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퍼 네트워크
챈들러 베이커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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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게 만들어진 예술품과 같은 미스터리/스릴러 소설을 읽고 나면 어떤 구절을 소개해야 중요한 모든 것을 들키지 않을까 고민스럽다이렇게 시작해볼까요.

 

평일 오후 회사 18층 발코니에서 누군가 추락한다.

삼 주 전 스포츠 의류 브랜드 트루비브의 CEO가 심장마비로 돌연사한다.

회사 소속 변호사들이 대처 방안을 긴급히 논의한다.

대표 변호사 에임스는 유력한 차기 CEO 후보이지만 여성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많다.

회사 여성 직원들 사이에 공유되는 배드맨 리스트에는 여러 종류의 끔찍한 짓을 하는 남자들이 올라 있다.

전체 이야기를 교차 진행하는 네 명 중 한명인 슬론은 과거에 에임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십 년 동안 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 왔는데 베드맨 리스트에 에임스의 이름을 올려야 할까 고민한다.


 

회사에는 남자들이 있었다. (...) 그런 남자들과 우리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했다. (...) 회사가 전통적인 남학생 클럽의 영역이라면우리는 비밀 여학생 조직을 구성해 이에 대항하는 셈이었다우리는 비밀 악수법을 공유했고서로를 여성 전우로 여겼다.”

 

저자 챈들러 베이커는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했으며 실제 위스퍼 네트워크*를 경험했다그런 이유로 이 책에 등장하는 워킹맘들과 직장을 다니는 여성들의 경험을 대단히 현실적으로 그린다.


 

데이트에서든 직장에서든 아이의 존재를 숨기는 것의 위력을 새삼 깨닫는다남자는 아들과 온종일 낚시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엄마는 애를 병원에 데려가느라 점심시간을 넘겼다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대체로 더 낫다아이 덕에 남자는 영웅 소리를 드디만 여자는 변변찮은 직원으로 전락한다.”

 

막 충격적이거나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없다는 것이 슬프고 답답하다예를 들면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일하기는 원하는일하기도 바쁜데 웃으라는 말을 듣고그 와중에 몸에 자꾸만 손을 대려는 남성들을 막아야 하고…….

 

이런 일을 겪는 단 하나의 이유가 그저 일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니…….


우리는 온갖 죄책감을 느꼈다워킹맘이라서아이가 없어서사회적 의무를 저버려서그럴 여유가 없는 걸 알면서도 초대에 응해서이미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일을 거절해서 혹은 거절하지 않아서월급 인상을 요구해서 혹은 정당하게 요구하지 못해서 (...) 충분한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게 또 죄책감으로 다가오니이런 도덕적 딜에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우리 능력이 대견할 지경이었다.”

 

그럼 다시, 18층에서 추락해서 사망한 이는 누구일까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가해자일까피해자일까?

 

미스터리 스릴러로서 치밀한 구성을 탄탄하게 받히기 위한 진행 방식과 구성은 멋졌다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사건의 진상을 고발하는 각종 진술서와 녹취록은 어딘가 메모라도 하며 기억해야 할 듯수사관처럼 지켜봐야 할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일은 이렇게 미스터리 스릴러물이 될 수 있다안타깝게도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성인 직장 내의 일만도 아니라 미성년 여성들의 일상도 위태롭긴 마찬가지이다.

 

그럼 우리 애는 뭘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 남자애한테 그만하라고 의사 표현도 했고책임자도 찾아갔지만 도움을 거절당한 상황에서요. (...) 학교가 선호하는 여학생의 행동 방침은 뭐 그런 건가요그냥 받아들여라몸을 만지게 해줘라? (...) 참고만 있어라왜냐면 남자애들은 장난이라고 생각하니까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으니까걔들이 그러고 싶어하니까?”

 

역겹게 진화한 사이코패스 범죄로 분석되는 N번방 수사와 처벌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주범을 잡아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천 명에 이르는 유료회원들은호기심에 가입한 것은화면 속 실제 인간의 고통을 구매해서 재밌고 즐겁게 소비한 것은 무죄인가?

 

이 소설의 여성들이 거의 모두 변호사라는 점은 무려 여성 검사도 고위 공직자를 포함한 여러 명이 함께한 공간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누구도 말리거나 증언해 주지 않는 상황에 처하고 그 충격으로 태아를 잃고 마침내 말을 꺼낼 때까지 혼자 온갖 괴로움을 견뎌야 했던 한국 사회의 일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현실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소설 속 인물들이 여성들 서로서로에게 경고를조언을표시를충고를 주는 일은 긴장을 유지하는 멋진 설정이었다가 서글픈 우정이었다가 마음이 아릿해지는 현실의 연대로 전환된다.

 

아주 오래 전 남자들 가득한 학과에서 불과 한 두 살 많은 여자 선배들이 신입생인 우리에게 이런저런 조심할 점을 리스트로 만들어 소곤소곤 경고해 준 것처럼.

 

나쁜 놈들모든 것을 알면서도 침묵을 강요하는 더 나쁜 조직들내내 분해서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 지가 궁금해서 거의 모든 걸 미루며 끝까지 읽었다위스퍼 네트워크는 잘 작동하고 있는지 문득 걱정하며.

 

!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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