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확신해서 더 이상한 일종의 선입견이랄까정세랑은 소설만 쓰는 작가야전작들보다 길고 평범해진 제목에 낯설어하며 찾아본 책은 에세이였다처음 본 생명체인 듯 에세이 앞에서 손이 움칫움칫했다읽어 보라고 출간된 타인의 일기 앞에서 망설이는 기분처럼.

 

현실이 소설보다 덜 극적일 리 없고 정세랑의 시선에 잡힌 장면들이 납작하게 전해질 리도 없다여행을 싫어하는 작가의 여행기를 여행을 좋아하지만 갈 수 없는 시절의 나에게 위로의 선물로 주었다가장 많이 그립고 제일 먼저 갈 곳부터 펼쳐 본다이곳을 여행한 작가가 이곳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다면 나머지 여행을 따라갈 여력은 사라질 거야단정하며.

.

.

.

에세이 초반을 너무 허투루 읽었다정세랑은 분명 이 지난 여행의 기록들은 사실 여행 그 자체보다는 여행을 하며 안쪽에 축적된 것들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라고 밝혔는데 나는 내가 보고자 하는 장면들이 나오라고 나오길 집착하느라 경고와도 같은 이 문장을 놓쳤다.

 

그 대가는 나의 안쪽에 축적된 것들이 정세랑의 문장에 이끌려 심연에서 떠오르는 것을 말리지 못하고 고스란히 느껴야 하는내밀한 내 것들이라 나를 모질게 뒤흔들 강렬한 모든 것이었다거만하고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며 어디 좋은 곳 다니셨나보려던 마음은 자세를 고쳐 앉는 것으로 휘발되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차별과 모멸을 겪으며 깎여나가지 않는 세계를 절실히 바란다. (...) 가까운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을 때 그 누구도 혼자 행복할 수 없으니까누구나 조금씩의 모멸을 견디며 살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퀴어들이 매일 맞닥뜨려야 하는 모멸은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 같아 우려가 크다우정에서 출발하는 신념이 있고나는 어느 도시에서 눈뜨건 무지개 깃발을 흔들 준비가 되어 있다.”

 

후배였고 친구가 되었고 동료가 되어 함께 일하기도 한 이가 있다학부생이 대학원 수업 청강 신청을 해서 듣던 당돌하고(?) 반가운 후배였는데 유학을 다녀온 사이 아주 훌륭한 논문을 쓰고 배운 것들을 현실로 바꿀 정확한 그곳에서 사회인이 되어 일하고 있었다.

 

나는 배운 바를 모두 낭비하고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사느라 서로 일하는 세계는 달랐지만 종종 낮에 만나 밤이 되도록 나누는 이야기들은 늘 마지막까지 아쉬웠다.

 

그런 만남이 이어지던 몇 해 후 서로의 베를린 출장 기간이 12시간 정도 겹쳐서 일이 조금 더 늦게 끝나는 나를 만나러 와주었는데 독일인 치고는(?) 기이할 만큼 사교성이 좋은 (내가 만난분이 친구와의 사적인 자리까지 남아 있었다.

 

대화가 이어지다 어릴 적 베를린에 있던 김일성 무슨무슨 학교에 다녔다고 코리아에 대한 친근감(?)을 표시했다이상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대한민국의 인지도는 실상 늘 북한보다 낮았다그리고 다른 나라 국민들은 의외로 코리아의 사정을 잘 모른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나는 순간 친구의 손목을 낚아채서 달려 도망가고 싶었는데 그건 내게 빨갱이 사상이나 북한 혐오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친구가 당시 모정당의 정책연구위원이었기 때문이다상식적인 발언만 해도 혹은 본인이 한 말이 아니라도 찍히면 빨갱이 되는 그런 사회에서 김일성학교출신 사업가 대표를 구 동베를린에 가까운 지역에서 만났다는 얘기가 돌면 본인은 물론이고 소속 정당은 어찌될 것인지 오싹했다.

 

돼먹지 못한 검열 사회에 살다보니 내게도 체화된 자기검열기능이 자가 반응처럼 작동했다문제를 마주하면 피부에 살얼음이 끼일 정도로 비유입니다초능력 없습니다 뇌가 서늘하게 식어가는 유형이라 머릿속엔 갖가지 가능 시나리오들이 떠올랐고 각 상황에 맞는 답변 또한 등장하여 짝짓기를 시작했다혹시 취조를 당할 경우 내가 마련한 자리에 친구는 모르고 왔다란 무기를 정교하게 다듬어 잘 쥐어주자 비장한 결심도 했다.

 

그런 위험쯤은 나보다 백만 배는 더 잘 알고 겪어왔을 친구는 의외로 태연했다시간은 흐르고 서늘한 베를린 야외공기에도 불구하고 자꾸 땀이 배어나는 나는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기에 늦지 않았어라고 마음을 거듭 굳히고 있었고 친구는 잠시 후 자리에 합류한 북한에 지점을 개설할 예정이라고 유럽과 코리아 모두에 익숙한 사원을 찾고 있다는 이탈리아 출신 사업가의 이야기도 예의 바르게 듣고만 있었다.

 

함께 공부하고 삶을 수다로 나눈 시간이 길어 이미 특별한 친구이지만 나와의 조우로 인생이 망가졌을 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혼자만 더 애틋해진 친구는 그날 이후 별 일 없이 그리고 매일 별 일을 겪으며 잘 살고 있다한국의 성정책이 인류 공영을 위해 보편성을 띠는 방향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모든 과정과 결과와 문구 하나마다 내 친구의 삶 전체가 재료로 들어있을 것이다.

 

정세랑 작가처럼 내게도 우정에서 출발하는 신념이 있다.

 

내 창내 방내 집내 생각내 세계배 바람에도 친구와 함께 언제든 흔들 무지개 깃발이 있다.

.

.

.

미얀마 시민들을 위해 일회용 생리대를 기부했습니다.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쿠데타가 지속되면서

미얀마 시민들의 고통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미얀마 시민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한국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를 통해

일회용 생리대를 기부했습니다.

 

미얀마는 지금 마스크생리대와 같은 생필품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미얀마 민주화에 연대하기 위해 여력이 있으시다면

물품을 보내주세요

 

물품 후원 아이쿱생협서울지역협의회

 

#미얀마민주주의네트워크 #여성환경연대 #한국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사랑담는사람들

 

늘 마음보다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서 기막히고 속상하고 사상자 소식에 사는 일이 아득해지지만 눈에 띄는 대로 뭐든 해본다때로 그것은 #savemyanmar 해시태그 하나일 때도 있고 때론 생색만 내는 적은 금액일 때도 있다그것도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지만 솔직하게는 깊은 절망도 동시에 느낀다이런 위로를 받을 줄 몰라 감사하다.

 

여자들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세계 곳곳의 여자들의 삶에 대해세계가 이렇게 망가지고 무너져가는 것은이 세계를 복원하고 개선할 가능성을 가진 여성들이 교육과 사회 활동의 기회를 얻지 못해서가 아닐까 두려워하며 추측하기도 한다. (...) 여성이 극도로 억압 받는 지역에서도 의미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먼 곳에서도 지지를 보내기 예전보다 쉬워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모여서 강해지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인권 단체에 기부를 하고 오지은의 [작은 자유]를 들으며 마음을 다진다.”

 

기대한 혹은 예상한 여행도 에세이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나는 정세랑의 작품들을 소비하는 독자였을 뿐이었나 싶게 작가의 심력도 필력도 몰랐다고 고백한다어쩌다 여행 에세이를 9년째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 것도 허투루 읽었다. 9년 그 이상의 무게를 담지 한 글을 마주한 결과가 당혹스럽지만... 괜찮다멋진 내용들이 가득한 런던뉴욕오사카타이베이아헨에는 오래 정차하지 않은 대신 정세랑이 들려 준 안쪽과 나의 기억 속을 왕래했다.

 

SF, 판타지호러스릴러 내가 좋아하는 장르들을 자유롭게 오가던 <드림드림드림>이 좋아 그의 책들을 읽으며 10년이 지났다<옥상에서 만나요> <시선으로부터>를 만나서는 아프고 뜨거워졌지만 지금도 나의 최애는 <피프티 피플>이다이야기를 견인할 단 한 명의 주인공을 없애버린대담한 작가도 다 있구나 싶었던 당혹스러웠던 매력은 모여서 강해지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정세랑을 만나 지금 완독을 이룬다.

 

책 한 권 없이 몇 편의 단편뿐이었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해주시던 분들이……아무것도 아닌 나를 선택해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분들이 의기양양하실 수 있게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50권을 쓴다는 약속을 지키실 것 같아 마음이 갈급해진다다 읽으려면 건강과 수명 관리를 더 진지하게 해야 한다내내 투명했는데 뾰족하고 확실하게 형체를 만들어가는 마음이 보인다사랑하기로 선택 당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