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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일메리 ㅣ 앤디 위어 우주 3부작
앤디 위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5월
평점 :
예전에 런던에 머물다 독일로 바로 갈 일이 생겨서 눈에 띄는 여행사Travel Agency에 들어갔다. 상냥한 직원분이 반갑게 맞아 주셨는데, 이런…… 런던 토박이인 듯한 발음! 한국에서는 서울말을 표준말로 정했지만, 영국 영어는 행정수도 거주민들의 말에 언어학적 위계를 부여하지 않는다. 표준말이란 자체가 없기도 하지만. 런더너Londoner의 발음 특징들이 있는데, 받침 발음을 잘 안 한다거나 (예. book : 부우~. 이렇게 들린다), 개인차까지 더해져 모음 발음이 다르거나... 다양하다. 그래서 그 직원이 활짝 웃으며,
“Would you like to book to die*?” 이렇게 물었을 때는 당황했다. * 투 다이로 들림, 의미는 today.
(나 혼자 생각) ‘언제 죽을 지 예약할 거냐고 묻는 건가? 여긴 어디?’ “Could I?” (바삐 생각) ‘여기선 죽는 걸 예약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는 더 밝게 웃으며 추가 질문을 하였다. “Certainly, one way or return?” (진심 놀람!) ‘죽기만 할 건지, 죽었다 살아 돌아올 건지 묻는 건가요?’
뜬금없이 이런 추억 얘기를 하는 것은 이 책에 편도 탑승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살 임무를 수행하려 왔다. (...) 이번 임무에 자원했을 때 나는 이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기억상실증에 걸린 내 두뇌에게는 이 정보가 새롭기만 하다. 나는 여기에서 죽는다. 혼자서 죽게 된다.”
두 시간 비행거리인 독일로 가는 게 아니라 헤일메리*호라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가서 지구를 구해야하는 임무이다. 무척 좋아하는 장르물 설정이라 읽으면서 질문과 궁금증이 폭증할 흥미로운 설정이다. 화성에서 감자 심어 캐 먹는 이야기로도 독자와 관객을 맘껏 홀리는 앤디 위어이니 안심(?)하고 읽어 본다.
* 헤일메리Hail Mary : 미식축구 용어. 경기 막판에 역전을 노리고 하는 패스에서 유래한 말.
탑승한 인원 중 두 명은 사망했고 살아남은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에 몸도 자유롭지 못하다. 다행히 돌보는 로봇이 있다. 지구를 구해야 한다고 해놓고 이렇게 답답한 출발이라니, 덕분에 필력과 구성력에 관한 저자의 자신감에 더 감탄하게 된다.
기억을 찾는 과정은 퍼즐 맞추기와 같으니 추리미스터리처럼 사건과 상황이 짜 맞춰질 것이란 짐작을 한다. 그런 게임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더 기쁘다. 조각조각 찾아드는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들이 교차되며 영상매체가 주는 시각 정보처럼 이야기가 흘러간다. 재밌다.
“박사님이라면 별을 먹고 사는 생명체를 뭐라고 부르시겠어요? (...) 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어원을 애써 떠올렸다, 아스트로파지*라고 부르면 될 것 같네요.”
* 아스트로파지astropharge : 별을 뜻하는 아스트로astro와 세균을 숙주세포로 하는 바이러스를 의미하는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의 합성어. 파장 25.984미크론의 적외선을 방사하면서 빛의 운동량을 이용해서 태양과 금성을 오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미생물이 지구 위기 유발자인 것이다. 태양 에너지를 엄청 나게 흡수해서 지구 온도를 10~15도 가량 떨어뜨리게 된다. 현실의 우리는 온도가 몇 도나 올라갈지 불안하게 지켜보는 중이라 남일(?) 같지 않아 조금 괴로웠다. 그래도 지구에 함께 사는 인간들의 활동이 아니고 외부 요인이나 물리치러 나갈 수 있다는 점만은 부럽기도 했다.
“기후학자들은 앞으로 30년 안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해 (...) 30년이요? 엄청 나중이네!”
소설 내에서 과학자들이 예측한 기한이 현실의 기한과도 비슷해서 또 한 번 덜컹한다. 그래도 현실의 인간은 위기감이 없이 대범하기만 하니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나는 거의 매일 무척 두렵고 괴롭다.
“박사님을 포함한 세 사람은 타우세티로 가겠죠. 나머지 우리는 지옥으로 가요. 더 정확히 말하면 지옥이 우리한테 다가오는 거지만.”
만약 내게 주인공과 같은 선택의 기회가 있다면 어떤 결심을 하게 될까. 나를 제외한 지구와 지구에 남은 이들을 구할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나는 죽을 것이 확실한 우주로 나가게 될까, 아니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서서히 죽어갈 가능성이 더 높은 지구에 남게 될까.
“나는 아이들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30년 뒤면 이 아이들 모두가 40대 초반이 된다. 이 아이들이 그 모든 부담을 지게 될 것이다. (...) 이 아이들은 (...) 세계 멸망이라는 악몽 속에 내던져진다. 이 아이들은 제6차 대멸종을 겪게 될 세대였다. 나는 배 속이 꽉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이들로, 행복한 아이들로 가득한 교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몇 명은 문자 그대로 굶어 죽을 가능성이 컸다.”
주인공은 과학 선생님이다. 직업인이라기보다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제대로 대접해주고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는 선생님이다. 지나친 이상화를 한 것일 지도 모르나, 나는... 교육자는 미래세대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지 귀찮아하고 무시하고 미워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와 배경이 개인으로서의 교사나 아이들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결국 교육자는 그런 부조리까지 이해하고 파생된 분노를 아이들에게 돌리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교육자는 가장 마지막까지 절망과 포기하지 않는 그런 이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교육의 합목적성과 부조리하지 않게 설명할 수 있는 최고의 목표가 아닐까 한다.
“사태가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누군가는 계속 우유를 배달해야 한다. (...) (외계의 생명체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는) 세계 멸망을 한 세대나 두 세대쯤 앞두고 있는 상황도 그랬다. 나는 아이들 앞에 서서 그 애들에게 기초과학을 가르쳤다. 이 세계를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지 못한다면 세계가 존재하는 의미가 뭐겠는가?”
주인공에 대해 배우고 나니 책 곳곳에 담긴 기초과학실험과 같은 지식정보들이 다정하고 친절한 수업으로 느껴진다. 지구 멸망이라는 서늘한 비극과 대척에 선 것이 이런 작은 온기라는 것이 또한 감동적이다. 중무장을 한 초능력 탑재 어벤져스가 등장했다면 얼마나 뻔하고 지루했을까.
우주선 이름이 소박하고 귀여웠던 것도, 주인공 직업이 평범한 것도, 감자보다는 훨씬 멋지고 의지가 되지만, 동료인 외계인 로봇조차 순박한 지능 수준의 작고 선량한 존재 ‘로키’였던 것도 오히려 더 대담하고 멋지다. 작가의 프로젝트는 야심만만한 거대 주제를 담고 있으니까.
700쪽 가까이 펼쳐진 이야기가 지향하는 바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도 믿지 않을 지도 모를 존재의 평범함, 선량함, 성실함, 선의, 애정, 희망, 협력, 연대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기적과 구원이라는 간절한 기도이기도 하다.
“저건 외계의 우주선이다. (...) 인류는 우주에 혼자가 아니다.”
“로봇이 내게 손을 흔든다! (...) 나도 마주 손을 흔든다. 로봇이 다시 손을 흔든다.”
역사의 큰 변곡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비슷한 분석과 결론에 도달한다고 한다. 특별하고 영웅적인 계기는 없었다고. 공통점은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분명한 선의를 가지고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했다고. 여전히 유효하다면 참 좋겠다.
인터뷰에서 저자 앤디 위어는 우울증과 가난으로 고생했지만 ‘항상’ 인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구급차를 부르고 길을 비켜주는 일들, 인간이 서로를 돕는 일은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라 보도 되지 않는다고, 그러니 인류는 지속적으로 미래를 더 좋게 만들고 있다고, 그렇게 믿는다고 했다.
나도 그의 믿음과 낙관에 동조한다. 아직 못 들었거나 미처 모르는 수많은 ‘돕는’ 일들을 한 많은 분들에게 자주 감사하며 살아간다. 전작에서도 그랬고 막막한 공간에 주인공 한 명만 달랑 던져 놓고 ‘살아남아 봐라~’ 이런 이야기를 즐기는, '주인공 처절하게 괴롭힘 전문' 저자인가 했는데 말랑말랑 보들보들한 SF라니.
경쟁과 싸움보단 협력과 연대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당신의 끈질긴 이야기에 설득 당했다. 이제 대답을 해볼까. 지구의 사랑스러운 존재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면, 외로움과 막막함을 스르륵 녹여 줄 동료 로키가 있다면 나도 헤일메리호에 탑승하고 싶다. 그리고 주인공처럼 여행을 끝마치지 못한 동료들을 우주로 보내 주고 싶다.
“당신의 몸을 별들에게 맡깁니다.” 이렇게 명복을 빌면서.
혹은 다른 동료가 나를 우주로 떠나보내며 같은 기도를 해주어도 좋겠다. 귀향과 귀가를 위한 연휴가 끝나고, 늦은 밤에 어두운 우주를 떠올리며 최초의 고향을 향해 가는 상상도 나쁘지 않다. 인류에 대한 저자의 굳건한 믿음이 별처럼 꿈처럼 아련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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