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부터 겨울이 온다는 일기 예보 덕에 마지막 맑은 가을날일지도 모를 오늘이 몹시 귀하다. <노회찬6411>이 개봉한 날이고, 조주빈 및 박사방 공범들의 대법원 선고가 있었던 날이다. 그리고 벌써 출간 일 년이 된 이 책이 저자들의 손 글과 함께 도착했다. 내가 참여한 도움이라곤 자잘한 것들뿐이어서 민망하다.
공론화될 때까지의 험한 여정과 대법원 선고까지의 지난한 시간, ‘관심을 멈추면 범죄는 더 잔인하게 악화될 것이란 생각’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 나온 분들을 생각한다. 이 책에는 고발, 취재, 공론화까지의 두 저자가 싸워야했던 일들이 추적기가 담겨 있다.
안전하게 필요한 지원을 다 받으면서 진행한 일이 아니라, 취재하며 생긴 트라우마는 당사자들이 다 감당할 몫이었지만 그래도 둘이라서 다행이라고 하니 듣기 아프지만 나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며칠 전 읽은 <페미니즘 리포트>와 더불어 한국사회에서 디지털 성범죄가 어떻게 진화하고 악랄해져왔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귀한 기록이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상황과 감정의 무게가 묵직하다. 분노, 안타까움, 미안함, 고마움, 나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괴로움을 겪으실 지도 모른다. 모두 다 피해자를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가해자를 한 명이라도 더 구속시키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라 잘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기막힌 현실이지만 우리에겐 서로가 있고 더 많은 미래의 우리들이 있다. 범죄에 대항하기 위한 연대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누군가는 왜 그리 힘들게 인생을 사냐고 묻기도 한다. 왜 별것도 아닌 일을 예민하게 받아 들이냐고. 웃기는 말이다. 내가 불편하고 싶어서 불편한가. 여러 사회문제를 인지하고 불편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예민하게 구는 것'으로 여겨선 안 된다. 누군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일상이 다른 사람에게는 쟁취해야만 하는 것일 수 있다. 나의 예민함이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있다. 이 땅에서 살아남아, 외치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연대하며 움직이는 이들이 있기에 내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추적단 불꽃은 성범죄 피해자의 고발을 지지한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의 몸을 통과해 심장을 건드렸다. 피해자의 상처가 나의 고통으로 바뀌어 발화하는 순간, 뜨거운 용암이 심장에서 솟구친다.”
오늘 조주빈 및 박사방 공범들의 대법원 선고가 있었습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상고 기각, 항소심 유지였습니다.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는 대법원 앞에서 이러한 선고를 환영하며 텔레그램 성착취 가해자들이 "반드시 처벌받는" 그 날까지 지켜보겠다는 의지를 담은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이하 기자회견문을 첨부합니다.
온라인 성착취, 반드시 처벌된다
우리는 기억한다.
텔레그램이라는 플랫폼을 이용해 여성을 노예로 칭하며 번호와 별명을 붙여 물건처럼 취급하고, 성적으로 조롱하고, 신상정보와 함께 피해자들을 협박하여 얻어낸 피해촬영물을 유포하고, 홍보하고, 구입/재유포하며 가해했던 수 만 명의 공모자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텔레그램성착취 피해자들이 유포와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경찰서에 가서 피해를 신고하려 했을 때, 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온라인이라 가해자를 특정할 수가 없다”, “서버가 외국에 있어 수사가 어렵다”고 피해자를 단념시키고 돌려보내던 공권력을.
우리는 기억한다.
조주빈이 검거된 이후, 줄줄이 딸려 올라오던 수많은 가해자들의 면면.
어디서든 흔하게 만날 수 있던 평범한 시민의 모습을 한 가해자들의 실명과 얼굴은 경찰청의 진지한 회의를 거쳐 엄숙하게 공개되었다. 반면 각종 검색 포털과 텔레그램 등 메신저 플랫폼들에서는 피해자들의 신상정보가 텔레그램 혹은 N번방의 연관 검색어로 오르내렸다. 피해자와 피해촬영물을 찾아 헤매던 또 다른 성착취의 그물망이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디지털 공간을 뒤덮었다.
우리는 기억한다.
언론의 카메라 앞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가해자들은 당당하게 죄가 없음을, 범죄집단이 아님을 주장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일상에서조차 얼굴을 감추어야 했고, 이름과 주민번호, 전화번호를 전부 바꾸어야만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경찰에서, 법정에서,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도움을 받으려면 계속해서 피해자임을, 피해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우리는 잊지 않겠다.
국민청원에 수백만의 시민이 참여해 가해자들의 신상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디지털 공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과 성착취에 함께 분노하고 맞서,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어내고, 결국은 가해자들이 처벌받을 수 있도록 뜨거운 연대의 손길을 놓지 않았던 순간들을.
우리는 잊지 않겠다.
협박을 받으면서도 경찰에 신고하고, 언론에 제보하고, 또 다른 피해자들을 걱정하고, 경찰에서 검찰에서 법정에서 진술하며 오늘의 결과를 만들어낸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하루하루를. 자신이 나온 영상을 매일 검색하고 또 검색하면서도, 국가가 삭제하기를, 유포자는 처벌하기를 – 물러서지 않고 공적 해결을 포기하지 않아 온 피해자들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주빈을 비롯한 6명의 박사방 운영자들의 형이 확정되는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디지털 성폭력과 성착취는 반드시 처벌된다. 이번 판결은 그 시작일 뿐이다.
기억하라. 단 한 번의 시청도, 공유도, 저장도, 유포도 이제 범죄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의 피해자도 혼자 남지 않도록 우리는 끝까지 연대하고, 힘을 모아 싸울 것이다.
2021년 10월 14일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
오늘 판결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겠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멉니다. 가해자는 감옥으로 갔지만,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갔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디지털 성범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범인이 잡혀도 피해자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인터넷상에는 누군가의 존엄성을 침해한 범죄의 결과물이 넘쳐납니다. 한번 배포된 피해 사진과 영상은 광활한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무한히 늘어난 가해자들은 시시때때로 피해자의 일상에 침투합니다.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닷페이스와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가 진행한 디지털성폭력 피해자 일상회복 프로젝트 "내가 만드는 하루"를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가해자 엄벌뿐 아니라 피해자 회복에도 온 사회가 함께 나서야 합니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작년 한해동안만 무려 15만8760건의 성착취물을 삭제했고, 지원한 피해자만 4973명에 달합니다. 이 수는 올해 더 늘고 있고, 센터에선 지금도 하루에 평균 650개의 영상을 지우고 있으며, 직원은 총 39명(3월 기준)이라 합니다. 여가부를 없애니 마니 하는 소모적인 논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피해자들의 목숨을 살리는 이런 기관에 적정한 예산이 책정될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만의 공간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안부의 인사를 보냅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힘껏 돕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믿고, 꼭 조금만 더 용기를 내주시기 바랍니다.”
※ 사진이나 영상의 불법촬영·유포, 이를 빌미로 한 협박, 사이버 공간에서의 성적 괴롭힘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지지동반팀(02-2275-2201, digital_sc@hanmail.net),
여성긴급전화 1366,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02-735-8994, www.women1366.kr/stopds),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02-817-7959, hotline@cyber-lion.com)
에서 지원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