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과 망원 사이 - 1인 생활자의 기쁨과 잡음
유이영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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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근무지가 합정과 망원 어디였다. 야근과 밤샘이 격일로 이어지는 날이었으니 실제로는 주생활공간이었을까. 답답하거나 친구들이 위문(?)을 오면 함께 얘기하며 걷다 양화대교를 건너 다녔다.  근래 합정동에 들러 올 일이 생겼는데딱히 좋을 것도 없는 추억이 한꺼번에 화라락 덮쳐드는 기분이다이럴 때도 저럴 때도 책을 읽고 자가 치유를 하는 것이 익숙하니 오늘은 이 책을 펼쳐 본다.

 

유이영 저자는 9년차 신문기자이기도 하다 근래 기자인 저자들의 책을 읽게 되는 우연이 이어진다저자는 합정과 망원 사이에선 7년 동안 1인 생활자로 살았다시기는 다를 지라도 상상하고 짐작할 여지가 많아 일반 반가웠다여기를 걸었으리라여기를 달렸으리라저기 음식을 먹어봤으리라 등등.

 

별 일 없는 직장일도 괴롭고 힘든데 일터에서 부당한 미움을 흡수한 시간이 있었다고 하니 숨이 턱 막힌다한강이 가까워 그래도 숨 쉬는 일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해본다역시나 밤의 한강을 달렸다고 한다나는 걷고 저자는 달리며 스쳤을 지도 모르는 시간을 상상하며 뒤늦게 응원을 보낸다.

 

경제지리학에서 분석하는 도시 유형들에는 기술이 집약되고 재능이 모이는 이유에 해당 지역이 관용tolerance’가 중요하다고 평한다살기 불편한 곳에 사람이 모일 리 없으니 지극히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지방의 소멸이란 안타까운 현상에는 전체적 인구 감소와 사회적 물적 인프라의 중앙 집중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 지역 사회의 관용성 부족도 한 몫을 할 것이다.

 

남이 나의 모든 이력과 가족관계매일의 일상소위 수저 개수까지 알아야 한다고그게 친함의 척도라 여기는 동네에서 나는 절대 살 수가 없다저자가 합정과 망원 사이에서 7년 간 살고 글로 남길 기억이 축적된 이유는 비혼 30대 여성의 정체성이 도드라지지 않는쓸데없는 스트레스가 줄어든삶의 많은 피로감이 덜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서교동과 합정동 어디 어디가 자꾸 떠오른다주문을 마치고 나면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는 카페에 다시 앉아 있고 싶다저자가 언급한 곳들 중 한 곳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정기적으로(?) 방문하던 곳이었고나는 타인에게 불편을 끼칠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 카페에 머무는 것을 한 차례도 경험하지 않았다한 무리의 으쌰으쌰 수다도 호탕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지적 자체를 못 견디는 남성들도 없었다그립다.

 

그렇다고 합정과 망원에 사는 이들이 마냥 개인주의에 경도되고 매몰되어 사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개인으로서의 내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공동체의 의미와 가치를 확실히 알고 사랑하고 소신과 세계관을 실천하며 참여하며 산다저자가 소개하는 종이잡지클럽’, 비건 식당 띵크비건’, 반려식물을 위한 식물 병원’, 퀴어 프렌들리 동네 수제 맥주집’ 등등.

 

저자는 다행히 혼자 뀌는 일 말고 글 쓰는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이름은 쓰고 달리고이다글쓰기 모임이 또 다른 한강이라고 말해서 마음에 물결이 출렁했다마음은 강물에 풀 수도 있지만 글로 풀 수도 있는 것이니까다행이다.

 

타인의 오독을 감수하고 어디까지 내 신념을 공개할 수 있는가그것이 기록으로 남고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내 생각을 부정하는 위험을 어느 선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가. (...) 너무 과격한 소재가 아닌가 갸우뚱하며 내 글을 읽던 차에

 

이 정도도 말 못하고 어떻게 살아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자기 검열의 선을 가뿐이 뛰어넘은 기분이 들었다.

 

쓰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제 언어를 찾아 어떤 사건을 해석해내는 것다른 사람이 틀을 깨고 나오는 것을 보는 기쁨이 크다. (...) 읽고 난 후의 우리 대화 소재는 TMI이다살에 대해 말하는 대신 내 몸을 압박하는 규율들에 대해 쓰고 말한다결혼할 남자에 대해 말하는 대신 사랑과 외로움관계에 대해 쓰고 말한다.

 

혼자 썼다면 글에는 여전히 분노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을 테다한 주 동안 쌓인 얘기가 밖으로 토해지고 다른 사람의 얘깃거리가 내 마음을 드나들면서 염세주의적 태도가 많이 희석됐다타인의 문장에 수백 번의 큭큭을 감응하며 생긴 변화이다.

 

특이한 경험인 때밀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세신사보다 이 말이 더 좋다고 함나는 목욕탕만을 목적으로는 잘 안가는 지라 나체로 누워 남에게 몸 세척을 맡기는 일에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다.

 

두 해 전 12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어릴 적부터 친구가 남한 한 바퀴 돌기 여행 중 담양리조트관광호텔 온천탕에서 세신서비스를 발견하고(?) 원했을 때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우정을 위해 감행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우리 세 명은 오래된 절친이었는데 한 친구는 끝까지 못하겠다고 배신을!

 

어쨌든 두렵고 민망한 경험이었는데 나는 친구를 위한답시고 친절한 설명을 세신사들께 해드리는 바람에, 12년 만에 목욕탕을 방문한 미쿡에서 온 친구는 신상 고백과 더불어 때밀기에 관한 여러 건강의학정보를 학습하며 오래 오래 욕탕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고 미쿡식 습관으로 팁을 드리는 진풍경을!

 

구독하는 잡지가 있으신가요?

 

이 책에는 저자가 서교동 재즈 클럽 재즈다에 가려다 문이 닫혀서 모퉁이를 돌아 발견한 종이잡지클럽 THE MAGAZINE CLUB’ 이야기가 나온다멋지다잡지 클럽이라니서교동을 뱅글뱅글 돌며 여러 해 살았는데 나는 한번도 못 본 곳이다좋아하는 <우먼카인드>와 제주 사는 친구가 사랑하는 제주 지역 잡지 <iiin>이 등장해 눈이 커지며 읽었다.

 

그 클럽 계단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요즘 시대에 잡지를 좋아하는 건 촌스러운 일이잖아요.”

 

그러면 어때좋은 걸. Who cares!

 

저자가 만들어 보고 싶은 잡지들의 면면을 공개(?)한다.

 

인물 잡지 <장녀클럽>도 만들어보고 싶다.

인터뷰이는 대한민국 출생 첫째 딸이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불편한 농담을 엮은 대화집 <개소리 사전>도 내보고 싶다.”


펀딩 열리면 참여해야지!

 

역시 좋은 책만 한 위로가 없다


체감 상 백만 가지 정도 더 재미난 이야기들이 가득하지만 오늘의 감정 치유 쓰기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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