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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한 리더 세종 - 대한민국 천년의 미래를 묻다
양형일 지음 / 밥북 / 2021년 9월
평점 :
손바닥에 왕(王)을 그리고 대선에 출마한 후보 덕분에 우리나라에 왕이 있냐고 묻는 아이들이 있고, 부모들은 대한민국이 공화국이고 공화국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일에 직면했다고 하니, 모든 일에는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면이 있구나 싶다.
주말에 십 대 아이들이 읽고 둔 책들을 혼자 읽어 보는 것이 일종의 의식인데 왕 중에서도 ‘대왕’이라 불리는 세종에 관한 책이 완독 책장에 올려 있다. 이번 생에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고 싶다는 야망은 깔끔하게 포기해야 할 듯하고, 그 탓은 아니지만 가장 익숙한 왕의 업적을 정리하는 것도 선명하지 않다.
대략 독서를 하는 입장에서 세종이 각종 분야의 책들을 가능한 많이 읽은 점은 이의 없이 존경스럽다. 읽고 마는 것도 아니고 당대 누구와 토론을 해도 주도했다니 이해력도 남달랐을 것이다.
건국 초기이긴 하나 왕족이 유학 경서만이 아니라, 정치, 행정, 역사, 종교, 법, 율례, 지리, 천문, 운학, 문학, 수학, 화학, 음악, 문화, 농사, 경제, 군사, 병법 등의 독서를 했으니 총괄업무에 유용할 지식을 바탕에 둔 것은 분명하다.
“무식하거나 수신이 안 된 군주가 치세를 바르게 할 수 없음은 고금의 정치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몇 해 전 다른 책을 읽다 알게 된 사실인데, 세종이 취한 조치들 중 노비에 관한 세세한 처우들이 인상적이었다. 이 내용만 보면 현대사회가 오히려 인권 부재의 사회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과장이라 느끼실 분들은 보도 자료나 기억을 비교하며 정리한 바를 읽어 보시기 바란다.
- 관노비나 사노비도 질환에 시달리는 자들은 노역에 동원할 수 없다.
- 노비에게 가혹하게 상처를 입히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 자는 엄벌에 처하도록 했다.
- 질환이 있는 군졸은 부역을 면하게 하고, 이미 동원된 경우에는 중단시키도록 했다.
- 임신한 노비가 죄를 지어 하옥된 경우 특별 보살핌을 지시했고 고신(고문)을 금지했다.
- 산모와 태아에게 위해가 될 처벌을 배제했다.
- 관노비는 출산 시 1백일의 휴가를, 산기가 임박해서는 1개월의 출산 전 휴가를 주었다.
- 출산 휴가는 산모와 남편 모두에게 주었다.
- 세종 12년 10월 9일, 출산휴가를 법제화하도록 명했다.
일하다 아파도 아픈 사람보고 아픈 거 증명하라고 하고, 죽어도 책임자 처벌도 없고, 계속 죽어도 개선도 없고, 출산휴가로 눈치 보는 직군이 더 많고, 뭐라도 입법화하려면 힘껏 애써도 몇 년 만에 발의될까 말까이다. 어쩌다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독서 목록에 수학이 있어 궁금했는데 세종 시대 수학자 김빈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엔지니어와 테크니션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 저만 그렇다고 오해하는 건가요 - 경우들이 있는데, 이 둘은 하는 일이 다르다. 엔지니어는 발명이나 디자인을 하는 수학자나 물리학자인 경우가 많다. 짐작에 장영실은 테크니션이었을 듯 한데 천재 개발자의 이미지가 강해 실상이 좀 궁금했다.
세종 자신이 산학을 숙지하기도 했고, 당대 뛰어난 수학자 김빈과 자격루, 혼천의 등을 개발했다. 당시 학문도 아니고 중인 계급이나 관심을 갖는 분야로 취급되던 것을 전제군주가 공부하고 개발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알고 읽어도 신기하다. 수학에 능한자를 ‘능자 - 기술. 기예에 숙달된 자’라고 불렀다니 애들 모아 놓고 암산 대회하던 괴이한 대회들이 스쳐간다.
“세종 15년 8월 (...) 인쇄된 책은 집현전, 호조, 서운관 등의 부서에 배포하여 익히도록 했다. 수학이 사대부들의 학문 영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면한 문제 해결에 골몰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계획과 뜻이 있던 왕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건국한 아버지가 여러 정리를 말끔히 하고 권력을 넘겨 준 배경도 컸을 것이다. 반대 세력도 세를 구축한 집권 세력도 없는 새 왕조, 새롭게 잘 해보자는 분위기가 있었겠고 독서량과 지식이 많은 군주가 왕위에 올라 소위 시너지 효과가 컸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시대에는 더욱 중요했던 용인술에 대해 ‘토사구팽’은 자주 들었으나 ‘대의멸친’은 처음이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가까운 사람들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현대 정치와는 같고도 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흔히 사람들은 측근, 인맥, 낙하산 인사에 대해 - 부정적 경험과 언론의 과장되고 의도된 조작 이미지 탓이긴 하지만 - 무조건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범죄의 지름길로 취급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가장 믿음직한 형님 국가로 여기는 미국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백악관 전 직원이 바뀌는 수준의 대대적 인사가 이루어진다. 행정부 구성 역시 일단 첫 근무 시작하는 첫 단계에 이미 수십 수백 명이 당선자의 ‘자기 사람들’로 구성된다. 정치적 목적과 구상이 같고 이해를 하는 사람들끼리 일해야 일이 되지 않겠는가.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늘공이 관료마피아로 불리는 이유도 고민할 문제이다.
감시와 비판을 할 것은 관계의 거리가 아니라 직책에 합당한 능력을 갖추었는가 이다. 그래서 더 철저하고 어려운 과정일 수도 있다. 물론 남의 시선과 판단을 전혀 신경 안 쓰는 트럼프 같은 존재라면 문제가 커지긴 하나, 그건 그런 인물을 당선시킨 모두의 책임이고 망가지는 정치를 지켜보는 고통은 그 대가이다.
현대 정치야 직에서 쫓겨 가는 경우가 최악이겠지만 생사여탈권을 가진 전제 군주 시대에도 왕에게 쓴 소리를 하던 이들이 있다는 것도 놀랍고 어쨌든 불충한 신하에게 유배나 사약을 내린 적도 없는 세종도 놀랍다. 근무환경이 괜찮았겠다 싶은 부러운 생각도 살짝 든다.
“‘언문’의 힘은 바로 과학성과 편의성에 있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의해 표현하지 못할 소리와 말이 없다. 정인지 표현대로 머리가 좀 있는 사람은 반나절이면 이해할 수 있고, 아무리 머리가 나쁜 사람일지라도 터득하고 배우는데 열흘을 넘기지 않는다.”
이 문장은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을 보면 잘 보인다. 문자가 조합 구성되기 때문에 뜻을 전혀 몰라도 글자는 다 읽을 수 있는 수준에 먼저 오른다.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처럼 '못할 게 없다'에는 동의할 수 없는 경험도 있다. 자모가 번갈아 등장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한글식 표기를 하면 음절이 대체로 늘어난다.
예1: English e,i 2음절. 발음 잉리ㅅ 한글: 잉글리쉬
예2: Dark Knight a, i 2음절 닥나잇 한글: 다크나이트
물론 이런 별 거 아닌 지적보다는 나라말과 글에 담은 뜻과 정신 - ‘독립된 자주 문화 문명국’이라는 세종의 지평 - 이 중요하다.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부재할 것이다.
“나라를 보존하며 일으키기 위해서는 나라의 바탕을 굳건하게 하여야 하며, 나라의 바탕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말과 글을 존중하며 써야 한다. 모든 문명 강국들이 자기 나라의 문자를 존중하고 사용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주시경의 지론이었다. 이후 뜻이 같은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곧 한글날이다. 나에게는 일 년에 한 번 언어가 사고(思考)를 규정한다는, 즉 나를 규정한다는 것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하게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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