인.
“제 어머니는 11년 전, 오늘 같은 봄날에 친구와 가족을 불러 모아 이틀간 웃고 노래하며 꽃놀이를 즐긴 후 세상을 떠나셨죠. “완벽해”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요. 그때 이후 저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며 죽음은 늘 마주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왔지요.”
확률적으로는 여전히 노화로 인한 죽음이 다수이지만, 다 알다시피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다니며 살던 시절, 이왕 지구에 태어난 것 안 가본 곳 없이 열심히 다니다 길 위에서 죽으면 좋겠다 싶던 시절 나는 20대부터 유서를 써두었다.
내용은 매년 갱신되고 장기기증서약도 조금씩 바뀌고, 이제 연명치료의견도 밝혀두었다. 언제까지 존엄사가 불법일지 모르겠지만, 필요하다면 스위스에 가서 죽어야할 지도 모르겠다. 남은 육체는 아무 숲이라도 좋으니 야생동식물의 먹이가 되면 가장 좋겠는데... 하여간 원하는 방식으로 죽으려면 이것저것 더 바뀔 때까지 오래 살아야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책 내용은 사라지고 내 감상만 남은 글이 되었다. 저자의 삶에 그늘이 늘지 않기를, 가장 간절한 것과 가장 오래 살 수 있기를, 나를 중심에 놓고 사는 일이 이기적이라 비난 받지 않기를, 외로움이 서러움으로 바뀔 필요가 없는 사회이기를, 불안을 견디는 일을 서로 조금씩 도울 수 있기를, 성취를 원하지 않는 사람을 무능하게 여기지 않기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바람이 이기적인 일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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