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 팬데믹을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하는 이유 팬데믹 시리즈 2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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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가 문득 문득 칸트의 이성비판서는 피하지도 돌아갈 수도 없으니 꼭 지금 읽으라고 권하신 교수님이 떠오르곤 했다아직은 실감할 수 없겠지만 졸업을 하고 나면 함께 철학책을 읽을 기회도 시간도 계기도 없을 거라고그러니 지금 부지런히 많이 읽으라고 하셨다.

 

책 읽는 일이 뭐가 특별하고 힘든 일이라 할 수 없게’ 되기까지 할까 믿을 수 없는 마음이 컸다그리고 일상은…… 대체 인류를 위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불분명한 일들을 세상의 멸망을 틀어막듯 매일 성공시켜야했고휴가를 확보해 시간이 난다 해도 철학책을 읽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해 지인들이 한 철학자를 언급하며 그의 책들을 인상적으로 읽었다고 했다누구기에 학생도 아닌 생활인들까지 철학을 다시 보게 만드는 걸까호기심에서 시작한 슬로베니아 철학자 지젝 읽기였다.

 

10년도 더 전의 일이고 다시 그의 책을 앞에 두니 소비되지도 소모되지도 않고 꾸준한 그와 그의 철학이 새삼 대단하고 반갑기도 하다.

 

격리와 봉쇄 정책이 을 생존으로 축소시키므로 반대한다는 말은 옳은가. 

- ‘마스크를 반대하며 시위하는 대부분 포퓰리스트들이나 뉴리아트들은 어떻게 급진 좌파의 일부와 조응하는가. 

판데믹은 착취된 자연의 보복 아닌가. 

그레터 툰베리와 버니 샌더스는 어디로 사라졌나.

 

공적 영역에서 그레타와 버니가 사라진 일은 더 통합된 목소리가 필요한 이 바이러스 위기의 시국에 걸맞지 않게 그들이 너무 급진적이어서가 아니다그렇기는커녕그들은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았다자신들의 프로젝트를 감염병의 조건에서 재활성화할 수 있는 포괄적인 새로운 전망을 제안하는데 그들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기후재앙의 시대와 금융자본주의 사회에 맞선 포괄적 전망 부재를 경고한다. 

판데믹으로 도드라졌을 뿐 이전에 이미 내재한 긴장들이 현재에 부각된 문제점들이다.

 재앙에 맞선 연대보다 대결이 가열되는 사태 미중무역전쟁처럼 는 판데믹으로 인한 경향성이다.

 진짜 위기는 봉쇄격리가 아니라 다시 움직일 때 온다.

 

전 세계가 공동의 을 상대로 싸우고 있으니 놀랍게도 적대적인 외계인이 아니라 지금도 인간이 끝없이 변이진화시키고 있는 바이러스 어느 나라 누가 현 상황에 대해 고찰한 내용일지라도 접점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다들 비슷비슷하게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판데믹 이전에 우리가 누리던 것을 그대로 다 돌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어떻게 살 수 있는 걸까.

 

의료의 이름으로 자유를 폐지한다면,

결국 의료도 폐지될 것이다.

삶의 이름으로 인간적인 것을 폐지한다면,

결국 삶도 폐지될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자유의 이름으로 의료를 폐지한다면,

결국 자유도 폐지될 것이다.

인간적인 것의 이름으로 삶을 폐지한다면,

결국 인간적인 것도 폐지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이 두 시는 한 때 공저자였던 아감벤의 시에 지젝이 다시 돌려준 말이다나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떤 시에 더 공감하는지공감의 이유는 무엇인지 무척 궁금하다.

 

지젝은 우리 모두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갑자기 그러기는 어려운 일이다그저 정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도서로 얘기라도 실컷 하고 나면 뭘 해야 할지 난감하고 두려운 이 갑갑함이 조금은 부서지지 않을까.

 

우리가 거의 매일 피부로 느끼고 있듯진짜 문제는 (...) 불확실성 속에서 삶이 그저 지루하게 이어지며 항구적인 우울증을 유발하고 버텨내려는 의지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생각도 감정도 복잡하고 힘들지만 오늘도 나는 가장 치열하게 사는 이들을 최대한 선명하게 떠올려 보려 한다.

 

언제 시작했는지는 알지만 언제 끝날지는 모르는 현실에서 매일 코로나 위기와 최전선 현장에서 싸우고 있는 의료진들이다.

 

따뜻한 관심도 위선적인 칭송도 모두 잠잠해 졌지만 이들은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자신이 처한 위험을 알면서도 오늘도 출근을 해서 맡은 일을 어떻게든 해내고 있을 뿐.

 

우리는 맨 얼굴이 아니라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 더 많은 인간성이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래 전 생태학 공부를 할 때, ‘자연을 보호하자’ ‘지구를 지키자는 구호들이 여전히 자신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기 위한 인간의 안간힘처럼 느껴진 적이 있다.

 

자연은 지구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이 사라지면 (어쩌면 파티를 열고) 오래 오래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지구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인간에게 의미 있는’ ‘자연환경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자연이 살아남을지지구상에 자연의 생명체가 살아남을지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자연은 살아남을 것이다단지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화할 뿐.”

 

물론 지금 인간이 가진 핵무기를 한꺼번에 지구 어딘가를 향해 모조리 발사하면 어떤 임팩트 있는 결과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문제는 그렇게 해서 발생할 모든 결과들에 가장 취약한 생명체들 또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하던 대로 어리석은 짓을 계속하며 천천히 고통 받다 멸종할지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이 결국엔 자멸의 무기를 사용해서 순식간에 죽게 될지 모를 일이다어떤 미래와 희망을 기대해야 하는지 날마다 더 모르겠다.

 

그래서 지젝처럼 이렇게 해야 한다하면 된다고 아직 말해주는 이들이 고맙다. 부디 그의 진보성과 연대의 철학이 효능 좋은 해답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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