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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오해하면 그대로 둔다 - 김다슬 에세이
김다슬 지음 / 스튜디오오드리 / 2021년 10월
평점 :
절판
이 책에는 예전 어느 날 내 결심과 같고도 조금은 다른 문장들이 자주 등장한다. 못된 마음을 먹고... 누가 잘 못 알고 있어도 애써 설명하며 살기 싫다고 생각한 날의 내가 소환된다. 잘 못 알고 있는 대상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지식을 설명할 능력은 없다.
요점은 지식정보의 대상이나 정확성이라기보다는 타인에게로도 흐르던 체력과 정신력과 친절과 다정함을 거두어들이기로 한 날, 의 나의 문제이다. 지쳤고 좀 더 단순하게 말끔하게 집중해서 살고 싶었다.
“침묵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걸 모른다. 당신이 실망스러운 행동을 했음에도 별말 하지 않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기는 게 아니라, 거듭된 실망 끝에 이제는 그만 놓아버리고 외면하는 단계란 의미다.
당신에게 쓰이는 모든 감정이 낭비라고 선을 그은 거다. 사람이 사람을 포기하는 것.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게 없다. (...) 이 순간 이후로는 모든 것이 늦다. (...) 이는 깊게 새겨져 평생 바뀌지 않는, 저주에 가까운 일이다.”
: 이런 태도의 변화가 참 나쁜 것은 이런 결심 이후로 나는 좀 더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란 평이 조금이지만 늘었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진실로 무슨 생각을 하고 타인을 대하는 지 알 도리가 서로 없겠구나, 싶어 서럽고 암담했던 느낌은 아직 남아 있다.
그 후로 여러 다른 실험을 거쳐 지금은 다른 태도, 다른 생각, 다른 절망, 다른 결론을 배웠지만 나이와 체력 탓을 하며 더 말을 아끼고 더 성격 좋은 사람이 되는 이율배반의 방향만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이제는 오해하면 그대로 둔다. 예전엔 너무 억울해서 하나씩 따지고 바로잡기 바빴다. 굉장히 피곤한 소모성 일이더라. 더는 그러지 않는다. (...) 보잘것없는 인연이나 멋대로 오해하고 마음대로 떠들고 다니더군. 그런 사람은 부디 오해한 채 그대로 멀리 사라져주길.”
: 별 인기가 없는 덕분에 극렬하고 억울한 오해를 받고 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펄펄 난다’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4학년 때 수업 들어가기 전 후배 두 명이 반갑게 인사하며, “약혼하셨다면서요?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신다면서요?” 하고 물었다. 금시초문이라고 하니 재밌어하며 크게 웃었다. 강의실에 들어와 거의 매일 보고 사는 동기들에게 그런 얘기 들어봤냐고 하니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졸업하고 바로 취직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지도교수가 되어 주실 분과 약속을 정하고 학교를 방문했다. 후배 한 명을 우연히 건물 앞에서 만났는데, “결혼하셨다면서요? 못 가서 죄송해요.”라는 인사를 받았다. “그 결혼식 나도 못 갔으니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하니 엄청 재밌어하며 크게 웃었다.
그러니까 나와 내 친구들은 모르는 약혼과 결혼이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그 결혼식에 갔다는 사람이 있을 지도. 도플갱어가 떠올라 잠시 오싹하기도 했다. 출국 전 아들 돌잔치 얘기까지 들었는데, 지금도 누가 시작한 굴뚝 연기인지는 모른다. 정말 도플갱어라면 끝까지 잘 피해 살아보자.
“힘든데 괜찮다고 속인다. 타인을 속이는 김에 나마저 속여 버린다. 힘듦을 일일이 말로 풀어서 전달하기엔 구질구질하다.”
: 구질구질이라기보단 모두 다 정확히 설명하기가 불가능하고, 결국 결정도 선택도 내가 할 일이라 타인이 알아주기를, 타인에게 잘 하소연하지 않는다. 사소한 일은 잠시 징징거리기도 하지만, 중요한 일은 더 침묵하게 된다. 설마 나만 그럴까.
“신뢰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 관계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나를 아프게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알 수 있다. 즉 신뢰는 관계의 미래를 예측하는 척도다.”
: 그래서 나는 신뢰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아주 잘 듣는 귀로 산다.
“시간이 흘러,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 헤매야만 하는 일이 없도록, 세상에 단 하나만 붙잡을 수 있다고 하면 시계추를 붙잡겠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반드시 사라진다는 진리가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다.”
: 괴로운 사실은 시계추를 붙잡아도 시간은 간다는 것. 지구를 멈춰야하는데, 그 대가는 절멸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들이 여러 분 떠나신 올 해는 힘들고 아프고 무참했지만, 감정 역시 살아 있는 존재에게만 머무는 것.
속을 들여다 본 듯한 내용을 짚어 써 준 내 이야기라 느낄 독자들이 많을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