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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평점 :
이 책 제목을 보고 야구이야기라 짐작했습니다. 불펜은 보통 (구원)투수가 연습하는 공간으로 불리니까요. 어원을 따지자면 bull+pence이니, 황소를 막아 두는 장소, 즉 투우장에서 사용되던 공간이기도 하고, 노동자들이 일하러 나가기 전 대기하는 장소로도 쓰였습니다만.
이 책에는 처음 들어본 명칭이 나옵니다. 선발도 후발도 아닌 ‘중간자.’ 이들이 살아남은 방법들이 적혀 있다고 해서 무척 궁금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선후, 승패, 공수 이렇게 명백하게 구분되는 스포츠 야구와 중간자가 함께 서사를 이루는 구성이 기막히게 매력적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유명세를 몰고 오는 뚜렷한 성공도 아니고 모조리 패배한 것도 아닌 삶들은 중간자적인 삶일 수 있겠습니다. 숫자가 가장 많으니 드라마도 엄청날 것이고, 세상의 많은 부분들을 가장 밀접하게 자세히 볼 수 있는 위치일지도 모릅니다.
스포츠 분야 중 하나일 뿐이지만 야구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드라마, 승부, 조직, 시스템, 불합리, 부조리, 반칙, 범죄 등은 또 얼마나 대단할까요. 저자가 보여주는 인생들이 딱 야구판 같습니다. 사방에서 공이 날아오면 쳐내거나 못 치거나 하는 거지요. 때론 공에 맞기도 합니다.
다들 야구와 인연이 있지만, 누구는 야구판에 남고 누구는 떠나고 누구는 실력 이전에 성별 때문에 좌절을 당하기도 하지요. 문제는 야구판에 남아도 떠나도 좌절을 딛고 관련 업종에서 일을 해도 모두가 사는 일이 점점 힘들어 진다는 점입니다.
강도가 거세지자 진호는 선수로서 한계점이 다다르고 준삼은 성과만 부르짖는 직장인으로 살다 구역질이 나고 기현은 스포츠에 집중하는 기자로 살지 못하고 짐작도 못한 여타의 이해관계와 권력게임에서 그리고 여성 직업인으로서 지쳐갑니다.
이 세 명이 견디고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이 불펜의 시간입니다. 이들이 세상과 삶을 향해 자신의 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던지기까지. 그렇지만 이들이 스트라이크만을 노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점은 삶과 야구 모두에서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는 놓쳐보기로 했다. 비열해질 기회까지 잡을 필요는 없다고, 놓쳐도 되는 기회도 있다고 일부러 볼넷을 던지는 사람이 알려주었다.”
야구 게임에서도 스트라이크보다 볼을 던져야할 때 유도해서 맞춰서 잡아야할 때가 있으니까요. 우리가 사는 모습도 때론 그렇습니다. 아예 공을 던지지 않는 삶이 가능한가 싶어 잠시 생각해 보지만... 우리 역시 던져야만 하는 순간에도 구질을 달리해서 작전을 짜니까요.
“인생은 야구다, 몸에 맞았으니 진루하자, 1루로 간 다음에 생각하자.”
직장과 삶에서 우리가 겪어내는 불필요한 불편함부터 그릇된 불평등을 없애고 바로 잡고, 오래 짊어지고 살던 죄책감을 덜어내는 그 모든 과정이 쉽지 않는 경기처럼 느껴져서 내내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언젠가의 지금의 내일의 나를 동시에 응원하는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망가지지 않고 자신들을 지켜내는 모습이 기쁘고 벅찼습니다. 누군가의 절망이 사라지고 누군가의 삶이 나아지면 그건 또 다른 누군가의 그리고 나의 희망으로 전이되기도 하니까요. 불펜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는 한 삶이란 여전히 희망 아닌가요.
“혁오가 필사적으로 지킨 아름다움이 자신의 조각을 자극했음을, 누구나 아름다움의 조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겐 서로의 조각을 자극할 힘이 있음을.”
인생 한 방이지! 란 말은 너무나 양아치스러워 싫어했습니다. 9회말 투쓰리 역전, 도 확률상 유의미한가 시큰둥했습니다. 몇 년 전에도 9회말 투쓰리 역전 경기를 보긴 했습니다만. 야구만화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고 외치는 해설가들이 너무나 웃겼지요.
그럼에도 삶을 야구에 빗댄 이야기가 실망스럽지도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스포츠서사를 좋아한다는 점을 감안해도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남은 인생에 우리가 선발투수가 되어 스카우트될 일도, 극적인 만루 홈런을 성공시켜 승리를 이룰 일도 없다 해도 말입니다.
“기자님, 이기는 게 중요할까요? 얼마나 중요할까요? 무엇보다 중요할까요?”
그래도 삶이 아직 남은 것이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 아닐까요. 저는 무엇보다 준삼, 혁오, 기현이 웃어서 최고로 좋았습니다. 글로도 미러링 효과가 가능한 것인지 저도 이야기의 끝에서 웃었습니다. 지옥도가 펼쳐질 듯한 시절에 대한 불안과 심적 고통이 큰 날인데도 즐거웠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기쁨과 예정된 모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준삼은 예정된 모욕을 선택할 것이다. 눈물을 흘린다 해도 예측 가능한 편이 좋다. 휴가가 끝나면 갈 곳이 정해져 있는 삶이 좋다.”
만신창이가 된 심정으로 살아갈 이 모든 미래를 모르고... 만루 홈런을 소리쳐 환호하던 그 시절처럼, 느긋하고 행복하게 좋은 이들과 여름 공기를 맡으며 야구 경기를 즐겼던 시간처럼. 잠시.
“이 주임은 누구처럼 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