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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수록 풍요롭다 -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
제이슨 히켈 지음, 김현우.민정희 옮김 / 창비 / 2021년 9월
평점 :
조직의 정체성에 합치되는 않는 개인들도 분명 존재하고, 살면서 그런 이들을 못 만난 것도 아니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이 책의 모든 논조가 당연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영국 사회에서 보수적인 위계의 정점에 놓인 ‘런던정경대’ 교수의 경고와 분석이 가득한 이 책을 읽으며 이제 진짜 큰 일 났다, 싶은 위기 절감의 기분을 치울 수도 없다.
호주의 대형화재에 이어 미국과 유럽이 불타고 물에 잠기고, 환경파괴의 책임이 적은 나라들부터 기후변화로 식량위기를 겪는 일이 실시간으로 벌어져도, 판데믹과 기후격변의 피해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한국 사회는 여전히 더 중요한 이슈들이 많다.
이 와중에 하던 대로 살던 대로 살면서 저지르는 소위 자산/권력자들의 패악과 범죄를 목격하는 일은 무참하다. 애초에 저들이 자산/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 문제이지만, 가진 것을 제 손으로 내려놓을 의사라곤 없는 이들이 포진한 정재계에서 희망과 미래를 고민하고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만병통치 해결책이 아닐 지라도 적어도 2050년까지 목표로 세운 탄소중립은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조차 못하면 희망을 얘기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질지 모르는데.
“우리가 성공할지 여부를 물을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 일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만
물을 권리가 있다. 우리가 지구에서 계속 살고 싶다면,
지구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웬델 베리
“애니미즘이 사물에 영혼을 부여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사물로 만든다.”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인간은 오늘날 우리와 같이 완전히 진화되고 지적 능력을 갖춘 상태로 지구에서 거의 30만년간 살아왔다. 우리 조상들은 그 기간의 약 97퍼센트 동안 지구 생태계와 비교적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초기 인류 사회가 생태계를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가 없었다는 의미도 아니다. (...)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다층적인 생태계 붕괴 같은 문제를 초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 포기할 수 없으니 읽고 기록한다. 기막힌 현실이나 겁내고 움츠러들지 말고 신나게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들, 프로젝트들을 생각해내고 함께 해보고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이미 오래 전부터 애써온 분들이 많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 이들이 있어 포기나 절망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고 믿는다. 뭐든 해보고 함께 하는 서로를 힘껏 응원하고!
저자의 진중한 연구 분석 논의들이 친절하고 상세하게 전개된다. 정책 제안 식으로 몇% 줄이고 이것저것 하고, 목표 달성지점은 여기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 우리가 여기에 도착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뿌리까지 밝혀 정체를 드러내고 나면 그에 맞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덕분에 일관된 논조의 해설서를 만난 듯 차분히 정리하며 배울 수 있었다.
상세 내용은 책을 읽어보셔야 하지만 거칠게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돈을 많이 가진 이가 범인이고 훔쳐간 것들로 잘 사는 이들이 책임자이다. 당대의 자산도 아니고 미래 후손들의 자산까지 당겨서 누리고 즐기는데 사용하니 유사 이래로 이토록 탐욕스러운 범죄는 없다.
그런데 그럼 돈 많이 가진 개인을 지목해서 체포하고 처벌하면 되는 일인가, 그렇지도 않다. 그런 욕망을 생산하고 부추기고 멈추지 못하게 한 진범, 저자가 밝히려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범죄양상 시스템의 작동을 멈추지 않는 한 낭비와 파괴도 멈추지 않는다.
완전 새롭고 낯선 내용들은 아니다. 유럽 지식인으로서 살핀 공유지 약탈 행위로서의 인클로저enclosure, 이원론, 식민지, 수탈, 자본의 교환가치, GDP 교리를 신봉하는 성장만이 유일한 가치인 자본주의 경제, 더 빨리 더 많이 에너지를 다 쓰고 미래는 모르겠다고 하는 시스템이 진범이라는 지목은 오래되었다.
정권 비판의 도구로 수출 성장률을 매일 보도하는 사회라 모르지 않았던 원인보다 저자가 제시할 해법들이 훨씬 더 궁금했다. 소득 분배, 공공서비스 투자, 섬세하게 기획되고 실행되는 복지체제, 사람들 간의 연대, 소득의 복지 구매력 증가. 과도한 군사비와 화석연료 보조금의 기후위기 극복 자금으로의 전환, GDP 대체가능한 기준 마련, 광고와 소비 줄이기, 생태계 파괴 산업 규모 줄이기. 최고임금정책, 부유세, 화폐시스템의 수정.
노동 시간을 감소시키면서 완전 고용을 이루고, 돌봄 노동에 시간을 더 투자하고, 생태적 영향이 적은 소비를 촉진하는 결과도 마련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공공선에 가치를 둔 무척 강력한 정부가 필요해 보인다.
“최상위 1퍼센트의 연간 초과 소득 10조달러를 세계의 빈곤층에게로 돌리면, 한방에 빈곤을 근절하고 남반구의 기대수명을 8년 늘릴 수 있다. 세계적 건강 격차를 일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도 최상위 1퍼센트는 여전히 평균 연간 가계소득에서 25만달러 이상을 더 가질 것이다.”
저자가 지목하는 방향은 선명하다.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면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련된 모든 정책은 긍정적인 생태적 효능을 가지며, 이는 최상위 부유층의 경제 활동 - 소비 행태 - 가 훨씬 더 에너지 집약적이라는 것에 근거한다. 이런 제안들이 이론 차원이 아니라 시도를 해서 성공적이라 평가를 받고나 일부 지역에서는 자리를 잡고 있다니 반가운 소식이다.
20년도 더 전에 동기가 정상상태steady state경제*로 학위 논문을 썼는데, 다시 만나니 이 역시 복잡한 기분이 든다. 내 기분이야 중요할 바 없이 실현만 되면 좋겠다. 로비가 합법인 부유층이 장악한 북반구의 국가들이, 세계은행과 IMF 투표권을 포기하고 전지구적 생태적 건강성을 지향할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 재생 가능한 것 이상을 추출하지 않고 안전하게 흡수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폐기하지 않는 경제. 자원 이용에 상한선을 둔 경제.
미국 도심에서 살다 외곽으로 이사 간 친구가 전하는 소식은 우울하다. 이웃이 다 하니 나도 제초제, 살충제를 뿌려야 하고, 잔디를 깎아야 하고, 곧 있을 할로윈에는 집을 꾸며야할 분위기라고 한다. 애초에 모든 땅을 차지하겠다는 의지로 택지를 늘리지 않았으면 더 좋았으련만, 어쨌건 대출을 받아 가며 마련한 내 집에 모기가 수백 마리 날아들고, 잡초가 무성하고, 내 집만 벌거벗은 것처럼 장식이 없는 것을 그저 견딜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저자가 내내 비판한 성장과 소비를 내세우는 자본주의는 지금도 할로윈 특수를 설레며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적을수록 풍요롭다’에 동의하는 이들 역시 멈추지 말고 대응하고 저항해야 할 것이다. 가능하면 지치지 않게 즐겁게 꾸준히 끈질기게 그리고 함께.
“규칙에 맞춰 행동해서는 세계를 구할 수 없어요. 규칙이 바뀌어야 하는 거니까요.” 그레타 툰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