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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집
황선미 지음, 전지나 그림 / 시공사 / 2021년 11월
평점 :
영어 단어로 집home과 가정house가 다르다는 구분을 하는 분들이 많지요. 가사노동자로서 여성의 지위를 이야기할 때도 housekeeper에서 homemaker로 바뀌었다는 표현도 있었지요. 제 정서나 경험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만.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말도 참 흔한데, 저는 형식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집이란 ‘장소’는 인간 생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입니다. 토지와 더불어 애초에 기본권으로 보장받아야할 것이었지, 매매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것을 매매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반드시 구매해야만 하지요. 이토록 완벽하게 판매와 이윤이 보장된 상품은 없습니다.
의식주가 갖춰진 곳에서 인간다운 활동으로 삶의 내용을 채워나가는 것이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형식을 갖추는데 가진 것을 다 소진하느라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는 이들이 지천인 처참한 풍경입니다.
조부모님들이 사셨던, 부모님이 사셨던, 그리고 저도 살았던 집들은 제가 그립게 기억하는 곳입니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부모님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사셨던 곳이라, 청마루에 앉아 뜰을 보면 단단한 흙마당, 나무, 담장, 바위들에게 그 시절을 물어보고 싶어지는 곳입니다.
황선미 작가의 집이야기를 만났습니다. 표지를 보다가... 태어나 보니 집도 없고 부모도 없는 아이들을 잠시 생각합니다. 이해인 수녀님 말씀을 떠올리며 그 아이들에게 세상이 좀 더 순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버드내 길 50-7번지 감나무 집. 사는 사람 없이 낡아 가는, 사람들이 갖다 버리는 쓰레기만 쌓여 악취를 풍기는, 동네를 부끄럽게 만드는 곳입니다. ‘모퉁이에 드리워진 더러운 그늘’이 되어 반갑지 않은 사람들, 동물들을 끌어 들인다고 구박을 당합니다.

그 집의 사감 할매는 가족들이 떠나자 혼자 물건들을 끌어안고 사셨다고 합니다. 한 때는 동네에서 가장 컸던 집인데, 식구들이 하나둘 떠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혼자가 된 할매가 폐지를 주어 연명하다 죽어간 집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그 집에 아이들을 버리고 간 일로 인해 구청에서 집청소를 시작합니다. 감나무 집처럼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방앗간 떡집 영감은 내부 청소만 할 뿐 집을 부수지 않고, 감나무도 없애지 않아 안도합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해버리고, 오래된 것은 참아내지 못하는 세상에 아직 고스란히 남은 곳’이 귀하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편히 살려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집을 고스란히 지키고 산 사감 할매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돌아올 곳이 있어야 돌아 올 수 있을 거라고 믿으셨겠지요. 할머니 돌아가신 후 감나무만 살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집 근처에서 서성거리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남자가 집을 고치기 시작합니다. 그 집 밖에는 쪼그만 여자애가 서 있거나 소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여자애는 말이 없지만 소년은 남자를 돕기 시작합니다.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해 남자 곁에 있는 것이지요. 달리 도망갈 데가 없습니다.

다른 애 아버지가 된 자신의 아버지였던 건축기사, 소년은 정태오라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남자를 궁금해 하지만 대답은 없습니다. 집 바깥 놀이터에는 머리에 흉터가 길게 난 낯선 소년이 앉아 있습니다.
이제 동네 사람들은 남자가 감나무집의 법적 소유주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떡집 영감은 칠보 보석함을 찾아냅니다. 설날 떡국을 담아 준 자신에게 사감 할매가 냄비와 함께 놓고 간 것입니다. 설 명절이 지나 추위로 돌아가셨으니, 아마 마지막 식사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감나무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집을 고치던 남자는 할매 아들 명길입니다. 떡집 영감에게 어머니의 칠보 보석함을 받고 차마 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에 주저앉고 맙니다. 그 보석함을 텅텅 비게 만든 게 자신이기 때문일까요.
이 집에 버림받았지만 이 집에서 엄마를 기다려야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 사람아. 집 놔두고 어딜 가려고.”
주소가 있다는 것, 집이 있다는 것, 떠날 집이 있었다는 것,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 마음이 바뀌고 사정이 달라지고 들락날락하는 사람들, 저도 떡집 영감처럼 남아 있는 집이 고마워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너무 늦게 돌아와서 어머니는 안 계시지만 어머니가 사시던 집이 있다는 것은 다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이고, 무슨 일을 겪었든 이제야 명길이 몸과 마음을 편히 뉘일 유일한 장소를 만난 것이 아닐까 짐작 합니다.
모두 떠나셔서 비어 버린 집, 제 조 부모님 댁에도 감나무가 있습니다. 다른 나무들도 있습니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벌떡 일어나 찾아가 보고 싶었습니다. 감나무 집처럼 감이 붉게 익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