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다 - 카르멘 라포렛 탄생 100주년 기념판
카르멘 라포렛 지음, 김수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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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있는 이유보다 속물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책이 있다내용이 그런 효과를 낸다는 것이 아니라이 책처럼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스페인 최고 권위의 나달 수상 작가, 20세기 스페인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란 평가와 더불어 스페인 내전이라는 중대한 근대사를 소재로 한 작품일 경우이다.

 

나는 21세기가 되어서야 안전한 시공간에서 이 전쟁에 대해 배웠다특히 인상 깊었던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은 도움이 필요할 때 지원 없이 쏙 빠진 영국에 대한 영국인의 속죄처럼 고증의 깊이도표현의 강도도철학적 배경도 탄탄하다.


영국 유학 당시 교직원과 동기들과 함께 보고 영화 매체에서 전무후무하게 15분 이상의 토론 장면으로 등장한 아나키즘에 대한 토론회에 참가한 기억이 있다왕정주의자아나키스트스페인 왕가의 후손카탈로니아 독립에 찬성하는 철학 교수 등등... 신기하고 놀라운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함께 한 자리라 뇌 속에 불꽃이 펑펑 터지는 논쟁의 향연이었다.

 

어쨌든 원인도 주체도 승패에 따른 결과도 모두 남성들이 전유하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 책은 여성의 목소리로 전쟁의 흥분과 승패가 아니라 이후의 삶을 보고 기록하고 창작한 작품이니 참혹하면서도 새롭고 의미 있는 통찰들이 기대된다. 23세의 작가 카르멘 라포렛의 첫 작품이다.

 

거무튀튀하게 때가 낀 벽마다 거친 손자국들과 절망에 찬 절규의 흔적들이 담겨 있었다. (...) 찌그러진 수도꼭지에는 광기가 미소 짓는 것 같았다. (...) 이제 온갖 불결한 것들 가운데 나 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외부환경이 참상에 다름 아니고 폭력은 도처에 가득하니 시절을 견디는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 끊임없이 심리를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다독여야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질문은 가득하고 감수성은 예리하다원제 Nada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제서야 나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역경보다 오히려 일상의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난관들이 더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부가 망가졌거나 모두 텅 비어버린 인물들이 끝없이 등장한다불안과 좌절과 고통 속에서 다들 얼마간 미쳐 살지 않았나 싶은 잔인한 시절이다몇몇 서사에서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긴장감이 느껴져서 시절이 야만스러울 때 인간이 존재한다는 일 자체가 어떤 고통인지 쓰라린 기분이다.

 

낡아빠진 옷깃을 뚫고 스며드는 추위도처절한 곤궁함이 자아내는 슬픔도이 구질구질한 집이 주는 소리 없는 두려움도하지만 나에게 가해지는 강압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외부에서 후대에서 본 스페인 내전은 이념과 정치의 격돌이었다그와 대조적으로 이 작품이 갖는 독보적인 위치는 정치적 암시가 전무하다는 것이다철저하게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일들이 1인칭으로 적나라하게 고발된 글이다때론 기록과 창작현실과 허구를 구별하기가 불가능한 장면들이 등장한다그래서 이 작품은 1인칭이지만 에세이가 아닌 소설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인생을 향유하기 위해 태어나고또 어떤 이들은 죽도록 일하기 위해 태어나고또 어떤 이들은 그저 인생을 지켜보기 위해 태어나는가 보다나라는 사람은 그 관조자의 역할을그것도 아주 미미한 역할을 하도록 타고 난 것 같았다도저히 그 역할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결코 그 역할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 같았다그 순간 날 사로잡은 유일한 현실은 바로 어마어마한 비탄이었다.”

 

읽다 보면 이야기속 안드레아만이 아니라 저자 카르멘 라포라의 목소리인 것처럼 느껴지는 구절이다갑자기 고아가 되어 찾아간 할머니의 집에서 나와 자신만의 삶을 살아 보기 전에는 먼지처럼 우울한’ 주변의 인물들을 피하지도 못하고 끝없이 지켜봐야했으니까.

 

저 아래층은 침몰하는 배라고나 할까. (...) 우리 모두는 차올라 오는 바닷물을 보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가엾은 쥐새끼들이고 말이야. (...) 너도 길 잃고 넋 나간 어린 생쥐 신세가 되었지만 이제 막 시작한 셈이니 그리 불행하다고까지는 할 게 없겠지.”

 

사람답게 보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전쟁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상흔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그 시절을 읽는 것을 통해 목격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안드레아의 할머니 집의 풍경이지만 당시 전후 스페인의 푸른빛이 음울하게 떠도는 시절이라 중상을 입은 국가가 겹쳐진다.

 

아리바우 거리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서 내가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통스럽고 불편하고 불쾌한 자극들을 만나야 하고 꺼림칙한 인물들을 지켜봐야 한다이런 일상을 문학 작품에서 만나기는 드문 일일 것이다.

 

저자 자신과 일체화된 이야기는 작품으로서의 일체성도 지극해서 읽게 되면 엄청나게 몰입하게 된다그러니 체력 소모와 피로감 또한 대단하다그래도 읽고 싶었던 읽어서 다행인 경이로운 작품이다시간이 더 지나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책을 덮고 안드레아와 카르멘의 이야기에서 나와 며칠 전 읽은 책의 파블로 네루다를 다시 떠올린다스페인 내전 중에 해외 도피를 시도한 스페인들을 구하러 배를 동원한 칠레의 주스페인 영사배에 탈수 있는 모든 이들을 구하겠다고 한 시인.


그리고 전 세계에서 무기를 들고 스페인으로 모인 당대의 지성인들기자로 종군한 헤밍웨이붓을 들어 학살을 고발한 피카소그리고 폭탄을 퍼부어 수많은 인명을 해친 히틀러의 독일군을 함께 생각해본다인간종이 만든 세상은 언제 봐도 이해불가 기묘한 부조리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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