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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세요, 제가 준비해 놨어요 - 여행자를 유혹하는 여행 만들기의 세계 ㅣ 일하는 사람 4
신재윤 지음 / 문학수첩 / 2021년 9월
평점 :
표지가 불러내는 기억과 감정이 만만치 않다. 설레었던 적도 지긋지긋할 적도 있었다. 그래도 여행가방은 여행이건 출장이건 그 기간을 살아내는 필수품들로 가득한 귀중한 존재였다. 몇 번이나 반복하는 생각인지 모르지만, 이런 시절을 살게 될 줄 몰랐던 모든 순간들이 짙은 후회로 남는다. 젊은 시절 추억은 기억에 담는 거라 여겼던 나를 기어이 사진 속에 담은 이들에게 나이 들어 감사한다. 기억보단 사진이 더 선명하다.
관광개발연구원이란 직업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관광을 예매한 적도 단체 여행을 간 적도 없어서일까.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면 애증의 시기가 반드시 온다고 하는데, 저자는 여전히 여행을 좋아할까. 표지에서 눈을 떼기 싫어 한참 생각만 돌돌 굴리다 펼쳐 읽는다. 여행을 갈 수 없는 시절의 주말에.
관광객이 아니라 개발자의 시선으로 읽는 책이 무척 흥미롭다. 남들 먹고 노는 이야기는 잠시 멈춰 ‘시선’을 담은 문장들이 없다면, 관음증처럼 느껴져서 읽기가 민망할 때도 있다. 시리즈 명칭대로 ‘일하는 사람’에 충실한 서사라 마음이 편하다.
여느 회사처럼 프로젝트 기획, 제안, 보고 - 모두 문서로 이루어진다. 당연히 보고서 지옥! -를 거쳐 나아가는 장면들, 기발한 아이디어가 현실화 되는 과정에서 아쉬었던 결과적인 이야기들, K-투어 열풍과 관련된 글로벌 쇼핑 관광 - 나는 가볼 일이 없겠지만 - 프로젝트들의 에피소드들, 직업 상 어쩔 수 없는 프로출장러로서의 삶과 견문록이 담겨 있다.
“디자이너에게 완벽함이란 무엇인가를 추가할 것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태다.” - 생텍쥐페리
누군가의 노고로 개발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만났던 ‘영원 젊은 달 제이파크’ 이야기에 급 호감을 느껴 책에 얼굴을 더 바짝 대고 읽는다. ‘대지예술’이란 컨셉이 확실한 개발이지만 지역 경제를 살리고자 너나없이 개발한 관광 상품들이 이런 시절엔 어떤 역풍으로 돌아갔을지 마음이 무겁다.
제주추사관, 담양의 관방제림, 부여의 궁남지, 통영의 나천칠기와 목공예 배우기 상품 등... 내가 좋아한 곳들이 꽤 나온다. 관광과 단체 여행이란 형식만 빼고 관광개발원이 개발한 여기저기를 즐겼네, 비로소 깨닫는다.
‘도시재생’이란 이름을 단 부서가 지자체에 생긴 지는 꽤 되었는데, 페인트칠하고 벽화 그리는 것 이상의 어떤 일을 하는지 사실 무관심했다. 매년 예산의 범위 내에서 뭐라도 할 터인데, 토지와 건물 비용이 비상식적인 서울에서 문화비축기지와 서울로 7017이 도시재생의 상징으로 마무리 된 것이 새삼 놀랍다.
잘 살아 보세~ 로 기억되는 시절 - 사실 나도 별 기억이 없다 - 에 깡그리 부수고 시멘트로 발라 없앤 문화유산급 자산들이 많았을 텐데, ‘한국적’이라는 것이 꼭 어느 시대를 표방하거나 상징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겠지만, 식민지와 전쟁을 겪고 난 국토의 문화 단절과 가난이 분하고 서럽기는 하다.
혹시 여행 꿀팁을 기대하셨다면...... 많이 있다!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이렇게 모르던 직업을 알게 된 기쁨이 크다. 책을 다 읽었고 표지를 봐도 두근! 거린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이들과 함께 마음 편히 “판데믹 시절이 말이야~” 옛 이야기 하며 여행할 날이 이번 생에 다시 올까.
“나는 왜 그토록 여행에 열광하며, 여행 분야에서 직업까지 갖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여행하면 행복하니까.”
“‘설렘’이라는 감정은 우리의 일상을 권태롭지 않게 만들어 주는,
식재료로 비유하자면 후추와 같은 존재하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설렘이 행복으로 충족되지 않고 가끔은 실망으로 내려앉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설렘 덕에 여행하고 싶은 욕망이 지속되고,
더 넓게 보면 우리 일상도 지탱되는 것이 아닐까?”
오래 전 휠체어를 이용하는 친구와 유럽을 함께 여행한 적이 있다. 일과 여행이 혼재된 상태이긴 했지만 업무 내용은 벌써 잊었고, 휴식과 여행은 감정까지 남았다. 어떤 도시는 내가 이미 여러 번 와 본 곳이라 재밌게 소개와 안내를 해줘야지,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짧은 여정에 벌써 중세 유럽의 포장이 잘 유지되어 내려온 울퉁불퉁 길에 양가적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길조차 수백 년 유지되었구나, 좋겠다, 부럽다 하는 마음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돌들을 파내거나 새로 포장을 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동시에 보았다.
친구의 전동 휠체어 배터리는 덜덜 떨리는 길을 가느라 참 빨리도 방전되었고, 나는 이런 저런 감탄을 섞어 소개하려던 야심을 많이 접어 넣어야 했다. 그런 여행도 이제는 다 그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