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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 인생은 리치하게
박세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0월
평점 :
한참 전성기일 때는 한국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좋아하기까지는 되지 않았다. 국가가 주도하는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 국가주의 성공 모델로 활용되는 것도 IMF라는 금융범죄를 책임과 처벌이 끝나지 전에 두루뭉술하게 함께 극복하자는 메시지에 등장하는 것도 별로였다. 온갖 화학약품을 동원해야 관리되는 장소를 요구하는 골프라는 스포츠 자체에 대한 거부도 있었다.
TV를 잘 안 보는 걸 아는 친구가 한 프로그램을 보라고 추천해줘서 보게 된 것이 <노는 언니>였다. 국가대표, 메달리스트 여성 선수들이 나와 잘 먹고 잘 놀고 대화를 하는 프로그램인데 한참을 봐도 막 불편하지가 않았다. 외모에 대한 강박이 최강도인 한국에서 이 언니들은 세간의 청순가련 따위 일고의 가치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잘 쓸 줄 알고 근육의 쓰임에 정통하고 원하는 목표를 위해 땀 흘리는 멋진 언니들이 가득했다. 성취 여부를 따지기보다 인간으로서 사는 고단함을 가감 없이 나누는 대화도 좋았다. 박세리는 그 중에서도 큰 언니로서, 돈이 아니라 존재로 경험으로 그들과 함께였다.
책임은 줄지 않았지만 넉넉하게 존재하는, 자주 웃는, 자기 이야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더 많이 잘 들어주는 그가 좋아졌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보이는 일과는 또 달리 책이란 자신의 말을 정확히 전하는 일이고 기록으로 남을 일인데, 출간 소식에 궁금하고 반가웠다. 화면에서 다정하고 넉넉한 인간으로 느껴졌던 그의 문장들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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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에서부터 웃었다. 먹방 콘텐츠는 싫어하지만 먹는 걸 솔직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좋다. 뭔가 유쾌하고 신나고 반짝거리는 생명력이 있다고 느낀다. 더구나 ‘삶은 땅콩’을 사준다면 아빠랑 골프 치러 가겠다는 초3의 거래는 귀엽고 고소하다. 삶은 땅콩과 바꾼 골프 체험, 세리박은 그렇게 시작했다.
일기나 회고담 에세이 정도일 거라 기대를 낮춰 읽기 시작했는데, 그런 오만함은 얼른 버려야겠다. 고민도 생각도 깊고 삶의 일관성도 뚜렷하고 무엇보다 ‘나’, ‘내 삶’ ‘내 사람’의 테두리에만 머물지도 않는다. 세상을 넓게 살고 좋게 만드는 일들에 도전하고 나는 엄두도 못 낼 에너지로 주위 사람들을 살피고 행복하게 만든다. 리치rich!
“오늘의 절망은 오늘의 것으로 묻어둘 것.”
나는 아주 어리석은 짓들을 자주하는 인간이다. 예전에는 아프고 힘들어 2박 3일 휴가를 가서, 첫 날은 두고 온 일 걱정에 허비하고 다음 날은 돌아가서 할 일 걱정에 허비했다.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그 경험을 교훈 삼아 반복은 없다고 경계는 한다. 골프를 통해 배웠다고 하는데 골프가 삶이었으니, 삶을 통해 배운 것이 터. 울컥했다.
“아. 이제 짐 안 싸도 된다!”
24년 선수 생활 끝에 박세리에게 처음 든 생각이다. 얼마나 후련할까. 아주 솔직하게 섭섭함보다 해방감이 들었다고 한다. 나는 “이제 누가 나보고 시험보라는 사람 없겠다!” “이제는 매달 공항에 안 가도 된다!” 하고 마음이 둥둥 떠올랐던 장면들이 있다. 조금쯤은 공감한다. 그러니, 제발 ‘이제 뭐 할 거냐’고 묻지 마시길! 별 진지한 관심도 없으면서.
“사람들아, 나 조금만 쉬자.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깁시다.”
벌써 이만큼 읽었나 싶게 고속으로 책장이 넘어간다. 거의 음성지원 수준의 솔직하고 간명한 문장들이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은데, 여전히 세 줄씩 늘어지는 문장만. 강요도 주장도 없는 ‘경험’을 드러내는 솔직함이 이 책과 저자의 가장 큰 장점이라 느낀다. 재밌고 유쾌하고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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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언니>를 일부 시청한 것 이외에 출연한 다른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어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줄 몰랐다. 개농장, 유기견, 입양에 대한 진지한 내용을 담았다. 이 언니는 자신이 경험한 것과 변화에 늘 솔직한가 보다.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복잡하고 난처해 보였던 힘겨운 문제들과 깊은 고민들을 술술 잘도 쓴다. 부럽고 행복하다.
“새로운 개가 구조되어 들어오면 언젠가는 죽음으로 그 자리를 내줘야 하는 말도 안 되는 현실이 매일 새로운 피드로 올라온다. (...) 저 아이들 중에 단 한 마리라도 내가 구할 수 있다면(...).”
이미 아픈 아이의 보호자이면서 다시 아파서 치료가 필요한 아이를 입양하는 용기. 부디 돈 많아 그런다, 이런 발언은 삼가 주길 바란다. 그래서 떡 삼 남매, 모찌, 찹쌀, 시루가 탄생했다.
“보호소의 강아지를 입양해줘서 고맙다는 댓글을 많이 받는다. 고맙다는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안다. (...)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심스럽다. 동물을 입양하는 게 유행처럼 번져서 버려진 아이들이 또다시 버려지는 일을 겪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혹시 나중에 같이 살고 싶은 남자가 생겼는데 강아지를 싫어한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명쾌하다. 내 가족이 싫다는 남자랑 같이 살아야 할까? (...) 각자 맞는 사람을 찾읍시다. 후후.”
마음이 무거워지려다 대신 너무 웃어서 목이 아프다. 솔직, 담백, 명쾌 그리고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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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레전드라 불리는, 이런 솔직한 박세리에게도 역시나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고 한다. 24년 동안. 그래서 ‘성취’를 바탕으로 한 행복 이외의 삶을 알았다는 것이 무척 기쁘다.
“은퇴를 하고 방송을 시작하고 사업을 하고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해설위원을 해보니 각각의 영역에 고유한 보람과 성취감이 존재했다. 와, 세상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로 가득하단 말인가.”
박세리의 세상은 재미있는 일로 가득한 곳이다. 다른 어른들도 이런 얘기를 많이 해주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아이들이 세상이란 무슨 일을 해도 ‘고유한’ 보람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게 당연한 곳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실은 바라는 대로 바뀌기 마련이다.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지 못할 이유들이란 무엇일까.
“인생의 법칙은 때로 굉장히 단순하다. 나를 믿고, 나는 지키며 솔직하게 나아가면 된다. 물론 아무리 단순해도 그것을 실천하는 건 누군가에게는 아주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래도 항상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러는 건 다 네 걱정 때문이라고, 네가 제대로 살아야하기 때문이라고.’ 이런 말 대신 양육자들은 다른 말을 배웠으면 한다. 자신의 삶은 당사자에게만 온전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래야 하고, 그래서 자신이 고민해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행위들은 간섭이자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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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가 받는 단골 질문 1번은 바로 징크스에 대한 것이다. 나도 정말 지겹도록 자주 이 질문을 받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죄송하지만 나는 징크스를 키우지 않는다.”
팬심이 크게 자라려한다. 징크스는 변명과 많이 닮았다. 전혀 상관없는 원인을 찾아 스토리를 만드는 일인데, 이러면 정확한 분석도 못하니 고칠 수도 개선할 수도 없게 된다. 나는 징크스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과는 어떤 공동 업무도 하고 싶지 않다.
다이어트 이야기, 외모 이야기가 나오니 레전드 급이라고 해도 한국 사회에서 외모 평가를 안 했을 리가 없다 싶다. 재밌게 읽다가 화악 짜증이... 그리고 계속 읽다 또 웃었다.
“이 책이 나올 때쯤 내 몸무게가 어떤 숫자를 가리킬지 알 수 없으므로 다이어트 성공담을 들려드리기는 어렵겠다. (...) 그저 건강하게 오래오래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서 즐기며 살기 위해 건강을 조금 챙겨보자는 의미 정도랄까. 남들 보기에 과체중으로 보이면 어떤가. (...) 내 몸은 나의 것이니 기준도 내가 정하면 된다.”
‘맛있는 거 많이 먹으면서’ ‘건강을 조금 챙겨보자’라는 구절에 한참 웃었다. ‘많이’와 ‘조금’을 이 순서로 쓰다니,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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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세리’는 방송 콘텐츠라고 여겼는데, 그는 확실한 기준과 원칙과 철학을 가진 방송인이다. 그 내용들은 사람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직업윤리이기도 하다. 뭐 이렇게 가진 게 많아! 싶은 사람이다.
“새로운 프레임이라고 해서 내가 그 틀에 억지로 맞추기 위해 애쓰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솔직하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다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 제일 중요한 것은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 반드시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지킬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 선을 넘지 않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 애매할 때는 직접 물어보면 된다. 섣불리 짐작만으로 판단하고 말을 꺼냈다가는 오해만 커진다. (...) 꼭 필요한 말은 하되 상대의 말을 잘 듣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한 뒤에 솔직한 (...) 결국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야 진정으로 솔직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소위 ‘눈치’가 없고 의사소통은 언어가 가장 편한 나는 ‘속마음을, 내 기분을 알아 주세요’ 하는 사람들이 어렵다. 그런 초능력이 있으면 좋겠지만 미안하게도 없다. 말로 글로 하는 소통이 어려운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안다. 눈치가 없는 것이 눈치를 안 보고 살아도 되었던 상황의 덕이 있는 것처럼, 솔직하게 얘기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그렇게 못하게 만든 시간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같이 연습을 하자. 그게 가장 확실하고 쉬운 거의 유일한 방법이니까 초능력은 배울 수도 구매할 수도 없다.
“나는 언제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고, 주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를 기둥 삼아 때론 기대고, 받쳐주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박세리가 사는 세상은 재밌을 뿐더러, 모두가 이런 사람들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가 꼭 이 세상에서 살아가길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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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서 궁금했던 반가운 <노는 언니> 이야기도 있다.
“자연스럽게 선수들의 고충을 나누다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점점 더 답답해졌다. (...) 은퇴와 동시에 현실은 고단하고 그 명예조차 쉽게 잊힌 채 아픈 몸만 남은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 명예만을 위해 몸을 갈아 넣으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 더 오랫동안 그들의 성취를 사회에 돌려줄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모두가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다.”
바로 얼마 전의 올림픽 이야기까지 박세리의 삶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무척 분노했던 이슈를 딱 집에 담아 주니 비 오는 날 여기저기 통증이 잠시 사라지듯 마음이 기쁘다.
“똑같은 경기를 하는데도 여자 선수들은 늘 몸에 딱 달라붙거나 너무 짧아서 움직임이 불편한 유니폼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유니폼일까?”
직업과 계층과 학력과 거의 모든 것에 관계없이 한국은 관음적이고 폭력적인 성별관계가 공고하다. 스쳐 지나간 기사 제목에 모 학교 교장이 불법촬영을 목적으로 카메라를 설치했다 구속되었다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IT 강국, 휴대폰 보급률 1위 국가인 한국의 휴대폰은 성범죄자들의 편리한 수단이 되었다.
디지털 범죄에 대한 법개정을 맡은 법사위 소속 의원들 - 중년 남성들 - 중 몇몇은 정당과 관계없이 디지털 성범죄 영상들이 예술이고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라고 발언했다. 여성의 육체를 남성의 눈요기로 사용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 그 역할을 거부하고 경기에 편한 옷을 입어 몸매를 감추는 일이 도리어 ‘범죄’가 되는 것이다. 노르웨이 비치핸드볼 여자 선수단에게 비키니가 아닌 반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1500 유로 벌금이 부가되었다.
더 기막힌 것은 이중 잣대를 제 맘대로 편한 대로 들이대는 것이다.
“머리카락이 너무 짧으면 왜 여자 선수가 머리가 짧냐고 비난하고, 머리카락을 기르고 화장을 하면 선수가 운동은 안 하고 꾸미는 데나 신경 쓴다고 비난한다. (...) 마음이 무겁다. 여전히 후배들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많다.”
남이 자기 몸에 뭘 하건 타인은 평가할 아무런 권리가 없다. 대신 시선을 스스로에게 좀 돌려서 흉측하게 돌출하는 생각을 좀 다듬어 보는 건 어떤가. 이왕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답게 뇌를 써보는 일은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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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통해 인생을 배웠다. (...) 그렇게 조금씩 삶을 배우고 성장했을 뿐이다. 나의 성장에 적은 없다. (...) 어렵고 힘들수록 그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칠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치열하게 살되 그 치열함을 늘 의심하자. 지금 이 삶이 최선인지, 혹시 이 치열함이 나를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벌써 다 읽어서 속상하다. 마지막으로 전혀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박세리의 멋진 인사를 남긴다.
“다들 너무 수고하셨다고, 내일은 더 나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두 손을 맞잡고 이야기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