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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데 집에 가고 싶어요 - 꽉 끼인 과일
변세영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11월
평점 :
눈이 내리는데 경사가 급한 지붕 위에 혼자도 아니고 콘트라바스(더블베이스)를 들고 올라가서 연주하는 사람이 있다. 불안과 긴장이 차오르는 이 표지를 평생 잊지 못하고 궁금해 할 것이다.
시집이다. 시집을 읽은 지가 꽤 오래전인 듯. 한 달에 한 권, 이라고 정하긴 했는데 10월엔 안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떠오르지 않는 시상
행복한 시인의 시상은 떠오르지 않는다
먹고 자라난 글밥은 관성으로 매양 고통을 짓고
(...)
행복한 시인의 글은 그늘 속에 숨어들고
낮게 날아든 한 몸 뉘일 곳 찾은 시인은 빼꼼히 남아
반짝이는 물에 흐드러지게 웃고만 있구나
: 시 창작의 고통은 거의 짐작하지 못하지만 그제인가 이문재 시인이 숙고하지 않고 떠오르는 걸 휙~ 쓰고 마치신다는 얘기를 읽고... 그런 시인도 있으신 거지... 몰라서 더 신기해 보이는 창작의 세계이다.
CPR
마주 물어 전하는 터질 듯한 열기
달리 뱉어내지 못할 폐에 바닷물이 가득 찬다
옮겨지는 숨 퍼 올리는 바다 다시 마주한 생
터질 듯한 울컥함과 박동하는 너의 CPR을 놓지 못하
고 나는 숨 멎도록 고동치고 있다.
: 간혹 CPR자격증을 가진 분들, 관련 직업을 가진 분들이 우연히 이동하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했다는 그런 대단한 기사를 만난다. 생명이 돌아오게 하는 경험을 한 분들의 이야기가 언젠가 에세이 모음으로라도 출간되면 좋겠다. 좋은 뉴스가 더 필요한 세상이다.
오늘의 색은 파란색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면
여남은 일이야
삶에 의미를 더해가는 일이겠지
덧칠하고 덧칠하고 덧칠하고
결국 까매지면
다시 새하얀 종이를 꺼내 드는 일이겠지
(...)
: 이웃분들의 오늘은 무슨 색인가요. 저는 겨울옷 정리하다 찾은 우연한 물건의 색, 비취색으로 하렵니다.
살이 오르는 이유
고파 보다 보니 식욕이 솟고
솟아 머금고 보니 시간은 절로 가는구나!
(...)
밥 한술 먹으러 가야지 국 한술 뜨러 가야지
자꾸 품에 두고 싶은 그대 한숨 재우러 가야지
: 불량하고 즐거운 무언가를 먹자는 유혹이 자꾸 들리는 날
때깔 좋은 글
현생이 힘들어 글 생 짓는 글쟁이가 되어볼까 했더니
생떼쟁이만 되었을 뿐이다
(...)
: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 보니, 읽기 힘든 책들의 분류가 생긴다. 행복에 집착하거나, 나르시시즘이 과하거나, 아는 어휘를 모두 쥐어짜서 이어나가는 글. 때깔 좋은 글은 무엇?
맞추고 싶지 않은 정답
지금 미운 그 사람도
세상의 오류가 아닌
세상의 정답이다
(...)
: 세상의 정답인 그 사람에 맞추고 싶지 않다는 뜻이네. 제목만 보고 다른 이야기인 줄 알고 혼자 속으로 뜨끔 놀랐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없다
그래서 참
다행이다
: 제목과 시구가 하나인 시들. 동감이다.
인생
살아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 그래서, 그러면.
그냥
좀 덜 괴롭게
좀 더 즐겁게
좀 더 열심히
좀 덜 열심히
살다
가는 것이다
그냥
: 다른 방법이 없다. 간혹 자신이 언제 갈지 정확히 알았다는 이들도 있다는 데 나도 하루 이틀 정도의 오차가 있더라도 대충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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