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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거울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한은경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평점 :
추리소설을 읽었는데 궁금한 것도 아쉬운 것도 불만도 없이 딱딱 소리가 들릴 정도로 깔끔하게 전개되고 말끔하게 마무리되고 작가 천재다! 이런 느낌을 늘 받는 것은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입니다.
모든 작품이 다 좋지만 <깨어진 거울>은 특히 더 좋습니다. 물론 취향, 상황, 번역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입니다만. 작품 자체의 무게감과 완결성이 추리장르의 대작이네요.
세상 다른 누가 ‘친절함’을 주제로 인물들의 자기중심성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한편 치밀한 추리 설정을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요. 행복에 대한 관심과 기원을 무섭게 지적한 정유정 작가?
진의와 진심에서 벗어난 자기만족적인 친절함을 캐릭터의 말과 행동으로 목격하니 그 기막힌 괴리와 위선이 속이 울렁일 정도로 선명합니다.
남 못지않은 불안증으로 사는 저조차 본인의 불안정함을 핑계로 남의 감정을 제가 좋을 대로 원하는 대로 이용하는 인물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도 생기지 않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인간의 본질 한 가운데를 직접 파내는 냉철한 시선과 문장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아주 친절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했어요. (...) 단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나도 그런 사람을 알지. 그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위험하게 살게 마련이야.”
“체리는 집안일은 엉망이지만 무엇보다 오고 싶어 한다. 더욱이 지금 이 순간에 마플 양이 가장 중요시하는 장점이 있다. 따뜻한 마음과 생명력, 그리고 일상사에 대한 깊은 관심이다.”
단 13권 밖에 없는 마플 시리즈를 읽어서 감동이 더 크고, 1962년 작가가 72세에 쓴 작품답게(?) 늙고 쇠약해지고 멈추지 않는 시대 변화를 도입부터 신랄하게 펼치는 서사가 굉장합니다.
친절과 간섭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 구분을 잘 하는 것은 참 어렵고 위험하고 귀한 태도입니다. 주변의 누군가가 떠오를 수도 있을 정도로 출간 년도와의 시간 차이가 상쇄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가능한 가스라이팅이나 인에이블링에 관심이 많은 저는 막무가내, 일방통행적인 친절의 동력과 심리는 무엇인지 골똘히 읽었습니다.
기력을 잃어가던 마플이 사건을 만나 생기가 솟는 장면이 재밌고 반갑습니다. 300쪽 밖에 안 되는 분량에 모든 사소한 단서들을 완벽하게 회수하며 최종 그림을 완성하는 신기에 가까운 필력! 한숨이 나올 만큼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