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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창비 / 2021년 6월
평점 :
이전에도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는 듯한데, 나무 좋아하시나요? 저는 정말 좋아합니다.
“그들은 고독한 사람들 같다. (...) 스스로를 고립시킨 위대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우듬지에서는 세계가 속삭이고 뿌리는 무한성에 들어가 있다.”
섭섭할 정도로 결여된 ‘믿는’ 능력으로 부러워도 갖지 못한 종교에 대한 일종의 동경 같은 것이 있었는데, 오래 전 나무를 믿는 종교인이 될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습니다. 마침 2,000년은 넘게 사셨다는 나무와 가까운 곳에 살던 차라 경외심이 한껏 커진 때였지요.
“얼마나 경이로운 저녁과 밤이었던가! 여름 향기와 가볍고 따스한 거리의 먼지, 윙-하는 모기떼 소리, 전류를 띤 섬세한 후텁지근함이 공중이 퍼져서 은밀한 경련을 만들어냈다.”
저는 제 나무가 있습니다. 태어난 계절은 겨울인데 아버지께서 봄꽃나무를 기념으로 심어 주셨지요. 어릴 적엔 다들 자기 나무가 있다고 믿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매일 저는 쪼그라들고 그 나무는 이미 오래 전 고가의 지붕을 넘어 지금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나와 내 어린 시절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내 고향은 이제 더는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지나간 시절의 사랑스러움과 어리석음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나는 도시를 떠나 어른의 삶을 견뎌야 했는데, 삶의 첫 그림자들이 이 며칠간 나를 훑고 지나갔다.”
봄이면 고혹적이고 환상적인 자태가 되는 제 나무와 달리 저는 아름다운 일, 향기, 결실... 뭐 하나 제대로 내보이지 못하고 삽니다. 오늘도 별 이유 없이 자꾸만 퉁명스러워지는 마음이 걸러지지 않고 입 밖으로 튀어 나오지 않도록 있는 힘껏 붙잡고 버텨야했지요.
사색과 성찰이 모자라 그런가 싶습니다. 혹은 비축이 잘 안 되나 봅니다. 어느새 텅텅 비었다 시끄러우니... 이런 날엔 나무를 보며 시인이자 작가인 헤르만 헤세가 남긴 것들을 읽는 일이 도움이 됩니다. 모든 시와 문장들을 다 읽어낼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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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멈칫거리게 하는 표지의 복숭아나무 그림 탓에 읽기를 미뤄둔 참이었습니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심해서 어릴 적부터 복숭아를 먹은 기억이 없어 맛을 모릅니다. 지인들이 엄청 맛있는 과일인데 안타깝다고 자주 놀리기도 했지요. 심리적 요인 탓에 복숭아 형상조차 반갑지는 않습니다.
무척 아름다운 세밀화들을 감탄하며 보다가도 복숭아 그림과 관련 글들은 후르륵 넘깁니다. 공감하기엔 적대적인(?) 세월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런 한계에 심난하기도 한 심정으로 읽다 보니 헤세에게도 나무는 친구이자, 반가운 세계이자, 일종의 신앙처럼 느껴져 뭉클합니다.
제일 좋아하는 나무 밑에서 읽으면 가장 좋겠지만, 대신 2018년 생일 선물로 초대받은 지나간 전시회가 떠오릅니다. 이 책을 읽고 알고 배우고 생각도 다듬어 본 후 전시를 봤으면 어땠을까 아쉽기도 합니다. 제대로 감상을 못한 기분, 귀한 줄 몰랐던 기분이 듭니다.
그래도 든든한 나무처럼 헤세의 다정한 위로들이 이 작고 아름다운 책에 시와 에세이로 한 가득입니다. 다른 문학도 마찬가지지만 이 책의 그림과 시들과 에세이들은 각자가 조용히 차분히 찬찬히 만나야할 듯해서 별 도움 안 되는 하소연 같은 글을 이만 마칩니다.
부러진 나뭇가지의 딸각거림
쪼개져서 부러진 큰 나뭇가지가
여러해 동안이나 매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메마른 소리로 노래를 딸각거린다.
잎도 없고 껍질도 없어,
텅 비어 활력도 없이 너무 긴 삶에,
너무 긴 죽음에 지쳤어.
나뭇가지의 노래 오래 단단하고 끈질기게 울린다.
고집스럽게 울리고, 은밀히 두렵게 울리네,
한 여름만 더,
한 겨울만 더.
Knarren eines geknickten As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